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누보 시대의 쥬얼리 디자이너, 르네 랄리크

랑스의 보석세공사이자 유리공예가인 르네 랄리크(Rene Lalique)는 아르누보 쥬얼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세공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1860년에 태어난 랄리크는 1890년부터 기존 19세기 프랑스 쥬얼리 양식을 과감히 던지고 미감(美感)에 호소하는 아름다운 장식과 신형 디자인으로 세상을 흥분시켰다. 랄리크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00년 파리의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alle)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부터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황홀하면서도 신흥 사회의 타락적인 면과 쇼킹한 새로운 관습이 반영된 그의 오브제를 관람하기 위해 전시 부스로 몰려들었다. 그 후 세계 각국의 부유층과 왕족에게서 주문이 쇄도했다.마치 순식간에 유명해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랄리크도 그의 창작품을 위해 깊은 고뇌를 거듭했고, 인정받기 위한 수많은 시도를 해 왔던 터였다. 그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창작품을 위해 테마, 기술, 색감, 소재 등으로 끊임없이 실험했다. 그가 견습생으로 입문한 1876년의 보석 시장은 매우 부진하고 정체된 상황이었다. 디자인은 주로 자연을 모방한 것이 지배적이었으며, 소재는 다이아몬드에 크게 의존한 상태였다.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에 충실한, 육중한 플라워 모양 따위에 선으로 변형을 준 것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랄리크는 1890년부터 에나멜과 유리로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법을 실험했다. 금으로는 화려하면서 유기적인 형태를 만들었고, 주로 여성의 몸매 윤곽을 통해 곡선미를 제시함에 따라 아르누보의 특색이 두드러지게 했다. 게다가 랄리크의 작품은 조각의 요소를 띄고 있다. 그는 조각가 로댕과 동시대에 살았지만, 함께 작업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그런데도 랄리크의 작품에는 로댕 작품에서 나타나는 삶에 대한 강한 욕망과 슬픔, 명상적이면서 혼동적인 움직임과 힘을 찾아 볼 수 있다. 로댕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인생의 파동과 열정은 랄리크의 보석세공에도 매우 부드러운 방법으로 전달되어 있다. 랄리크의 금세공은 마치 그 소재가 금이 아니라 수액, 혈액 등 액체가 흐르는 듯 하는 선으로 이루어져 아르누보의 상징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에나멜을 사용한 생동감 넘치는 생물, 나무의 뻗은 가지, 비꼬인 뿌리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랄리크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자연을 모티브로 삼으면서, 반복적으로 색다른 것을 제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순환하는 자연의 쇠퇴와 재생을 초점으로 가을 낙엽은 울적함과 죽어가는 세기말을 상징했고, 새싹은 다가오는 세기를 암시했다. 특히 들꽃을 애용해 곧 바람에 분해될 것 같은 엉겅퀴와 온실의 이국적인 난초를 놀라울 만큼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랄리크의 손을 통해 말벌과 딱정벌레 등 곤충은 소생한 듯 꽃밭 위를 떼 지어 날고, 잠자리는 연약한 날개로 오팔과 바다 빛깔 아쿠아 마린 위로 떠다녔다.아르누보의 새 모티프는 비둘기부터 화려한 공작새, 위협적인 독수리까지 다양했다. 특히 그의 흥미를 돋우는 동물들은 박쥐, 개구리, 뱀, 카멜레온 등 마법적인 요소와 성(性)적이고 신화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그가 사용한 모든 테마와 도상의 주제 중 여성의 나체를 조각한 것이 가장 감동적이면서 논쟁의 요소가 될 것 같다. 그의 쥬얼리는 여성의 이미지를 성적 묘사와 죽음으로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작품이 강한 표현성과 상징적 이미지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착용하는 여성과의 앙상블이었다. 늘 재료 자체의 시각적 효과와 작품 안에서의 전체적인 조화를 강조했다. 랄리크가 만든 많은 장신구 중에는 자연의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충실하게 담아낸, 시각적 장식적 목적을 위해 만든 작품도 많다. 이들은 착용자의 신체, 의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포인트 역할을 하게 된다. 같은 이유로 그는 어떤 보석과 귀금속이라도 전체의 시각적 효과를 방해하는 것은 사용하지 않았다.랄리크의 금속공예품을 살펴보면 종류는 방대하나, 개별적으로 보면 모두 하나의 성격을 갖고 있다. 브로치, 펜던트, 목걸이, 머리장식, 빗 등을 위주로 한 장신구로 하나하나가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과 장인 솜씨를 담고 있는 것. 랄리크가 금속세공의 긴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은 자연적, 환상적, 문학적인 많은 주제와 이미지를 진부하거나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격을 갖춘 미적 형식을 통해 표출해 낸 그만의 독창성과 기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오랫동안 버려지고 하찮은 것으로 무시돼 왔던 유리나 뿔, 거북 등껍질 같은 재료를 과감히 사용해 보석, 귀금속과 함께 작품으로 만든 것처럼. 보석을 고를 때에도 재화적인 가치가 아닌 미적 가치에 기준을 뒀다. 그가 선택하는 돌(보석)과 작품의 조화는 1889년에서 1898년까지 제작된 공작새 가슴장식(Peacock corsage ornament)에 잘 나타나 있다. 칠보와 금으로 된 깃털에는 오팔이 장식돼 있으며, 전체 무늬는 활과 같은 패턴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다. 북극광이 돌 속에 박힌 것 같다고 일컬어지는 신비하고 섬세한 오팔은 다색조의 공작새 날개에 화려하게 매치되고 있다.랄리크가 자신의 이름으로 첫 작품을 선보인 것은 1984년 파리 싸롱전이었다. 첫 전시에서부터 많은 비평가로부터 찬사를 들었고, 파리의 멋쟁이 여성들로부터 주문을 받았다. 랄리크는 서서히 가장 뛰어나고 혁신적인 예술가로서 그의 분야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새롭고 넓은 작업장에서 장신구에 대한 랄리크의 실험은 계속됐으며, 후원자는 더 늘어만 갔다. 그의 고객 중에는 아르누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유명한 예술상인 지그프리드 빙(Sigfried Bing, 1838~1905)과 과감한 의상과 장신구 착용으로 유명한 비극적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 1844~1923)가 있다. 가장 특별한 고객으로는 아르메니아인 은행가이며 석유 재벌인 칼로우스테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 1869~1955)이 있다. 그는 150개의 랄리크 작품을 구입했으며, 오늘날 랄리크의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컬렉션을 리스본에 남겼다.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