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세계 최고의 최고경영자(CEO)를 꼽으라면 단연 미국 애플컴퓨터의 스티브 잡스(51)가 선정될 것이다. 잡스는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 아이포드(iPOD)의 신작 시리즈인 아이포드 셔플과 나노, 비디오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전 세계 디지털족을 열광시켰다. 덕분에 애플 주가는 작년 한 해 동안 121%나 상승, 미국 증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주가상승률을 기록했다.잡스 자신도 작년 보스턴컨설팅그룹이 꼽은 ‘가장 창의성 있는 경영자’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발표한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부호 25인’에선 빌 게이츠에 이어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잡스의 재산 규모는 다른 부호들에 비하면 10분의 1에 불과한 수준. 하지만 아이포드로 많은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바꿔놓은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잡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다시 한 번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잡스는 이전까지 ‘이단아’ ‘몽상가’ ‘독선과 아집의 화신’ 등 부정적인 이미지와 ‘창조적 예견자’ 등의 칭송이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는 얘기다. 그만큼 인생역정도 한편의 영화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잡스는 195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났다.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어린 시절 잡스는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이였다. 전기 소켓에 머리핀을 집어넣어 화상을 입은 것은 오히려 예사로운 일이었다. 열 살 때부터 그는 특별히 전자 장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이런 어린 시절 경험이 1977년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PC)인 애플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는 IBM으로 대표되는 대형 컴퓨터만 있던 시절. PC라는 개념을 머리에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 잡스는 이미 나이 스물다섯에 억만장자(billionaire)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1984년에는 미래형 디자인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였다. 지금처럼 아이콘을 클릭해서 프로그램을 여는 그래픽사용자환경(GUI)을 적용하면서 PC에 또 한 번의 혁신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는 애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돈보다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기술에 대한 욕심 때문에 회사 내에서 ‘분열주의자’란 낙인이 찍히면서 물러나야 했다.잡스는 작년 6월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당시의 어려웠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서른 살의 나이에 내가 세운 회사에서 해고당했습니다. 인생의 초점을 잃어버렸고 몇 개월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뜻에서) 내 인생 최고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자유를 만끽하며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습니다.”그는 바로 넥스트(NeXT)란 회사를 창업해 다시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넥스트스텝’이란 독특한 운영체제(OS)에다 플로피 디스크가 아닌 광자기 드라이브(MOD)를 장착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MOD가 탑재된 PC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엄청나게 비싼 가격 때문에 제대로 팔리지는 않았다.그는 한편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아닌 콘텐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영화와 컴퓨터를 동시에 활용한 3차원 애니메이션이 그를 매혹시켰던 것이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 감독으로 유명한 조지 루카스로부터 필름애니메이션 회사를 사들여 픽사(Pixar)란 회사를 차렸다. 곧이어 애니메이션에 디지털의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에 들어갔다. 첫 작품인 ‘토이스토리(1995)’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반전시켜 놓았다. 토이스토리는 컴퓨터만 이용해 만든 첫 3차원 애니메이션 작품. 컴퓨터만으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발상이 어렵던 시절에 나온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토이스토리는 그해 최고 흥행작이 되었고 세계 전역에서 3억50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비디오 판권료도 1억달러 이상 추가로 들어왔다. 이후 ‘몬스터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 ‘인크레더블(2005)’ 등으로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한편 잡스가 떠난 애플은 경영난이 심화돼 갔다. 잡스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을까. 기술보다는 경영과 관리에 치중한 탓에 애플 특유의 경쟁력이 고갈돼 가고 있었던 것. 