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환 ‘힘수학’원장의 멋진 인생 이모작

한민국 사교육 1번지인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의 학원가. 빽빽한 학원 간판들 사이로 얼굴을 내민 ‘힘’수학은 문을 연 지 2년이 채 안 됐지만 특목고 전문학원으로 소문이 나면서 짧은 기간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해 외국어고등학교 합격률은 75%. 대치동과 분당 2곳의 수강생만 해도 800~1000명에 달한다. 3월에는 수지에 또 하나의 분원을 열었다. 연이어 5월에는 바다 건너 중국에 힘수학 베이징 캠퍼스를 오픈한다. 조동기 논술학원과 합작으로 국어-수학의 짝을 이뤄 해외 진출의 포문을 연 것이다. 잘 나가는 학원들도 최소한 6년은 걸려야 가능했을 일을 단기간에 이뤄낸 셈이다.국내 학원업계는 이미 ‘레드 오션’으로 불린다. 치열한 경쟁의 성숙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어 단기간에 브랜드를 구축한 힘수학의 김민환 원장(41)은 뜻밖에 LG그룹 샐러리맨 출신. LG화재, 그룹 연수원인 인화원, LG텔레콤에서 8년 넘게 근무하다 서른일곱이던 2002년 11월 사표를 내고 학원 강사로 변신했다. 강사 생활 1년 반 만에 학원을 차렸고, 학원 운영 2년 만에 직영 분원을 4개나 갖게 된 셈이다. 투자유치, 합종연횡, 마케팅 전쟁 등 이미 ‘기업화’의 게임에 들어선 학원 업계에 뛰어들면서 김 원장이 투자한 자금은 총 3억4000만원이다. 벤처기업에 다니던 동생을 설득해 탈탈 턴 돈으로 대치동과 분당 2곳에 동시에 오픈했다. 임대 보증금 1억원, 인테리어 및 에어컨, 교구 구입비 등이 6000만원 전후씩, 두 곳에 총 3억2000만원이 들었다. 2000만원은 운영자금은 남겨뒀다. 각종 학원 광고가 일간지를 도배할 정도로 학원 업계 마케팅 물량 공세가 만만치 않지만, 김 원장의 자금으로는 광고할 꿈도 꾸지 못했다. 학창시절부터 ‘수학’ 하나는 자신 있었던 이공계(고려대 산업공학과) 출신이라지만 서울대, 포항공대 박사들도 적지 않은 대치동 학원가에서 김 원장 정도의 수학 강사 이력이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자금력도, 막강한 스타 강사 파워도 없이 뒤늦게 시작한 김 원장은 어떻게 단기간에 학원가에 자리 잡았을까. “성공비결을 꼭 집어낼 순 없지만 샐러리맨 경험이 단기간 급성장에 큰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는 게 김 원장의 말이다. 특히 LG 근무 시절 ‘고객부터 생각하고 서비스를 개발하는 습관’을 통해 얻은 ‘고객중심 사고’는 그의 최대 경쟁력이다. LG그룹 신입사원 시절 인화원 교육에 얽힌 에피소드. “저는 사가(社歌)를 부르면 뭔가 솟구치는 게 있을 정도로 소속감을 갖기를 원했지만 인화원 교육은 생각보다 밋밋하더군요. 교육 후 LG화재로 배치받자 곧장 인화원 교육담당 팀장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교육받는 입장에서 원하는 건 이런 것이더라, 그걸 충족하려면 이러이러해야 할 것 같다. 대충 이런 얘기를 진솔하게 보냈습니다.” 깊은 인상을 받은 인화원 신입교육 담당자는 1년여 후에 인화원으로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는 교육받는 ‘고객’들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을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2년여를 지냈다. 아예 인화원 근처에서 먹고 자면서 새벽까지 일하고 명절에도 수위 아저씨와 둘만 남아 있을 정도로 ‘극성’을 부렸다. 그렇게 보낸 입사 후 초기 5~6년 간 그는 고객에 대해 배워야 할 많은 것을 깨우쳤다. 인화원에서 일한 지 2년여 됐을 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IMF를 계기로 대규모 감원의 광풍이 불고 간 인화원에는 부장, 차장 1명씩과 사원 2명만이 남았다. 부장, 과장 1명씩에 대리 5명 사원 2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절반 이하로 인원이 줄어든 셈이다. 중간관리자의 실무 기여도가 낮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짜 일할 사람이 3분의 1 이하가 된 꼴이었다. 이런 상황은 ‘일 욕심’ 많은 그를 일 중독증 환자로 몰아넣었다. 당시 그의 직급은 대리. 쪼그라든 인원으로 업무의 질을 유지하자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더 많이’ 일하는 것뿐이었다. 새벽 2~3시에 집에 가서 아침 7시50분에 출근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프로그램 설계에서 개발, 운영까지 모든 것을 담당했던 김 대리는 쉴 틈이 없었다. 한번에 480명씩 입소하면 10개 반으로 짠 뒤, 각 반마다 프로그램과 주무강사를 정하고 3주 동안 사고 없이 교육시켜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을 혼자서 총연출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하다못해 교육생들의 야간 간식 빵이 차질 없이 준비되는지, 주변 빵집에 체크하는 일까지 챙겼으니 새벽 기상부터 한밤중 취침까지 그야말로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인화원을 거쳐 간 계열사 인사 담당자들이 김 대리의 열정과 태도, 적극성, 능력을 그냥 흘려 봤을 리가 없다. 