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클 신화’일구어 낸 래리 엘리슨

계적 소프트웨어 업체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회장(62)은 ‘튀는’ 부자다. 미국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해 은행에서 돈을 끌어 쓰다 빚더미에 올라앉기도 한 해프닝의 주인공이다. 그 와중에도 호화 요트 구입, 스포츠 구단 인수 등을 노리다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다. 잦은 이혼과 결혼으로 ‘플레이보이’ 소리를 듣기도 한다. 다른 회사의 ‘뒷조사’를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해 쓰레기통을 뒤지는가 하면 막대한 기부금을 내걸고 미국 최고의 명문대를 경쟁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앉는다. 현지 언론들은 이런 그에게 ‘실리콘밸리의 악동’ ‘실리콘밸리의 사무라이’와 같은 별명을 붙여줬다.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엘리슨의 총 재산은 작년 9월 기준으로 약 170억달러(약 17조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510억달러),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400억달러), 폴 앨런 MS 공동 창업자(225억달러), 마이클 델 델컴퓨터 회장(180억달러)에 이어 미국에서 5번째 부자다.그는 또 MS의 2인자 스티브 발머 최고경영자(CEO), 마이클 델 회장, 블룸버그통신을 만든 블룸버그 뉴욕시장과 함께 미국 경제계를 주름잡는 가장 성공한 유대계 사업가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다른 거부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수성가형’이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엘리슨은 194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19세의 미혼모였다. 어머니는 그를 생후 9개월 때 시카고의 먼 친척에게 입양했다. 양아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권위적인 양아버지 밑에서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양어머니가 죽자 일리노이대학을 중퇴하고 무작정 캘리포니아로 갔다. 70년대 중반 한 데이터베이스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그곳에서 오라클의 창업 동반자인 에드 오츠와 로버트 마이너를 만난다.1977년 엘리슨은 이들과 함께 단돈 1200달러로 오라클의 전신인 ‘시스템개발연구소(SDL)’를 창업했다가 곧바로 회사 이름을 ‘관계형 소프트웨어(RSI)’로 바꾼다. 이때 참여했던 미국 국방부 발주 프로젝트의 이름이 신의 계시란 뜻의 ‘오라클(Oracle)’. 83년에는 프로젝트 이름을 따 회사 이름을 아예 오라클로 변경했다. 신의 계시를 잘 따라서였을까. 이후 오라클은 승승장구, MS에 버금가는 정보기술(IT) 업계의 강자로 성장했다.그는 ‘고정관념을 깨는 젊은 마인드’를 중시해 회사 내 직급을 파괴하고 마케팅을 중시하는 경영 전략을 폈다. ‘품질이 좋다고 제품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제품이 잘 팔린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처럼 발 빠른 시장 대처 능력은 당시 신생 기업이던 오라클이 IBM 등 굴지의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꼽힌다.그는 ‘오라클 신화’의 주인공으로 1990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선정하는 ‘올해의 최고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연봉도 천문학적 수준으로 뛰었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천에 따르면 엘리슨은 지난 2001년 한 해에만 7억600만달러의 연봉을 챙겨 지금까지 미국 CEO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은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한창 기반을 다져가던 1990년대 중반 엘리슨은 사설탐정을 고용해 친어머니를 찾아냈고 배 다른 여동생의 학비를 대주면서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주목을 끌었다.엘리슨은 ‘강한 CEO론’의 신봉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많은 CEO들이 강한 영주에 둘러싸인 약한 왕의 전철을 밟고 있다”며 “CEO가 임원들에게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CEO론.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그의 생각도 바뀐 듯하다. 엘리슨 회장은 지난해 주 80시간에 달하던 근무시간을 40~50시간으로 줄이고 대신 업무의 상당 부분을 공동사장들에게 위임했다. “과로야말로 미친 짓이라고 판단했다”는 말과 함께. 경영 성과나 능력과는 별개로 엘리슨은 독특한 언행과 사치스러운 사생활로 언론의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많았다. 우선 그는 ‘여성 편력’이 심한 편이다. 그는 지난 2003년 크리스마스 직전, 25세 연하의 로맨스 작가 멜라니 크래프트와 네 번째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그는 또 요트광이기도 하다. 미국과 호주에서 열리는 세계 요트대회에 꼬박꼬박 참가한다. 자신의 회사 이름을 딴 오라클이라는 요트에 8000만달러나 되는 거금을 투입해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문제는 이 같은 라이프스타일 탓에 그가 종종 빚에 쪼들린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엘리슨이 지난 2000년 중반 10억달러에 달하는 빚을 진 적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엘리슨의 재정자문을 맡았던 필립 사이먼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엘리슨은 당시 5개 은행으로부터 10억달러를 빌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신용한도는 3억2800만달러였다.