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정희의 미학세계

도기로 각을 그리면 꼭지점 부분에서 각이 퍼져나갈수록 호가 점점 커진다. 미술의 영역도 이처럼 점차 확장돼 가는 양상을 보인다. 원시인들이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고, 나무를 깎아 오브제를 만들던 것에서 비롯해 현재, 미술이 아우르는 분야는 회화와 조각만으로는 설명이 안될 만큼 다양하다. 표현방법, 매체 등을 달리해서 작가들은 생각지도 못한 작품을 내보인다. 마치 “이렇게도 회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경쟁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정희 작가 또한 새로운 스타일의 현대 미술을 보여준다. ‘회화는 그리는 것이다’라는 고정 관념을 깨뜨린 그녀는 한 땀 한 땀 바느질 뜨기로 라인을 형성하는 드로잉을 ‘만들고’ 있다.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종이에 스케치를 한 다음 선으로 분할된 면을 조각조각 오린다(옷을 만들 때 본을 뜨듯 작품의 본을 뜨는 것이다). 천에 각각의 본을 대고 그린 다음 재단한다. 홈질(running stitch)로 본을 이어 붙여서 본래 스케치한 형태로 만든 다음 홈질한 자리를 미싱으로 다시 한 번 박아준다. 마지막으로 나무틀에 바느질한 작품을 씌워서 팽팽하게 잡아당겨 고정하면 완성된다. “본격적으로 바느질 작업을 하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쯤부터예요. 이전에는 회화 작업을 하면서 가끔 바느질을 부분적으로 이용하는 정도였죠. 그러다가 바느질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 계기는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 천을 틀에 씌우지 않은 채로 작업을 하면서였던 것 같아요. 틀에서 벗겨져 느슨하게 늘어져 있는 캔버스 천을 보니까 평면이 아니라 입체로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에는 캔버스 천을 가위로 잘라 조각내 그것을 바느질해서 입체감을 가진 정물을 만들었어요.” 이정희가 미술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그녀 나이 28세 때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계속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고. 취미로라도 하고 싶어 회사를 다니면서 짬짬이 배웠는데, 아무래도 미련이 남더란다. 더 늦기 전에 좋아하는 일을 제대로 하려고 늦깎이로 미대에 진학했다. 그녀가 바느질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대학교 4학년 때,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우연히 보고나서다. 인상파 화가들이 점묘법으로 색의 명암을 표현하듯 그녀는 세필(細筆)로 반짝이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가느다란 붓 터치가 마치 수를 놓은 듯한 느낌이 연상되면서 캔버스에 직접 바느질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 초상화를 그리고 그 주변의 테두리는 바느질로 둘러 액자 모양을 만드는 식으로 회화와 바느질을 병행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바느질 작업이 늘어가다가 요즘과 같은 작업을 하게 됐다. “결과물만 놓고 봤을 때는 단순한데 과정은 지난합니다. 세필 작업도 그랬거든요. 붓이 워낙 작고 가늘어서 면을 채우려면 붓질을 얼마나 많이 해야 하는데요. 둘 다 가만히 앉아서 천천히 작업을 하는 저한테 맞는 스타일이죠.” 그녀의 작업실 한쪽 선반에는 여러 종류의 원단이 쌓여있다. 처음에는 노르끄레한 광목천에 작업을 하던 것에서 나아가 아무런 문양이 없는 빨강, 파랑 등의 원색 천으로, 최근에는 다소 화려한 문양이 프린트된 천을 써서 화면에 포인트를 주고 있다. 그녀는 바느질 작업을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질감을 가진 천에 매혹됐다고 한다. 각각 다른 색과 다른 질감의 천으로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천은 눈의 시각적인 감각을 자극하지만, 손으로 만졌을 때 손끝으로 느껴지는 질감은 눈으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어떤 것을 손에 전해준다. 말하자면 시각적인 촉각성의 표현이 가능한 재료라고나 할까. 질감이 다른 천을 다양하게 사용해서 촉감적인 요소가 많이 두드러지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이정희씨.“옷감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집어내서 펼치고, 잡아당기고, 가위로 자르고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천을 갖고 작업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무엇보다도 천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하는 것이 그래요. 말하자면 천은 내 손과 무수한 대화를 나눈 후에 캔버스 틀에 씌워지는 것이죠. 제 작품은 시각적인 부분도 있지만 실제로 만져보았을 때 느껴지는 차이가 있답니다. 누군가 제 작업을 보고 손으로 한 번 만져보고 싶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의도한 것이 바로 그거예요. 시각적인 자극을 받았을 때 기억과 실제 피부나 손으로 느꼈을 때 기억은 다르거든요. 작품마다 광목, 면 스웨이드 등 다른 질감의 원단을 사용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죠.”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거리를 두고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람객의 손 또는 피부와 접촉하기를 바란다. 고이 보관해두고 그저 바라보는 것, 이런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전시할 때에도 작품에 액자를 하지 않은 채 걸어둔다. 화면을 손으로 살짝 매만지면서 천의 질감을 느껴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물론 액자를 하지 않으면 먼지가 앉고 더 쉽게 지저분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시각과 촉각이 공존하는 작품을 제시하면서 촉각적인 접근을 막아버린다면 작품을 절반밖에 이해할 수 없지 않겠는가. 새장 안에서 지저귀는 새를 보듯 그저 바라보는 작품보다는 한 침대에서 뒹굴면서 같이 생활할 수 있는 강아지와 같은 작품으로 다가가고 싶어서다. 비록 무생물이지만 서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이정희. 요즘 들어 점차 천을 선택하는 폭이 넓어진다고 한다. 그 만큼 표현하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