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대 우리나라에는 일제 식민정책의 격랑에 휩쓸려 일확천금을 꿈꾸는 개척자가 많았다. 당시 잡지에는‘현대조선의 4대광’으로‘만주광·금광광·미두광·잡지광’을 들면서‘말세가 되어서 그런지 사회가 중심을 잃어서 그런지 전에 없는 미치광이와 이름 들어보지 못한 정신병자가 날로 늘어가는 것이 요사이 조선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 5000개의 광산이 개발됐는데 그 중에 금광이 3000개에 달했다고 하니 그렇게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오늘날의 벤처와 흡사하게‘블루오션’을 개척하는 일은 언제나 외롭고 힘들다.1933년‘삼천리’잡지에‘3대 금광왕 출세기’가 실려 있는데, 최창학과 방응모의 내용은 전봉관이 쓴‘황금광시대’에 소개돼 있으나 김태원의 행적은 빠져 있어 소개할까 한다. 필자가 소남(小南) 김태원(金台原)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부터였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1884~1970)이 안희제(1885~1943)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할 때 뒤에서 도운 사람이 김태원이었지만 직접 관련이 없어 자료를 유보해 뒀다. 김태원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이용선(작가)의‘거부열전(제5권 중‘광산왕 김태원’, 1982)’과 김준헌(전 영남대 교수)의 논문 한 편(‘소남 김태원의 사적과 금정금광의 경영’, 경영사학 제2집, 1987)이 고작이고, 이후 후손들이 흩어진 자료를 수습해 가족용으로 만든‘소남 김태원 선생 행적기(2002)’란 소책자가 있을 뿐이다. 김태원(1877~1950)은 그의 삼남 김철주의 증언에 따르면 젊은 시절 쌀을 싣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상업을 하다가 실패했고, 경리 및 산수에 밝아 백산상회의 지배인으로 들어가면서 백산 안희제와 인연을 맺었으며 소남이란 아호도 백산에게서 얻었다고 한다.김태원이 광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백산상회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송달한 것이 일경에 적발돼 관련자들이 문초를 당하자 증거물을 소각하고 쫓기는 몸이 되어 산으로 잠적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당시 총독부는‘선원주의(先願主義)’라 하여 산주(山主)와 관계없이 캐낸 금을 근거로 광업권을 먼저 출원한 사람에게 허가를 내준다는 산금정책(産金政策)을 벌였다. 이에 따라 광산업은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일확천금을 꿈꾸기에 가장 적합한 사업이었다.일본 경찰을 피해 산으로 피신해 다니면서 김태원은 광산(土店) 일을 배운다. 이후 그는 영일군 청하면의 광산, 의성군의 의성광산, 영덕군 달산면의 서점광산, 충남의 광천광산, 충북의 음성광산, 경북의 금정광산 등을 경영했다. 김태원이 광맥을 발견하기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용선은 ‘거부열전’에서‘손에는 망치 하나를 들고서…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면서 금을 찾아 다녔다. 5년이 걸리고 10년을 잡아먹는 동안 빚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요, 거기다 자기 집안, 친구들까지 못 살게 만든 일도 비일비재할 것이었다. 그는 현영운이 경영하던 경기도 양주광산을 인수받아 처음 성공을 거두었다. … 김태원은 즉시 그 돈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봉화군 금정광산에 쏟아 넣었던 것이다. … 그러나 금은 나오지 않고 … 갱목을 무심하게도 2년 동안을 쳤었다. 그때 씨의 고심은, 그리고 그의 철석같은 의지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의지가 그대로 숨어 있었던 것이며… 여기에서 성공을 못하면 차라리 목숨을 내놓으리라고 하고 아주 비상한 결심을 하였다. 그는 항상 허리띠를 두 개씩 차고 다니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허리띠를 하나 더 차고 다닌 것은 여의치 않으면 목을 매고 죽을 비장한 각오를 한 것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궁즉통(窮卽通)이라 했던가. 마지막 남은 쌀 한 가마가 다 떨어져 갈 무렵 그는 금정광산에서 ‘노다지’금맥을 발견했다. 금정광산은 정말 대단한 광산이었다. 이 광산은 매장량 및 금의 질이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금광이었다. 김준헌의 논문에 의하면 1932년에 무려 233kg의 금을 생산했다고 한다. 1923년 광구 등록을 한 지 10년 만인 1932년에 김태원은 이 알짜배기 금정광산을 일본인(後宮信太郞)에게 55만원에 팔아 넘겼다. 