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세훈 히지노 사장의 인생이모작

로운 현상에 무작정 몰리는 게 뉴 트렌드다. 그 동력은 ‘군중심리’다. 그 덕에 수많은 트렌드가 생겨나고, 그 물줄기를 따라 새로운 사업 기회도 만발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단명한다.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되는 물줄기는 드물다. 그래서 군중심리는 잘 올라타면 대박의 ‘황금마차’지만 섣불리 휩쓸렸다간 쪽박 차는 함정이 된다. 레스터 서로 미 MIT대 교수가 신작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에서 “군중심리는 자본주의의 성공 동력이자 동시에 실패 원인”이라고 쓴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투자건 사업이건, 대중을 대상으로 돈을 버는 일에 성공한 사람들에겐 군중심리를 ‘이중인격’으로 다루는 능력이 있다. 군중심리의 효과와 한계를 동시에 알고 있다는 소리다. 트렌드를 사업의 기회로 십분 활용하면서도 트렌드의 희생자가 되는 덫에는 걸리지 않는다. 히지노의 도세훈 사장(41)도 그런 사람이다. 히지노는 ‘빠진’ ‘용용방’ ‘팔진면가’ ‘피쉬’ 등 4개의 퓨전 요리 브랜드의 직영 및 프랜차이즈, 식당 컨설팅 사업을 벌이는 외식업체다. 트렌드 중에서도 퓨전 요리는 특히나 뜬구름 같다. 단순무식한 표현으로 하자면 정체불명의 ‘짬뽕 요리’이기 때문이다. 한국 요리에 싫증나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전 세계를 한바퀴 돌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섞어보자’로 접근한 음식 마케팅 기획의 최종편인 셈이다. 하지만 지난 3~4년 간 선풍적 유행을 주도했던 수많은 퓨전 요리들은 대중들의 ‘짧은 입’에 봉사한 뒤 결국은 ‘흘러간 트렌드’로 사라졌다. ‘퓨전이 뜬다’는 말에 식당을 차렸다가 손해만 본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와중에서도 도 사장의 퓨전 레스토랑들은 7년째 순항하며 ‘확장’을 이어가는 몇 안 되는 성공사례다. 비결이 뭘까. “퓨전은 그냥 짬뽕이 아닙니다. 17세기 이전의 김치는 다 고춧가루 없는 김치였어요. 17세기에 고춧가루가 국내에 전래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죠. 간판 ‘전통요리’인 김치도 17세기엔 퓨전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퓨전이란 새롭게 창조해서 그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시키는 겁니다. 이것저것 섞어 새로워 보이게 만들면 말초감각을 자극해 단기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이내 사그라지죠. 그건 진짜 퓨전이 아니예요.” ‘새로운 걸 원하는’ 대중들의 심리에 올라탔다는 점에서 ‘퓨전’은 뉴 비즈니스의 황금마차였다. 하지만 ‘현상’에만 어설프게 편승했던 식당들은 망했다. 도 사장은 대중 심리의 트렌드를 포착하되 현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가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1999년 차린 첫 퓨전 중식당 ‘빠진’의 주방 진용은 그런 면모를 대변한다. 그는 메인 주방장으로 나이 지긋하고 경험이 풍부한 중국인 요리사를 앉혔다. 부주방장으로 비교적 젊은 프랑스, 이탈리아 요리 전문가가 한 팀을 이뤘다. 주방장은 정통 중국요리만 가르쳤다. 정통 중국 요리에서 활용하는 각각의 식재료 고유의 맛과 영양, 그 활용법을 전수한 것이다. 부주방장들은 정통 중국요리의 기본기를 정식으로 배워 자신의 주 특기인 서양 요리와 접목하는 ‘응용법’에 몰두했다. 같은 식재료라도 중식과 이탈리아식에서 다루는 방법은 다르다. 그 두 가지를 결합해 새로운 방식을 창조한 것이다. 퓨전의 겉모양을 따오는 게 아니라 기본기가 탄탄한 정통들끼리 부딪쳐 응용이 아닌 또 다른 ‘발명’이 이뤄지도록 설계한 셈이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메뉴를 개발한다. 소스를 바꿔보고, 재료를 변조해 가면서 고객들의 반응을 체크한다. 메뉴 리뉴얼(새단장) 작업은 쉼없이 일어난다. 그 작업의 대부분은 청담동 ‘빠진’에서 이뤄진다. 1999년 초반, 36세의 나이로 빠진을 차릴 당시,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과 집을 잡혀서 얻은 융자금, 그리고 외부 투자 등 총 3억5000만원을 들고 고깃집 2~3곳을 차릴 수도 있었다. 그 경우 당장 돈벌이는 괜찮을 것이다. 업종이 단순하고 쉽게 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처럼 키워 길게 갈 만한 실력을 쌓기는 힘들었다. 2010년 매출 1000억원, 2015년 상장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레스토랑 체인 및 프랜차이즈, 컨설팅 사업을 염두에 뒀던 그에게는 캐시카우와 함께 ‘시장 트렌드를 감지하는 안테나 숍’ 역할까지 함께 해 줄 레스토랑이 필요했다. 도 사장은 단기적으로 더 쉽게,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는 고깃집을 포기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아줄 중식 퓨전 레스토랑 ‘빠진’을 선택했다. 그리고 첨단 유행의 선착장, 청담동에 닻을 올렸다. 도 사장은 청담동 레스토랑가에 해외 MBA 출신이 터를 잡은 거의 첫 세대다. 지금은 청담동에서 유학파 레스토랑 사장을 찾기가 어렵지 않지만 1999년만 해도 ‘MBA 출신이 식당을 차렸다’는 건 그 자체가 작은 화제였다. 