결국 애플은 잡스가 개발한 운영체제 ‘넥스트스텝’을 얻기 위해 1996년 넥스트사를 인수하면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당시 잡스는 자신을 ‘iCEO’라고 불렀다. 임시(interim) CEO라는 뜻. 그가 받기로 한 연봉은 단돈 1달러였다. 그는 3년 만인 1998년 10월 애플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모니터와 본체를 하나로 만든 혁신적 디자인의 아이맥(iMac)을 선보였고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 아이포드로 자신의 플랜을 펼쳐보였다. 잡스는 2000년에 정식 CEO가 됐지만 여전히 iCEO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이제는 인터넷(internet) CEO란 뜻으로 말이다. 2000년 애플이 드디어 잡스에게 감사의 선물을 했다. 8억7000만달러에 이르는 애플 주식 1000만주와 걸프스트림 제트비행기가 그것이었다.잡스는 지나칠 정도의 카리스마와 자존심을 가진 인물이다. 이런 그의 캐릭터는 종종 양날의 칼이 되어 상처를 안겨주었다. 이와 관련, 만약 잡스가 조금만 자존심을 죽였다면 PC 산업의 역사가 완전히 새로 쓰여질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IBM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퓨터 운영체제 윈도에 맞설 새로운 운영체제를 찾고 있던 1989년 즈음의 일이었다. 당시 IBM은 잡스가 개발한 운영체제 ‘넥스트스텝’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거대기업 IBM 앞에서 주눅 들기 싫었던 잡스가 자존심을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계약이 상당히 더디게 진행됐다. 그 사이 IBM 경영진이 바뀌면서 이 계약은 없던 일이 됐다. 만약 잡스가 좀 더 계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가 제대로 성장하기 전에 IBM의 넥스트스텝이 운영체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번에는 잡스의 자존심이 진가를 발휘한 사례다. 1995년 11월 픽사 주식을 상장하던 날, 전문가들은 픽사의 시초가를 12~14달러로 주장했으나 잡스는 22달러는 받아야 한다고 우겼다. 시초가가 낮을수록 주식 거래자의 배만 불려주고 회사로 들어오는 수입이 줄어든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높은 시초가는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갖고 있었다. 다행히 첫날 거래에서 픽사 주가는 급등세를 보이며 39달러로 마감됐다. 이제 잡스는 확연히 달라진 캐릭터를 보이고 있다. 그는 200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엑스포에서 자신의 일을 ‘팀 스포츠’라고 표현했다. 그는 “매일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과 일한다. 픽사와 애플에서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다. 이 일은 팀 스포츠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부각시키기보다 팀을 앞세우기 시작했다.잡스가 그렇다고 인심이 후한 인물은 아니다. ‘구두쇠’란 소리를 가끔 듣곤 한다. 픽사 상장 이후 잡스와 주변 참모들은 돈방석에 올랐다. 스톡옵션의 위력이었다. 적게는 1000만달러에서 많게는 6000만달러까지 주식 가치가 뛰었다. 하지만 회사의 다른 직원들에게는 잡스가 별로 인심을 쓰지 않았다. 잡스는 오랫동안 충성을 바친 사람들에게 충분히 감사 표시를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을 두고 잡스의 ‘진심’이 무엇일까 하는 논란도 일었다. 물론 “잡스가 픽사에 5000만~6000만달러를 집어넣으며 일종의 도박을 했는데 그저 함께 일했다는 이유로 직원들에게 보상해줘야 할 필요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잡스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그의 아내 로렌이다. 잡스는 로렌을 만난 순간을 ‘나의 남은 인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그녀에게 흠씬 빠졌다. 로렌은 펜실베이니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대 문학사, 와튼스쿨에선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메릴린치의 자산관리팀, 골드만삭스 투자전략팀 등 월가에서 일하기도 했다. 잡스와 같은 채식주의자로 궁합도 맞았다. 두 사람은 1991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무척이나 간소했다. 잡스는 오랫동안 선(禪) 사상의 영향을 받아 왔다. 결혼식에서도 향을 피웠다. 주례는 잡스에게 오랫동안 수행을 가르친 불교 승려 코빈 치노가 맡았다. 민주당 정책을 지지하는 잡스 부부는 상당한 정치 기부금을 내며 민주당 후보들을 후원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와 친분을 쌓기도 했다. 잡스 부부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 중국 장쩌민 주석을 위한 백악관 공식 만찬에 초대받았다. 하룻동안 클린턴 부부의 손님이 돼 링컨 방에도 머물렀다. 잡스 부부는 대통령 부부에게 비워두고 있는 자신의 미 서부 우드사이드 저택에 언제든 방문해도 좋다고 말했다. 클린턴의 딸 첼시 클린턴이 스탠퍼드대에 다닐 때 대통령 부부는 이따금 이곳을 이용했다.로렌은 앨 고어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200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의원으로 참석했다. 이어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공화당 후보로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왔을 때는 회계감사관 선거에 나선 민주당 후보 스티브 웨스틀리를 위한 후원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당시 슈워제네거의 인기 때문에 공화당이 싹쓸이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회계감사관 선거에선 웨스틀리가 승리했다. ☞ 스티브 잡스의 사업과 인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