상황이 이런데도 엘리슨은 새 요트 구입에 1억9400만달러, 아메리카컵 요트 경주팀에 8000만달러, 품위 있는 생활 유지에 매년 2000만달러 등 향후 3년간 7억달러 이상을 더 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급기야 사이먼은 2002년 엘리슨의 씀씀이를 걱정하는 e메일을 보냈다. “매우 걱정스럽다. 예산을 잡아 계획을 세워야 할 때다. 오라클 주식 30억달러를 매각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엘리슨은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이 같은 사실은 2001년 초 엘리슨이 오라클 주식을 대거 처분하는 과정에서 ‘내부자 정보를 이용했다’며 주주들이 제기한 소송 관련 문건이 공개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와 관련, 엘리슨 회장이 호화 요트를 타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은 물론 자선단체 기부, 개인적 투자 등에 필요한 자금을 대부분 빚에 의존하는 성향이 드러났다고 꼬집었다.엘리슨은 주주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이미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작년 11월 주주들에게 소송을 취소하는 대가로 1억2200만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한 것. 소송은 2001년 오라클의 일부 주주가 “엘리슨 회장과 오라클 임원이 실적 악화 사실을 미리 알고 주식을 매각했다”며 캘리포니아 법원에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슨은 처음에 잘못을 부인하면서 자선기금으로 1억달러를 기부하는 선에서 봉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법원은 소송을 제기한 주주들의 변호사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걸었다. 결국 엘리슨은 1억달러의 자선기금과 주주들의 변호사 비용 2200만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해야 했다.스포츠 구단을 인수하려다 ‘퇴짜’를 맞은 적도 있다. 엘리슨은 지난 2004년 9월 열린 정기주총에서 주주들에게 “오라클 본사와 내 집이 있는 북캘리포니아에 소재한 스포츠팀을 인수하려 했지만 팔겠다는 곳이 없어 실패했다”고 털어놨다. 엘리슨은 구체적으로 북아메리카 프로미식축구리그(NFL)의 ‘포티 나이너스(49ers)’와 오클랜드에 있는 농구팀인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사려 했다고 말했다.엘리슨은 프로팀 인수에 실패하자 대신 창단 쪽으로 관심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스포츠 업계에선 NFL이 2008년까지 로스앤젤레스를 연고지로 한 프로팀 창설을 원하고 있으며 엘리슨이 여기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아직까지 엘리슨이 프로팀을 인수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엘리슨의 ‘튀는’ 행동은 기부금을 내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2001년 6월 “첨단기술이 정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소 설립에 1억5000만달러를 내겠다”며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중 더 나은 계획안을 제출하는 쪽에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하버드와 스탠퍼드는 각각 미국 동부와 서부를 대표하는 명문 중의 명문. 이런 두 대학을 사이에 두고 기부금을 어디에 낼지 공개적으로 저울질하는 모습이 엘리슨답다고나 할까. 두 학교는 기부금 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언론들은 이 사실을 흥미진진하게 다뤘음은 물론이다.엘리슨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0~2001년 MS가 반독점 소송에 휘말렸을 때의 일이다. 일부 시민단체 등이 MS를 편들자 엘리슨은 이들 단체가 MS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 쓰레기통까지 뒤지게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그에게는 ‘실리콘밸리의 사무라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사무라이’라는 별명은 그의 일본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가 보이는 곳에 지어진 그의 저택은 5000개의 조명시설과 일본식 정원, 가구들로 유명하다. 이 저택은 건설비만 1억달러가 들었으며 엘리슨은 사후 이 저택을 스탠퍼드대에 기증하겠다고 유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아끼는 요트의 이름도 ‘사쿠라(벚꽃)’다.언론이나 대중 앞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말투로 ‘독설가’라는 수식어도 그의 곁을 따라다닌다. 엘리슨은 9·11 사태 이후에는 미국 내 신분증 발급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겠다고 나서 사생활 보호를 위한 시민단체로부터 ‘최악의 기업인’에 뽑히기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래리 엘리슨 회장. 그의 사생활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고 어떻게 보면 거부들의 ‘과시적 소비’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세계 IT 업계를 이끄는 거인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