그는 외국어대 졸업 후 미국 롱아일랜드대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마케팅과 재무. 그는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학부생들과 어울렸다. ‘뉴욕 컬처 클럽’에 가입해 매 주말 맨해튼의 맛집, 멋집을 찾아다니며 문화를 체험하는 클럽이었다. 주로 다른 주(州)에서 뉴욕으로 유학 온 미국 학생들을 위한 뉴욕문화 탐험 클럽이었다. 20여명으로 구성된 그 클럽에서 순수 동양인은 도 사장 혼자였다. 그 시절 뉴욕 문화 체험이 몸속에 녹아 지금 레스토랑 사업을 하는데 미묘한 외부 환경을 감지하는 첨단 온도계 역할을 해 주는 셈이다. 방학이면 취미반으로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이때 그가 익힌 ‘문화와 영어’라는 두 가지 무기는 지금도 그의 자산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그가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디딘 직장은 ‘유로통상’. 버버리 등 명품을 수입하던 회사였다. 거기서 도 사장은 영업과 마케팅을 담당했다. 그는 ‘영업’의 경험이야말로 ‘비즈니스 IQ’를 키우기 위해 꼭 거쳐야 할 필수 커리어라고 강조했다. 영업을 하면 맨주먹 정신(헝그리 정신)을 배우기 때문이다. 특히 사업별로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던 시스템이 도 사장의 비즈니스 감각을 키우는데 좋은 인큐베이터가 돼 줬다. 그는 “영업에 대해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갖고 실적을 올리는 경험이 마치 사장처럼 일하는 체험을 하게 했고, 그 경험이 창업 이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환경을 경험했다고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끝없이 도전하고 시도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작은 실수를 많이 해 보면, 그만큼 현명해진다. 현재 그는 빠진 외에도 용용방(4곳), 피쉬(3곳), 팔진면가(2곳)등 총 10곳의 중식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직원은 총 70여 명. 이 가운데, 용용방, 피쉬, 팔진면가는 2~4년 간 직영점을 운영하면서 노하우를 매뉴얼화해 드디어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일 채비를 갖췄다. 지난 7년 간의 노하우를 지식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레스토랑 컨설팅 사업도 진행 중이다. 유행 사이클이 짧은 퓨전 요리로 그가 7년이나 확장 일로를 달릴 수 있는 이유는 새 트렌드의 현상을 포착하되, 깊게 파내는 ‘저력’을 갖춘 덕분이다. 유행에 민감하되, 기본기를 쌓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세에서 나온 힘이다. 그가 서비스가 생명인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뜻밖에 ‘독서’다. 필독을 권하는 책도 단편적 케이스 스터디가 나열된 마케팅 서적이 아니다. 신입 직원에게 그가 빼놓지 않고 권하는 책은 ‘구별짓기’. 대중들의 문화적 취향을 결정하는 요인들을 분석한 두껍고 딱딱한 본격 사회과학서적이다. “고객들의 취향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문화 자본과 돈의 함수에 있습니다. 예컨대 문화 자본이 있고 돈도 있는 사람은 클래식을 추구합니다. 문화 자본은 있는데 돈이 없는 사람은 이국적 취향을 즐기죠. 돈은 있는데 문화 자본이 없는 경우 그냥 맛만 추구합니다. 문화 자본도 돈도 없는 사람이요? 당연히 양 많고 담백한 것이죠.” 그는 사회적 위치에 따라 맛과 문화가 다르다고 강조한다. “음식은 30%의 맛과 70%의 분위기로 결정됩니다. 대화, 함께 식사하는 상대, 문화적 이해 등이 바로 분위기에 해당되죠.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10곳의 음식점이 문을 열면 그 중 9개가 망한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1개는 사실상 마지막 손길(final touch)이 좌우합니다. 예를 들어, 씹는 맛이라든가, 부드러운 느낌. 이런 취향이 바로 문화이며, 문화는 사회적인 산물이죠.”‘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듭니다’라는 카피처럼, 초경쟁 시대에는 마지막 손길에 성패가 갈리기도 한다. 그가 직원들에게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도록 시키는 이유도 ‘사람에 대한 연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객의 취향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인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업을 하는 데 시장을 읽는 눈이 필수고, 시장을 읽는 데는 ‘인문 공부’가 최고의 기초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도 사장은 한국에서 만든 퓨전 중식 레스토랑을 앞세워 중국에 진출한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중국에서도 소득 수준 향상과 세계화 여파로 ‘퓨전’의 트렌드가 상륙할 것이고 그것은 정통 중국 요리와는 다른 새 시장을 열어줄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 자신감 뒤에는 한편으로 트렌드를 포착하면서 그 밑에 기본기를 든든히 하는 ‘최적의 퓨전 기술’이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