는 모든 커피 한 잔 한 잔에 나의 마음을 쏟아 붓는다. 만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혹은 어떤 가치 있는 기업에 마음을 쏟아 붓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회장의 자서전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담긴 성공신화(원제: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쏟아부어라;Pour your heart into it)’중에서)젊은이들 사이에서 ‘별 다방’으로 불리는 스타벅스. 초록색 동그라미 안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실제로는 반은 여자이고 반은 새인 요정으로 세이렌이라고 한다)의 모습을 담은 이 회사의 로고는 이제 전 세계 어느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커피를 차별화해 해가 지지 않는 커피 제국을 건설한 스타벅스. 그 중심엔 하워드 슐츠 회장(53)의 커피에 대한 열정과 커피를 대하는 남다른 기업가적 사고가 관통하고 있다.슐츠 회장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빈민가 아파트에서 자란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다. 불우한 시절에 이웃 아이들과 운동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고 덕분에 미식축구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그는 제록스의 판매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제록스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스웨덴의 퍼스토프라는 회사가 미국에 진출하면서 설립한 가정용품 판매회사 해마플라스트로 자리를 옮겼고 27세의 나이에 부사장까지 올랐다. 당시 그는 연봉 7만5000달러와 회사 차, 판공비, 1년에 네 차례의 스웨덴 방문을 포함한 무한정의 여행권을 제공받았다. 고액 연봉과 안락한 생활에 안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더라면 아마 지금의 스타벅스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1981년 우연한 기회에 시애틀의 스타벅스라는 회사를 접하고 고액 샐러리맨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스타벅스는 1971년 고든 보커, 제럴드 볼드윈, 제브 시글 등 세 명이 공동 창업한 회사로 최고급 커피 원두를 판매하고 있었다. 스타벅스라는 상호는 허먼 멜빌의 해양 소설 ‘백경(모비딕:Moby Dick)’에 등장하는 ‘피쿼드’호의 일등 항해사 이름에서 비롯됐다. 이 이름은 초기 커피 무역상들의 항해 전통과 거친 바다의 로맨스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커피 회사 스타벅스의 이미지와 부합했다.하지만 초기 스타벅스는 지금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무엇보다 당시 스타벅스는 지금처럼 머그 잔이나 종이컵에 커피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커피 원두를 백(bag)에 넣어 팔아야 하는 식료품이나 집으로 가져가야 할 농산물로만 취급했다. 창업자들은 커피 자체를 사랑하는 ‘커피 순수주의자’였으며 커피에 대한 미각적 흥미를 갖고 있는 소수의 고객들을 대상으로 영업하고 있었다. 점포 수도 불과 4개뿐이었다. 1982년 마케팅 부문 책임자로 스타벅스호에 합류한 슐츠는 이듬해 이탈리아 밀라노 출장에서 커피 사업의 결정적인 전기를 맞게 된다. 그 때까지 커피를 백에 넣어 팔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그는 이탈리아에서 사람들이 커피 바에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휴식을 즐기는 것을 보고 ‘스타벅스가 해야 할 일은 커피 원두만 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처럼 커피의 신비와 로맨스를 바로 커피 바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나는 사람들에게 로맨스와 편안하게 모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 마시는 행위를 하나의 심포니로 승화했고 그것은 너무도 멋있게 느껴졌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단순히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판다’는 스타벅스의 성공 전략이 싹트기 시작한 순간이었다.하지만 스타벅스의 창업자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결국 독립을 결심하게 된다. 투자자들로부터 어렵게 자금을 모은 그는 1986년 시애틀에 ‘일 지오날레’라는 이름의 이탈리아풍 커피점을 열었다. 이듬해 3월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스타벅스 창업자들이 점포와 상표권을 사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온 것이다. 당시 일 지오날레의 점포는 3개, 스타벅스 점포는 6개. 스타벅스 인수가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타벅스 점포와 상표권을 380만달러에 사들였고 통합 회사의 이름도 스타벅스로 바꿨다. 최고급 커피를 공급한다는 스타벅스의 정신과 사람들이 집과 회사 밖에서 편하게 만나 즐길 수 있는 ‘제3의 장소’를 제공하겠다는 그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결합되는 순간이었다.그는 스타벅스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빠른 속도로 미국 시장을 석권했으며 10년만인 1996년 매출 10억달러 고지에 올랐다. 