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에 사서 뉴스에 팔아라.’ 흔히 듣는 주식 격언이다. ‘대중화한 지식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돈의 원천은 ‘정보의 시차’라는 소리다. 시장이 흘러갈 물줄기를 미리 본다면 얘기는 끝난다. 먼저 가 길목을 지키면 된다. 하지만 시장이 갈 방향을 앞서 본다는 게 어디 쉬운가. 보는 눈이 있다고 해도, 확신을 갖고 추진할 용기가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FGF 최진원 사장(57)은 샐러리맨 시절 ‘먼저 보는 눈과 실행에 옮기는 발’을 단련해 오너 경영자로 변신에 성공한 케이스다. 그는 첫 직장인 코오롱상사 수출부에서 해외 출장과 바이어 미팅을 통해 앞선 나라의 비즈니스 감각을 배웠다. 최 사장은 KAL기 사건이 나던 1987년, 부진한 내수 부문에 구원투수로 투입된다. 7년여 간 캘빈클라인 등 세계적 브랜드의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 수출을 맡으면서 눈높이는 월드 클래스로 맞춰졌다. 당시 코오롱의 ‘맨스타’는 이미 국내 신사복 시장의 강자였다. 하지만 옷은 단순했다. ‘베이지나 회색의 투 버튼’. 최 사장은 획일적인 색상이나 디자인의 관행부터 깨나가기 시작했다. 정체된 시장에서 눈길을 끌려면 ‘차별화’가 필수라고 판단한 것이다. 최 사장은 해외사업 경험을 통해 차별화 방향을 훤히 꿰차고 있었다. 문제는 국내에 적용할 수준과 타이밍. ‘소비자의 요구 수준’에 기초하지 못하면 매출로 이어지지 못한 채 그냥 ‘튀고’ 끝날 뿐이다. 최 사장은 내수 부문으로 배치되자 곧장 백화점으로 갔다. 신사복 코너에 죽치고 앉아 고객들을 관찰했다. 고객들이 어떤 신사복에 눈길과 손길을 주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그 결과 고객들이 좀 더 다양한 색상과 스타일을 원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맨스타의 색상과 스타일을 선진국 방향으로 조금씩 바꿔갈 타이밍이었던 셈이다. 그 무렵 그의 감각은 업계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본 다반과 합작으로 남성 캐주얼 브랜드 ‘인터메조’ 도입을 추진 중이던 쌍방울의 레이더에도 최 사장이 잡혔다. 인터메조는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낯선 브랜드였다. 하지만 그는 출장길에서 인터메조 브랜드를 눈에 익혔던 터였다. 국내 남성복 시장에도 과감한 스타일을 선보일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던 최 사장에게는 특히나 매력 있는 브랜드였다. 그의 글로벌 감각과 국내 시장 경험이 맞물린 ‘국내시장 시차 공격’ 감각이 빛을 발할 기회였다. 그는 쌍방울의 자회사인 쌍방울다반의 기획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직에는 자신의 강점을 더욱 살리는 최 사장의 철저한 자기관리가 화룡점정이 됐다. 그는 코오롱상사 시절, 동료 2~3명과 그룹지어 새벽 6시부터 동네에 사는 일본인에게 일본어 강습을 받았다. “일본어를 쓰면 얼마나 쓰겠느냐며 대충 지냈더라면 아마 인터메조를 만날 기회가 달아났을 겁니다. 일본 라이선스 사업이었기 때문에 영어 외에 일본어까지 할 줄 아는 게 자격요건이었죠. 내수와 수출 의류 사업에 아무리 경험이 많더라도 일본어를 못하면 곤란했는데, 당시 그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오렌지, 옐로 같은 화려한 색상, 어깨가 풍성한 속칭 Y라인의 뉴 스타일…. 반 발짝 앞서 트렌드를 읽을 줄 아는 눈이 다져지지 않았다면 당시 국내 남성복 시장에서 시도하기 힘든 파격을 과감하게 선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고객들은 머뭇거렸고, 도입 첫해 실적은 부진했다. 하지만 낯을 가리던 고객들은 금세 선진 트렌드의 매력을 받아들였다. 