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ia O'keeffe

지난 1월 뉴욕에서 편지가 왔다. 오래 전부터 아는 분으로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한 산타페의 감동을 기억하고, 조만간 그곳 여행을 계획하고 있으니 혹시 가서 꼭 봐야할 곳은 어디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곧 편지를 썼다.‘…2009년 새해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요. 산타페의 겨울도 대단하겠지요. 오키프의 전기를 읽다보니 새삼 오키프의 생애와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대단한 삶을 살다간 위대한 자유인이었지요. 화가의 삶에서 삶의 내면과 외면을 두루 아우른, 개인으로는 어렵지만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멋있는 삶이에요. 다시금 산타페에 가서 오키프의 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어요. 거기서 그녀가 느꼈던 예술과 고독 그리고 영혼의 자유를 만나, 나의 예술 세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고 싶어요.산타페에 가면 우선, 오키프 뮤지엄이 시내에 있어요. 그녀의 드로잉과 수채화 그림, 꽃과 들소 해골과 사막의 풍경이 아름다운 유화가 마음을 사로잡아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도 오키프의 걸작이 많지만 그보다 색다른 신선함이 있어요.그녀가 처음 정착했던 고스트렌치(Ghost Ranch)의 뉴멕시코 풍경과 아도브(Adobe) 집도 볼 만해요. 그리고 여행의 하이라이트 아비키우(Arbiquiu)에 있는 조지아 오키프 화실을 꼭 예약 방문하세요. 오키프 뮤지엄 웹사이트(www.okeeffemuseum.org)에 들어가면 예약하실 수 있어요. 뉴멕시코 흙벽돌로 지어진 화실은 오키프가 사막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주워온 차마(Chama)강 계곡의 둥글둥글한 돌과 사막에 버려진 탈화된 들소 해골 그리고 그리다 남은 물감과 붓이 단정하게 놓여 있고, 그녀가 컬렉션해서 사랑했던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등 정갈한 실내 분위기에 마음이 숙연해져요. 오키프의 체온을 눈 크게 뜨고 온몸으로 느껴 봐요. 그녀의 심장 고동을.아비키우 화실 뒷편 언덕을 조금 오르면 뉴멕시코 풍경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그 가운데 공동묘지가 있는데 오키프의 십자가 그림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지요. 말할 수 없는 쓸쓸함과 적막감이 묻어나요. 감동의 물결에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요. 파리 오베르 쉬르 와즈에 있는 고흐의 무덤 같은 절절함이 있어요. 란초스 데 타오스(Ranchos de Taos)에 있는 생 프란시스(St. Francis) 교회를 오키프가 단순하게 푸른 하늘과 갈색 집으로 나누어 그려 훗날 부랑쿠시에게 영감을 주었지요.아비키우 스튜디오 뒤 언덕너머 공동묘지 가는 곳에도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작은 아도브 교회 있어요. 꼭 보세요. 그리고 오키프가 아흔 아홉 살에 고독하게 죽은 뒤 유언대로 화장해서 유골을 뿌려진 페더널(Pedernal) 산도 눈여겨 봐요. 아비키우 화실에서 바라보면 무한히 펼쳐진 사막의 평원 위에 소리 없이 펼쳐져 있어요. 뉴욕 떠나기 전에 오키프 화집 사보고 가면 더욱 의미 있을 거예요…’그 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다시 <산타페에서>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이 왔다. 메일에는 여행 잘 하고 그림 같은 산타페의 풍광과 오키프의 영혼을 만나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의 글과 함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산타페 사진을 첨부했다. 나는 답신을 적어 보냈다.‘…한편의 서정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했습니다. 아름다웠어요. 세상의 아름다움이 도처에 있지만 인간의 고독과 영혼이 배인 삶의 자취에서 피어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더욱 특별하지요. 거기에 슬픔이 배어있다면 그건 더욱 아름답고요. 조지아 오키프의 슬프지만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화가에겐 영원한 노스탤지어일거예요. 저도 사랑해요, 오키프의 영혼과 자유를!!!겨울이 한뼘씩 짧아져 가고 있어요. 봄이 소리 없이 다가와 아침을 열어요. 북한산 진달래 꽃망울 위에도 포근한 햇살이 내려요. 계절이 어김없지만 마음의 봄은 언제쯤일까요.다음 주 즈음 겨우내 쌓였던 마음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활기를 담아 승주 선암사 어둑한 절집으로 고독한 소풍 다녀올까 합니다. 길가다 만나는 바람 한줄기 구름 한 자락이 모두 내 마음의 양식이 되겠지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화가의 삶에 감사하고 오겠습니다…’산타페와의 인연은 2006년 6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개인전을 하면서부터다. 샌디에이고는 태평양의 푸른 물결과 캘리포니아의 사막 기후가 어울려 만들어낸 도시로 꽃과 여유가 넘치는 곳이다. 뉴욕이나 서울 같은 대도시의 경쟁과는 거리가 먼, 권태로우리만치 잔잔한 햇살 아래 사람들의 발걸음은 바쁨이 없어 보였다. 그때 나는 억지로 시간을 내어 꿈에도 그리던 뉴멕시코 산타페를 여행했다. 산타페는 조지아 오키프의 영혼의 고향으로 그녀의 삶 반세기를 함께 한 고스트렌치와 아비키우를 여행한다는 사실은 개인전 오프닝의 기대만큼이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뉴욕에서 공부할 때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본 오키프의 유화 <이스트 리버 풍경>과 <블랙 아이리스> <소의 해골-레드 화이트 앤 블루>를 보고 느낀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꽃의 풍만함과 대담함, 풍경의 단순화와 절제미, 사막의 황량함을 따듯하게 끌어안은 뼈 그림들은 그녀의 삶과 예술 자체였다. 