현재 스타벅스는 전 세계 약 40개국에 1만1000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에도 1999년 1호점을 열고 진출했으며 현재 국내 점포 수만 약 150개에 달한다.특이한 점은 슐츠 회장이 스타벅스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대중 매체를 통한 광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타벅스의 브랜드 파워는 상당 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람들의 평판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슐츠 회장은 “초창기에 우리는 커피를 팔면서 새 매장을 계속 열고 종업원들을 교육하느라 너무 바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어떻게 5년도 안돼 미국 전역에 알려진 브랜드가 됐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 경영학 서적에도 있지 않은 방법으로 브랜드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스타벅스가 고속 성장한 데에는 슐츠 회장의 커피에 대한 남다른 열정뿐 아니라 각별한 직원 존중 철학이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슐츠 회장은 1988년부터 파트타임 직원을 포함한 모든 직원들에게 종합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당시 대부분 회사들은 건강보험을 ‘비용’으로만 생각하고 이를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반대로 나갔다. 건강보험 확대는 표면적으로는 경비가 많이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높은 혜택으로 직원들의 이직률이 떨어지면 결국 사람을 새로 모집하고 훈련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스타벅스처럼 파트타임 종업원들이 고객들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회사에선 이들의 복지 혜택을 늘리는 것이 이들의 영업 의욕을 고취하는 것과 직결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건강보험 혜택에 대해 “우리가 지금까지 결정한 최상의 선택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그는 또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한 모든 직원들에게 ‘원두 주식(Beans Stock)’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붙인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제공했다. 스타벅스의 모든 종업원을 사업의 동반자로 만들겠다는 취지에서다. 그의 직원 사랑은 모든 직원을 종업원이라는 말 대신 파트너라고 부르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직원 존중 정책의 효과는 이직률 감소로 이어졌다. 스타벅스는 다른 소매점에 비해 직원들의 이직률이 매우 낮다.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는 만큼 떠나는 직원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그는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스타벅스의 히트 상품인 ‘프라푸치노(차가운 카푸치노라는 뜻)’가 대표적이다. 이 커피는 강하게 볶은 커피와 우유를 미세한 얼음과 섞은 것으로 무더운 남부 캘리포니아 점포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개발 요구에서 시작됐다. 그는 처음에는 이 제품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직원들을 믿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프라푸치노는 본격적인 판매가 시작된 1996년에만 총 매출액의 7%를 차지,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위크로부터 ‘올해 최고의 상품’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슐츠 회장은 또 일선 점포의 아이디어를 채택, 자체적으로 음악을 엄선해 매장에서 들려주고 그 음악이 담긴 CD를 판매하는 사업에도 뛰어들었다.슐츠 회장은 1992년 스타벅스를 주식시장에 상장하고 나서 자신의 기업가 정신을 다시 한 번 가다듬는 기회를 맞았다. 스타벅스가 상장회사가 됨으로써 일류 회사의 반열에 끼게 된 것은 분명 성과였다. 하지만 상장 직후 그는 주가가 오르고 내리는 데 따라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내 주가에 울고 웃지 않고 기업 경영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단기적인 주가 변화에 신경 쓰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는 기업의 내실을 다지는 데 힘을 쏟기로 한 것이다.슐츠 회장은 기업의 성공에 대해서도 “성공은 (직원들과) 나누어 가질 때 가장 달콤하다”는 남다른 소신을 갖고 있다. 결승선에 혼자만 도달하면 공허한 마음만이 남게 되는 반면 한 팀을 이루어서 달린다면 결승선에 함께 도달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는 나중에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경주에서 승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또한 경주가 끝났을 때 아무도 뒤에 처져 있지 않기를 바랐다. 만일 소수의 회사 간부와 주주들이 종업원들을 희생시켜 승리한다면 그것은 승리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가 함께 결승 테이프에 도달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