매장된 금의 양에 비하면 헐값이라 할 수 있으나(최창학의 삼성금광이 150만원에 팔린 예로 보아) 당시의 55만원은 실로 엄청난 거금(현재 가치로 550억원)이었다. 김태원은 이 거래의 중개인으로 가장 믿어 왔던 안희제를 내세웠으며 성사 후에 수고비와 함께 만주의 발해농장(안희제가 개발하던 대규모 농장) 구입에 보태라며 7만원을 주었고 10만원을 떼어 지역의 각종 단체에 기부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김태원이 이렇게 갑자기 금정광산을 처분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대구에서 신간회 활동을 하던 이갑성(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 금정광산의 금괴를 가지고 상하이로 가려다가 일경에 발각돼 조사를 받은 후 일본 총독부로부터 양도 압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태원의 이름 앞에는 어느덧‘광산왕’이란 칭호가 붙었고 수많은 단체가 기부를 호소했다. 김태원의 기부 실적은 동래 범어사의 스님 최일해가 1940년에 쓴‘소남옹실적(小南翁實蹟)’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1000원 미만의 것은 기록하기 어렵다’며 큰 금액만 기록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김해농업학교 건축비 3000원, 대구의학전문학교 2만원, 애국부인회 1000원, 대구충영탑 건설비 1000원, 경북녹화협회 1000원, 대구궁민구제비 1000원, 시정25주년기념관 건축비 1500원, 낙동수해이재민의복급구제 1300원, 간도용정동흥중설립기금 5000원, 간도산재조선인구출자금 2만원(손지환편), 나병협회 5000원, 동경성조선인학교설립기금 5000원(안희제편), 국방금 4000원, 동래실달학교 1000원, 김해구포간낙동강교량가설 3000원, 대구신사 1000원, 경주숭혜전묘우건축비 1000원, 환갑연폐지걸인의류급고아원양로원 각단체 교남학교 3만원 등.대충 잡아도 10만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밖에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남명보통학교(현 대구대성초등학교)를 설립한 일이다. 대구에서 서병일이 설립했던 일신학원이 1932년 경영난에 봉착하자 이를 인수, 비산동에 교지를 확보하고 거금 5만원을 쾌척해 남명보통학교로 개칭하고 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것이다. 1936년에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대구의 유지들(안희제 최준 김계수 여상원 김재명 등 180여 명)이 발기, 교정에 그의 동상을 건립했으나 이 동상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전쟁물자(동으로 제작되었기에)로 공출됐다. 광복 후 동상이 섰던 대석 위에 초라한 비석 하나만 남기고 있다. 또 대구의 남산병원을 설립할 때에도 당시 동산병원 외과 의사이던 최재명에게 병원 건립비 1만원을 빌려주며 환자가 가난해 치료비를 받지 못하면 무료로 치료해 주고 누적 금액을 기록해 오면 빌린 돈에서 탕감해 주겠다고 하여 3년 만에 빚을 모두 탕감해줬다고 한다.일본 총독부가 1940년 금본위제도를 폐지하자 금광 사업은 더 이상 전망이 없다고 판단한 김태원은 서서히 광산업을 정리하면서 회문탄광을 경영했던 김계조와 동업, 일본연료주식회사를 설립한다. 그러나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먼저 미스터리인 김계조의 신원을 철저히 파악하지 못했고, 석유액화사업의 기술력이나 수요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1942년께 회사가 파산하자 엄청난 부채를 갚기 위해 모든 광산과 재산을 처분, 정리했다. 무일푼이 된 그는 경북 고령으로 집을 옮겨 어렵게 살던 중 6·25가 나던 1950년에 병을 얻어 그해 9월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고령의 길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58년 그가 세운 대성초등학교에서 뜻있는 유지들이 모여 식을 치르고 동래 범어사 경내로 이장됐다.그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3남 3녀, 부인이 죽고 재취한 김해김씨로부터 2남 3녀 등 모두 6남 5녀의 자녀를 슬하에 두었다. 김윤상(영남대 교수)은 필자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지만 그가 김태원이 70세 때 얻은 막내아들인 줄은 최근에야 알았다. 세상은 참으로 넓고도 좁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니 선행을 많이 한 이 가문의 후손들에게 반드시 좋은 일이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