이듬해 바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이후 인터메조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효자 사업이다. 롯데백화점 본점 후미진 자리에서 3평 남짓으로 출발한 인터메조 매장은 새 단장 때마다 중심으로, 넓게 옮겨갔고 매출 곡선도 치솟았다. 시원스레 뻗어가는 매출 곡선을 타고 최 사장도 승진 가도를 달렸다. 부장으로 간 지 1년 만에 이사를 달았고 다시 6년 후 대표이사가 됐다. 40대 최고경영자(CEO)를 구경하기 힘든 시절에 그는 마흔 일곱에 사장 명함을 달았다. 최 사장은 해외 출장을 가면 정해진 업무 이외에도 선진국의 라이프 스타일에 촉각을 세운다. 호텔방 TV에 비친 장면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 일본 출장길에서 현지 TV뉴스를 보던 그의 눈에 앵커의 옷차림이 들어왔다. 스웨터를 어깨에 걸치기도 하고, 세련된 스리 버튼 양복을 입기도 했다. 옷차림 덕분에 뉴스 프로그램까지 신선하게 느껴졌다. 알아보니 그 앵커의 의상은 모두 이탈리아 브랜드인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협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 사장은 인터메조에 이어 ‘다반’ 브랜드를 국내에 들여오면서 이 아이디어를 응용했다. 어깨가 넓고, 색상도 화려했던 다반 신사복은 보수적인 국내 직장인들에게 낯설었다. 고심하던 최 사장은 파리 특파원을 막 마치고 돌아온 MBC의 엄기영 앵커를 무작정 찾아갔다. “해외 출장을 다녀보면 그 나라 간판 뉴스 앵커들은 국내 패션 수준을 대변해 주는 아이콘 역할을 한다. 메인 앵커가 개인이 아닌, 공인으로서 세련된 복장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는 다반에서 매일 양복과 셔츠, 넥타이를 코디네이션해 줄 테니 입어 보라고 권했다. 감색 정장에 흰색 와이셔츠에서 벗어난 앵커의 옷차림을 생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너무 튀지 않을까’ 걱정하던 엄 앵커도 1주일여의 조리 있는 설득에 넘어갔다. 그후 엄 앵커는 7년 이상 다반이 코디해 주는 복장으로 뉴스를 진행했고,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간접적으로 다반의 브랜드 인지도도 올라갔다. 그가 오너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끔찍한 ‘위기’때문이었다. 무적자 기록의 쌍방울다반이었지만 모기업이던 쌍방울이 부도 나자 거래처에서 자금과 물건을 딱 끊어버렸다.러닝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나와 박대하던 단자사(투자금융회사) 임원에게 매달려 몇 달 지불유예를 얻어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해외 거래처를 막는 것도 시급했다. 신용장(LC)이 부도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거래처 오너들에게 통사정했다. “이건 국가적 위기다. 회사가 부실해서 생긴 게 아니다. 이 위기만 넘기게 해 달라.” 결국 라이선스 파트너였던 CP컴퍼티를 비롯해 원단업체, 컨버터 업체 등 해외 거래처는 모두 LC를 취소하고 4개월짜리 DA(외상거래)로 바꿔줬다. 총 20억원어치였다. 일본 다반측에도 6개월 간 로열티를 유예해 달라고 간청했다. 해외 거래처가 모두 도와줬다. 최 사장이 평소 쌓아둔 신뢰 덕분었다. 그래도 경영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총 대출금은 1백50억원. 모회사 쌍방울은 부도 나고 쌍방울다반의 경영권은 채권자였던 중앙종금으로 넘어갔다. 중앙종금은 쌍방울다반의 인수자를 물색했으나 쉽지 않았다. 월급 사장이었지만 관행에 따라 보증을 선 상태라 최 사장까지 파산할 지경이었다. 직원은 물론 가족들까지 거리로 나앉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불안감에 잠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고 위궤양은 몸을 괴롭혔다. 