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사랑하는 부자치고 존경받지 않는 부자는 없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부자 중의 한 사람인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주급 2달러50센트를 받는 전보 배달부가 되었을 때 앤더슨 대령의 무료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말했다. 훗날 그가 성공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앤더슨 대령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또한 첫 해외 기증 사업도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던펌린에‘카네기 도서관’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에 2509개의 공공도서관을 <건립해> 사회에 기부했다.이인표 (주)에스콰이아 회장도 문화재단을 만들어 한국에 14개, 해외에 8개 등 22개의‘인표어린이도서관’을 설립해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 줬고‘한국사회과학도서관’을 설립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부자의 모습이라 하겠다.100년 전쯤인 1910년, 경상도 땅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仁興이라고도 함) 남평 문씨의 광거당에서도 만권당(萬卷堂)을 열었다. 2004년 7월10일 토요일 오후, 주역을 배우는 문우와 함께 이곳을 방문했을 때 문희응(文熙膺,일명 태갑:전 서울신문 사장, 문희갑 전 대구시장과는 4촌간) 선생은 75세의 나이를 잊은 듯 정정한 목소리로 이 집안의 내력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고려말 충신이었던 문익점(文益漸)의 20세손인 문봉성(文鳳成)이 큰 부를 이뤄(3000석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는 세평이 있다) 세 아들로 하여금 학문을 닦게 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했으며, 그의 둘째 아들인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1880~1931)이 만권당을 열었다. 이것은 재력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재실을 짓고 정자를 마련하는 것과는 달리 서책에 대한 높은 안목과 식견이 따라야 하며 학문에 대한 자세와 명확한 목적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권당이 열리자 귀중한 문헌을 참고하기 위해 경향의 선비들이 모여들어 이 집안은 학자들의 집합소이자 문화의 산실로 이름을 드높였다. 특히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는 가까운 사이였으며, 중국 상하이에 있으면서 중국 서책을 들여오는 데 도움을 준 사학자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과도 두터운 교류가 있었고, 우남 이승만과 유석 조병옥도 이 만권당을 찾았다고 한다.책이 귀하던 시절, 사설 도서관이었던 이 집을 드나들던 학자들은 귀한 책을 볼 수 있는 기쁨에 자진해서‘참으로 인의를 행한 만권당 주인’이라는 송덕비를 세웠지만 병석에 있던 수봉이 알고 즉시 철거케 하여 지금도 그 비석은 광거당 누마루 밑에 그냥 누워 있다고 한다.수봉 문영박은 학문으로도 이름이 높았지만 그가 죽은 후 상하이임시정부로부터‘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란 존칭을 쓴 조문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임시정부에도 남모르게 기여한 것이 입증돼 1980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 조문은 당시 임시정부가 밀파한 이교재란 사람이 간직해 들여왔다가 일경에 체포돼 순국하고, 광복 후 그의 자손들이 집수리를 하는 과정에서 방 천장에 숨겨두었던 조문 자료가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건축비만도 당시 논 100마지기(2만평) 분이 들었다고 하는 아름다운 수봉정사(일명 수백당). 무더운 여름날, 위창 오세창이 전서로 쓴‘수봉정사(壽峯精舍)’란 현판이 걸린 마루에 앉아 시원한 수박 한 쪽으로 더위를 식힌 뒤 인수문고로 들어갔다. 그 전에 광거당과 수봉정사에 수장하고 있던 1만여 권의 서적(1095종 6948책)을 합쳐 보관하기 위해 1970년에 지은 문중서고다.인수문고의 서책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것도 다소 있지만 1910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모아진 것이라고 한다. 그때 중국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사학자 창강의 추천으로 목포까지 배편으로 책이 보내졌고 다시 수레에 실려 육로로 이곳까지 옮겨 왔으니 얼마나 귀한 책인가. 100년이 넘은 책들은 아직도 깨끗하게 보존돼 있었다. 고급 책답게 오동나무 통에 넣어 책 외피로 정성스럽게 싸서 보존된 완질본들은 지금도 소중한 자료다. 통풍과 온도 및 습도를 적절히 고려해 지은 서고에서 조심스럽게 설명하는 주인은 1만권의 서적을 보존하기 위한 독특한 이 집만의‘서적 수호규약’을 들려줬다. 이 규약은 7가지인데 그중에서도‘서책을 참고하고 열람할 때는 반드시 정사에서 하고 다른 곳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하도록’하고,‘매년 7월7일에 정기적으로 햇볕을 쪼이도록 한다’는 것으로 보아 책을 얼마나 아끼는 지를 짐작케 한다.문씨 일가가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것은 1840년 전후에 인산재 문경호(1812~1874)가 선대로부터 200석 정도를 분재(分財)로 받아 폐사가 된 인흥사 절터를 집터로 바꾸어 개기(開基)했다고 한다. 그후 아들 문달규를 이어 손자 후은 문봉성 대에 이르러 살림이 크게 늘었고, 특히 문봉성은 경영능력이 탁월해 1910년 대에 거부의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그의 아들 문영박이 만권당을 열기에 이르렀다. 문태갑은 1993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20세기에 간행된 한국학 중심의 책’약 5000권을 보관하기 위해 인수문고 경내에 따로 중곡서고(中谷은 문태갑의 호)를 지었다. 조상의 훌륭한 덕을 이어받은 중곡은 일찍부터 한국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와 경제 등에 관한 책을 수집하기 위해 인사동 고서점과 학술회의 등에도 알뜰히 찾아다녔다고 한다.“비록 크게 내어 놓을만한 것은 못되나 20세기의 관계서적을 다소나마 더했으니 앞으로 누가 21세기의 새로운 책을 첨가한다면 인수문고는 더욱 값진 문고가 될 것이고 또한 사회적으로도 훌륭한 도서관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 바람이기도 하다.”저녁 무렵, 가까운 음식점에서 닭볶음탕을 시켜놓고 소주 한 잔을 주고받은 문태갑 선생은 한번 고향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과 외국 등을 떠돌아 살면서도 만권당이 있는 인흥의 이 고향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다양한 사회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과 이리 저리 얽혀 있어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을 버리고 마음의 고향인 집으로 돌아오는 데에도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앞으로 자식 대에 이르면 고향을 지키기가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이다.그는 또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인터넷 속을 떠돌며 책만이 가질 수 있는 오묘한 진리의 핵심을 간과하는 젊은이들을 걱정했다. 뭐니 뭐니 해도 진리의 보금자리는‘책’이다. 인터넷 매체의 기능이 엄청나게 강화되긴 했어도 인류의 경험이 농축돼 저장된 곳은 바로 아날로그의 도서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사랑한 부자, 만권당 주인은 책을 남겨 후손에게 큰 교훈을 주었고, 자연스럽게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보람 있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고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가훈을 묻자 집안 내력을 손수 소상히 기록해 비매품으로 2003년 발간한 ‘인흥록(仁興錄)’을 한 권 주며 이렇게 말한다.“사람이 귀하게 되는 것은 진실로 그 벼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성(人性)에 있는 것이며, 효와 우애도 잘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행(實行)에 그 참뜻이 있다.”평생에 2500백 개 이상의 도서관을 만들어 기증한 앤드루 카네기는“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많은 재물을 남기고 죽는 부자보다는 후손들에게 지식의 보고인 책을 사랑하고 가치의 보금자리인 도서관을 만들어 주고 떠나는 부자는 참으로 지혜롭고 훌륭한 부자라 할 것이다. 겸양의 표상으로 인흥마을 광거당 누마루 밑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만권당 주인 수봉 문영박의 송덕비를 다시 일으켜 세워봄직도 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