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보증 전표 바우처 사들여 재벌된 러‘아브라모비치’
러시아 최대 갑부인 로만 아브라모비치(38)는 미스터리 인물이다. 그는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4살 때 아버지마저 잃었다. 4살에 고아가 됐지만 그는 30대 중반에 당대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오른다. 미국의 경제 잡지 포브스가 3년 전 아브라모비치를 억만장자 리스트에 올린 것. 포브스 집계에 따르면 현재 그의 재산은 133억달러(약 13조원). 주로 주식 가치를 평가한 것이어서 실제 그의 재산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런던 라운데스-스크베르의 저택과 전용기 및 요트 등을 포함, 세계 각지에 재산이 널려 있고 러시아 석유회사 시브네프트 배당금 등으로 연간 소득은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3년 4500억원을 들여 영국 축구클럽 첼시를 사들인 이후 그는 국제 사회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다음으로 주목받는 러시아인이 됐지만 그를 만났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언론 인터뷰도 거의 없다.지난 5월20일 프로축구팀 수원삼성과 영국 첼시가 친선경기를 가졌을 때 TV 화면에 잠시 그의 모습이 비쳐졌지만, 축구 관람 이외의 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심지어 주최 측인 삼성전자와 수원삼성 관계자들조차 “아브라모비치는 호텔과 자동차만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 나머지는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우리도 일정을 알지 못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그는 부모를 잃고 작은아버지 가족에 입양된다. 한때 모스크바에 살다가 외할아버지가 계신 북쪽 지방 코미로 이사한 후 이 지역 공대를 다니다 군대를 가는 등 평범한 삶을 살았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평범한 청년이 엄청난 갑부로 변했을까.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지난 1992년 러시아는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92년 초 가격 자유화 조치가 발표됐고 6개월 후 러시아 국영기업의 80%를 민영화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다.당시 러시아 정부는 5700만명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1인당 1만루블(당시 원화로 환산하면 약 5만5000원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근로자 한 달 월급 수준)의 가치가 있는 ‘바우처’(정부가 지급 보증하는 일종의 전표)를 나눠줬다. 이 바우처로 국민들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나 다른 국영기업의 주식을 받을 수 있었다. 옐친 대통령은 “이 바우처가 우리에게 경제자유를 가져다주는 티켓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당시 근로자들은 주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러시아어에는 ‘민영화’란 단어조차 없었다.1992년 25세에 불과했던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그러나 시장경제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러시아에서 생산된 석유를 싼 값에 사들여 해외에 되파는 사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 사업은 불법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그는 석유회사 근로자로부터 바우처를 사들이는 일에 집중했다. 그는 사들인 바우처를 에너지회사 주식으로 교환했다.특히 가격자유화 조치로 물가가 급등하고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서민경제가 폐허가 됐기 때문에 그는 손쉽게 바우처를 살 수 있었다. 소수에게 바우처가 집중되는 것을 막는 방법도 있었다. 근로자 이름으로 양도 불가능한 저축 계좌를 만들어 줬더라면 바우처 투기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 정부도 이런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계좌를 만들어 줄 종이와 인쇄 설비 등을 마련할 형편이 못됐다. 종이 쪽지 하나인 바우처를 주는 게 훨씬 비용이 적게 들어 이런 방법을 썼던 것이다. 결국 러시아 국민 가운데 바우처를 주식으로 바꾼 사람은 8%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옐친은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옐친은 로만 아브라모비치 같은 올리가르히(러시아의 신흥 부자)에게 경제 회복을 위해 정부에 대출을 해주면 국영기업 주식 경매에 우선적으로 참여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옐친은 재선에 성공했고 나라는 안정돼 대출금은 다시 상환됐다.옐친의 약속대로 국영기업 민영화는 이들 올리가르히의 독무대가 됐다.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한 채 이뤄진 경매에선 대부분 단독 입찰이 이뤄졌고 하룻밤 사이에 억만장자가 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한때 러시아 최대 부자였던 미하일 호도로프스키도 러시아 의회 의원이었을 때 석유회사 유코스를 경매에서 낙찰받아 거부 반열에 올랐다. 