유통, 홈쇼핑, 텔레콤 등 4곳 계열사로부터 ‘러브 콜’을 받았다. 일중독으로 건강을 해치는 상태까지 간 김 대리는 그 중 LG텔레콤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이 회사에서 그가 새로 맡은 일은 비즈니스 인큐베이팅 센터 사업부. 새 사업 아이템을 발굴해 사업궤도에 올려놓는 일이었다. 새로운 도전에 의욕이 솟았지만 그는 이내 좌절감에 부딪쳤다. 외부 인재 스카우트와 내부 인원 감원이 맞물리면서 사내 경쟁은 날로 치열해졌다. ‘일만 열심히, 잘하면 된다’는 ‘돌쇠 전략’으로 회사생활을 해 왔던 그로선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2002년 11월 서른일곱에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주변에서는 대안이 뭐냐며 걱정스러워했지만 저는 무대책이 대책이라고 답했죠. 뭔가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대안이 없는 게 오히려 대안을 찾는 데 가장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무작정 회사에 사표를 던진 그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대학시절 ‘영어 수학’으로 팀을 이뤄 과외 아르바이트 무대를 누볐던 단짝이었다. 대치동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그 친구는 이렇게 조언했다. “학원계에는 아직 비즈니스 마인드를 겸비한 학원장이 드물어. 너라면 3년 정도면 기반을 잡을 거야.” 친구의 격려와 권유에 힘입어 그는 학원을 ‘퇴직 후 창업 아이템’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창업에 앞서 취직부터 했다. 샐러리맨에서 학원운영으로 건너가기 위한 완충지대이자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학원에 취직은 했는데, 다니던 회사에서는 사표가 수리되지 않았다. 인사 결재 라인에 있는 임원이 장기 출장 중이었기 때문이다. 결재는 나지 않고, 강사 취직은 됐고. 그는 하는 수 없이 낮에는 LG텔레콤, 밤에는 대치동 학원 강사의 이중 생활을 한 달 이상 지속했다. “수학에는 자신 있었다지만 10년 가까이 수학책을 덮고 살았더니 깜깜하더군요. 근의 공식도 기억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수학 실력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낮에는 회사에 근무하고 저녁 6시에서 12시까지 강의를 했다. 새벽 1시에 집에 돌아오면 다음날 강의를 예습한 뒤 6시나 돼야 잠자리에 들었다. 2시간 남짓 잠자는 생활을 한 달 넘게 계속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그런 열성에 힘입어 수강생 수는 하루가 다르게 불어갔다. 그의 명성도 함께 퍼졌다. 그가 강사로 변신해 첫 강의를 했던 2002년 10월14일. 그의 수강생은 초등학교 6학년생 5명이었다. 그로부터 1년 반 뒤, 김 원장이 학원을 오픈하자 그를 따라 힘수학에 등록한 초·중등생만도 300여 명이었다. “제가 여느 강사들과 달랐던 점은 ‘강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강사 변신 직후 저는, 직장시절 익힌 대로 ‘고객이 누군가’부터 생각했습니다. 모든 해결책은 고객에서 나오니까요. 10년여 대기업 생활에서 얻은 최고의 자산은 ‘고객중심의 사고’입니다. 그것을 학원 강의에도 접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학원 강사의 고객은 ‘학생과 부모’라고 정의한 그는 ‘학생을 위한 강의력, 학생과 부모를 위한 학습관리, 부모를 위한 진학상담’ 등 3대 서비스 패키지가 완성돼야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학원강사 경력 없는 후발 주자’라는 핸디캡은 오히려 ‘시장을 새롭게 보는 눈’이라는 차별화 포인트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 덕에 고객(수강생)의 눈길을 끌었고, 양적인 성장을 이뤘다. 수강생 숫자가 늘면서 성적도 올라가고, 특목고 합격생이 속출하자 수강생이 더욱 몰리는 폭발적인 선순환이 나타났다. 그는 얼마 전 힘수학 연구소를 만들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쌓은 수학 강의 노하우를 더 나은 콘텐츠로 엮어내는 작업을 시스템화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두 직영으로 운영하지만 필요한 지역에는 ‘힘수학’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일 계획도 갖고 있다. 10년 안에 태아에서 직장인 재교육, 실버 교육까지 아우르는 교육 그룹으로 키워보겠다는 마스터 플랜도 머릿속에 짜 넣었다. 샐러리맨으로서는 느끼기 힘든 ‘성취’를 맛보면서 꿈도 키울 수 있었다.“노력과 실력만큼 결과에 반영된다는 점에서 기울기 가파른 일차 함수 그래프”라는 점이 사업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김 원장. 역설적이지만, 기울기에 상관없이 맨몸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일에 매진했던 그의 직장 생활이 ‘퇴직 후 경쟁력’을 높인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