오키프의 화집과 평문을 접하면서 언젠가 꼭 산타페를 갈 것이라는 꿈을 심었다. 꿈은 이루어지기 위하여 꾸는 것,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 캘리포니아주를 넘어 애리조나주를 거쳐 뉴멕시코 산타페까지 자동차로만 꼬박 18시간, 미국 남서부의 평원을 한없이 바라보며 달려간 산타페는 미국의 풍요와는 동떨어진 사막의 마른 바람과 푸른 밤하늘의 별빛이 팝콘처럼 황량한 사막이었다.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1887 ~1986)는 20세기 미국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화가이다. 산타페는 그녀의 영혼의 고향이자 예술의 무대였다.오키프는 1887년 11월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 주에서 태어나 선 프레리 평원의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보며 자랐다. 17세에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 이후 뉴욕의 아트스튜던트 리그에서 새로운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후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컬럼비아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 머릿속에는 내가 배워온 것과 다른 것, 즉 내가 이전에 표현해 보지 않은 생각과 내 삶의 방식에 친근한 형태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배운 것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생각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라고.결국 1917년, 오키프는 자신의 새로운 드로잉작업이 당시 뉴욕의 아방가르드 화랑인 ‘291’에 전시되면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1864~1946)를 만난다. 스티글리츠는 ‘291’ 화랑의 주인이자 사진작가로 오키프 인생과 예술에서 떨어질 수 없는 숙명 같은 존재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 서른, 스티글리츠는 그녀보다 23살 연상이었다.스티글리츠는 오키프를 뉴욕 화단에 데뷔시키고 300여 장이나 되는 초상 사진으로 그녀의 ‘몸’을 영원히 빛나게 하였다. 1924년 뉴욕의 앤더슨 갤러리에서 열린 오키프 전시회에는 그녀의 관능적인 꽃그림과 누드사진을 함께 전시했다. 이 전시회는 뉴욕 화단과 미술 애호가들을 들썩이게 하였고 그녀가 화가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둘의 관계는 결국 연인에서 부부로 발전했다.1920년대 오키프를 사로잡은 주제는 뉴욕이다. 그녀는 단순화되고 기하학적으로 축약된 형태의 맨해튼의 야경과 이스트리버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 이스트리버 건너 공장 굴뚝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부를 단순하고 강렬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이즈음 오키프는 스티글리츠가 부유한 남편을 둔 21살 연하의 도로시 노먼과 외도한 사실을 알게 돼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가슴수술을 받고 방황한다.그녀는 1917년 콜로라도 여행길에 처음 본 뉴멕시코 고원의 깊은 협곡과 1929년 여름 산타페 타오스를 방문했을 때 바라본 드라마틱한 사막의 풍경과 강렬한 햇빛이 스티글리츠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스티글리츠의 곁에서 자아를 실현하기란 매우 어려웠으며...살아남아야 했을 때 비로소 그를 넘어설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오키프는 1931년부터 산타페 타오스의 서부 리오그란데와 고스트렌치에서 여름을 보내기 시작하다가 결국 1945년 고스트렌치 근처 마을인 아비키우에 낡은 벽돌집 한 채를 구입하여 꼬박 3년을 수리한다. 이듬해 남편 스티글리츠가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자 오키프는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1949년부터 산타페에 정착한다. 이후 아흔 아홉으로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자식도 남편도 없이 고독과 벗하며 불꽃 같은 열정과 바람 같은 자유로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아비키우 작업실에서 바라다 보이는 어머니 품 같은 페더널 정상에 한줌의 재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매일 아침 오키프는 태양과 함께 일어나서 사막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 강렬한 태양에 사막의 풍경이 신비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오전 11시경이 되면, 그녀는 사막에서 본 풍경들을 기억한 채 작업실로 돌아와 계속 그림을 그렸다.여든 다섯이 넘어서부터 점차 시력이 약해진 오키프는 희미한 시력과 손의 감각으로 찰흙작업을 시작하는데 그가 만든 커다란 조약돌 같기도 하고, 타조알 같기도 한 찰흙 작품을 바라보면 볼수록 깊은 선미(禪味)가 난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아 거의 시력이 안 보일 때까지도 붓을 놓지 않고 수채화로 그린 마지막 작품 <파란 원과 선을 그린 추상화>는 그녀의 남편 스티글리츠가 젊어서 푸릇푸릇한 사랑으로 청순하게 찍었던 그녀의 손 모습같이 단정하고 정갈했다. 오키프의 삶 전체를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고독열정 자유’ 이런 단어들이 스쳐간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사막 어디엔가 우물이 있어서라지만, 산타페가 아름다운 건 조지아 오키프의 고독한 영혼이 영원히 살아 숨쉬기 때문 아닐까.글·사진 최선호(화가)최선호ⓒ최선호 111w111@hanmail.net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SADI 교수 및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역임, 현재 전업 작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