중앙종금 담당 임원이 어느 날 최 사장을 불렀다. 직접 회사를 인수하라고 제안했다. 인수 가격은 65억원. 그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액수였다. 동양종금은 아이디어를 짜냈다. 자본금 30억원을 감자할 테니 35억원만 조달하라고 했다. 최 사장은 주변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돈을 긁어모아 45%를 인수했다. 나머지 중 20% 남짓은 부사장, 그리고 나머지는 대리점 점주와 직원들이 십시일반했다. 그렇게 그는 최대 주주가 됐고 회사 이름도 FGF로 바꿔 달았다. 포워드 글로벌 패션&푸드(Forward Global Fashion&Food)의 약자.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하고 앞서 나가는 패션과 푸드 그룹이라는 의미다.그의 글로벌 경험은 인맥의 차별화도 선물했다. 그는 상사맨 생활과 해외 라이선스 브랜드 사업을 거치면서 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특히 이탈리아 인맥의 덕을 많이 봤다. 청담동에 운영 중인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 ‘보나세라’와 대중성이 가미된 ‘스타세라’는 컨설팅부터 주방장, 건물 설계, 광고 홍보물 제작까지 모두 일류 이탈리아 전문가들의 손을 거쳤다. 이탈리아 최신 유행인 저칼로리 얇은 피자 ‘스키차타’를 국내에 들여온 것도, 지방이 거의 없는 젤라토 아이스크림의 나폴리 2대 명장을 소개받은 것도 모두 오랜 이탈리아 친구들의 귀띔과 소개 덕이었다. “글로벌화했다지만 패션이나 디자인, 라이프 스타일과 관련된 업종은 아직 유럽, 미국, 일본이 앞서 있어요. 그곳을 잘 관찰하면 미래가 보이죠. 글로벌 인맥을 이용하면 비용을 절감하면서 차별화를 동시에 이뤄낼 수 있습니다.” 최근 바꾼 회사 로고 타입도 이탈리아 광고회사가 담당했다. 국내 업체를 써 봤지만 고가에다 디자인력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현재 이탈리아 업체의 가격은 국내 업체 가격의 3분의 1 수준. 이탈리아 감각이라는 차별화까지 덤으로 얻는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만 넘는다면, 유럽 업체와 작업하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다.그동안 장사를 잘 한 덕분에 회사는 패션 4개 브랜드, 레스토랑 2개 브랜드에 매출 400억원 대 규모로 성장했다. 내부 유보금도 풍부해 당장 공격적인 확장도 가능하지만 최 사장은 자제한다. 흑자 기업이어도 순간의 유동성 문제로 부도날 수 있다는 IMF 시절의 호된 교훈이 몸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최 사장이 안전을 위해 기업의 생명인 성장을 포기한 건 아니다. 타율을 높일 적절한 타이밍을 보고 있을 뿐이다. 주식투자로 치자면 그는 워런 버핏 스타일이다. 아직 국내 시장에서 뜨겁지 않은 사업을 찾아내 한 발짝 먼저 시작한 뒤 효율 높은 경영을 실행해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글로벌 트렌드를 읽는 눈과 내수 타이밍을 짚는 발은 샐러리맨 시절 그가 쌓은 비즈니스 밑천이다. 그 감각은 ‘국내 시차공격’의 승률을 높여줬고 오너 변신의 원동력이 됐다. 그는 이제 의류 제조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레스토랑 등 라이프 스타일을 축으로 한 신사업 확장과 기업공개를 준비 중이다. 과학보다는 예술에 가깝다는 경영. 경험과 지혜가 최적 비율로 농익은 50대에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최 사장의 ‘예술 솜씨’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 최진원사장의 성공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