불행히도 호도로프스키는 야당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집권세력과 갈등을 일으키다 결국 구속돼 무려 9년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주인이었던 석유재벌 유코스도 해체됐다. 억만장자가 만들어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러시아에서는 이처럼 쉽게 이뤄진다.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주인처럼 모셨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함께 석유 시추회사와 원유 정제회사, 배송망 회사를 한 데 묶어놓은 시브네프트란 지주회사를 경매에서 낙찰받게 된다. 입찰 당시 유넥심뱅크란 회사가 베레조프스키의 입찰가보다 무려 2000억원이나 더 높은 금액을 써냈지만 인수에 실패했다. 당시 베레조프스키는 옐친 대통령과 깊은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던 유넥심뱅크는 법정으로 문제를 끌고 갔지만 얼마 안 가 갑자기 소송을 취하했다.민영화 후 시브네프트는 직원들에게 자주 월급을 주지 못했다. 러시아가 1998년 금융위기로 향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을 줄 형편이 못됐던 것이다. 그 때 시브네프트는 임금 대신 1992년 이후 근로자들이 받았던 주식을 사주겠다고 제안했고 당장 먹을거리가 필요했던 근로자들은 이 요구에 응했다. 또 시브네프트의 가장 수익성 높은 자회사가 4500만주의 신주를 발행해 아브라모비치와 같은 핵심 주주의 지분은 61%에서 78%로 높아졌다. 대부분 러시아 기업들이 주권을 따로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유일한 주주 증명방법은 수기로 작성된 주주명부밖에 없었다. 따라서 때로는 주주가 빠지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신주가 발행되는 일도 잦았다. 게다가 베레조프스키마저 권력층과의 마찰로 영국으로 도피했다. 아브라모비치와 핵심 주주들은 베레조프스키의 주식까지 사들였고 결국 시브네프트 주식 97.2%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시브네프트의 배당금은 지난 2000년 약 500억원 수준에 불과했지만 2001년에 1조원, 2002년에 1조1000억원, 2003년에 1조2000억원으로 늘어났다. 이 배당금의 대부분은 아브라모비치를 위시한 시브네프트의 핵심 대주주에게 돌아갔다. 고유가가 지속되고 있어 그의 재산은 더 불어날 게 확실하다.젊은 나이에 떼돈을 벌어서인지 그는 정말 돈을 ‘물쓰듯’ 쓰고 있다. 지난 2년간 영국 축구클럽 첼시에 총 7000억원을 쏟아부었다. 축구광인 그는 첼시 경기를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며 팀이 경기에서 지면 눈물도 흘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헬기장을 갖춘 1000억원짜리 요트와 이보다 크기는 작지만 화려하게 치장한 ‘르 그랑블루’란 1200억원짜리 요트를 갖고 있다.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그는 작년에 보잉 737기를 팔고 보잉 767제트기를 새로 구입했다. 이 비행기는 원래 350명의 승객을 태워 나를 수 있는데, 현재 30개 좌석에 식당과 주방, 싱크대, 샤워 룸, 플라즈마TV 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비행기 구입 가격은 1000억원 수준인데, 비행기를 개조하는 데만 9000억원을 쓴 것으로 전해졌다. 이 비행기에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까지 장착돼 있어 미국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 다음으로 가장 훌륭한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극동 추코트카 주의 주지사도 맡고 있는 아브라모비치는 새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500억원을 들여 추코트카 공항을 보수했다.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추코트카 주지사가 된 뒤 이 지역에 대규모 투자사업을 벌였다. 그가 대주주로 있는 시브네프트의 대변인은 “아브라모비치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극동 지역의 가난한 아이들을 런던에 초청,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을 보여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다”며 “추코트카 주민 7만명은 과거 끼니를 걱정해야 했으나 지금은 집에다 돌비 서라운드 시스템을 갖춰 놓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로만 아브라모비치는 크렘린궁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아무리 잘나도 권력 앞에서 몸을 낮춰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푸틴 정권 등장 이후 중앙정부의 입김을 피하기 위해 모스크바가 아닌 극동의 추코트카주 주지사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지방에서 사회사업을 통해 입지를 굳히는 치밀한 전략을 선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첼시구단 인수, 알루미늄 회사인 루스알의 재산을 매각하는 등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키고 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 감사원은 탈세 혐의가 있다며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