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증시의 유동성 장세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유동성장세(금융장세)는 기업 실적이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낮은 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주가가 오르는 것을 말한다. 고객예탁금을 제외하면 시중 부동자금이 본격적으로 주식시장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지 않아 아직은 꺼림칙한 부분이 있지만 요즘 시장은 유동성랠리에 들어갔다는 분석이다.국내 주요 증권사들이 추정한 1분기 국내 상장사들의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절반이나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4분기보다는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 감소 폭이 조금 둔화된 것이지만 실적 자체만 보면 여전히 안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고객예탁금이 늘어나면서 코스피지수는 최근 한 달여간 300포인트(30%) 이상 올랐다.유동성 장세가 본격화되기 위해서는 시중 부동자금인 MMF(머니마켓펀드)가 줄어드는 대신 주식형펀드로의 자금 유입이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분석이다. 이미 고객예탁금 흐름을 보면 ‘스마트머니’라 불리는 발 빠른 투자자들은 직접 투자를 위해 주식 쪽으로 발을 담근 상황이지만 본격적인 유동성 장세의 요건은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1990년 이후 우리 증시에서 나타난 유동성장세를 볼 때 이번 상승세도 1400~1500정도까지는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3차례 국내 유동성 장세에 있어 코스피지수는 바닥 대비 평균 40~50%가량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3월 초 일시적으로 1000선이 무너진 시점을 바닥으로 보면 이 같은 분석이 가능하다. 다만 경기침체 속 주가 상승이 단기 반등에 그치는 ‘베어마켓랠리’가 아니라 ‘유동성장세’를 거쳐 ‘실적장세’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경기가 회복되는 징후가 포착되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유동성장세는 그야말로 돈의 힘에 의해 시장이 오르는 것이다. 지난해 10월부터 본격화된 금융통화위원회의 금리인하로 10월 5.25%였던 기준금리는 절반도 안 되는 2%로 낮아졌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연 4%에도 미치지 못하자 시중에 갈 곳 모르는 자금은 조금이라도 높은 투자처를 찾고 있다.실제 유동성 장세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우선 증시 자금이 조금씩 불어나고 있다. 한국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증시 대기자금인 고객예탁금은 지난 2007년 7월30일 이후 1년8개월 만에 15조 원대를 회복했다. 지난 달 30일 1년5개월여 만에 13조 원대로 올라선 이후 7거래일 연속 증가하며 단숨에 15조 원대로 올라선 것이다.돈을 빌려 주식에 투자하는 신용융자잔고도 지난해 10월 1조 원대 초반에서 2조5000억 원 수준까지 불어났다.외국인도 수급 지원의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외국인은 3월 이후 3조 원 가까운 주식을 사들이며 시장을 이끌고 있다. 이머징마켓펀드 내 한국 투자 비중이 신흥시장 내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비중에 미치지 못하면서 외국인들이 부랴부랴 한국 주식을 채우고 있는 중이다.이제 남은 건 갈 곳 모른 채 증시 주변만 맴돌고 있는 MMF 자금이 주식형펀드로 물꼬를 틀지 여부다. 이 역시 조짐은 보이고 있다. MMF는 지난달 사상 최고치인 126조 원을 찍은 후에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있는 반면 주식형펀드는 오락가락 눈치를 보고 있다.국내 유동성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보다 위험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주옥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은 “MMF에서 나온 자금은 회사채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AA등급 회사채와 국고채 간 금리차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며 “이는 수익률을 추구하는 현상이 재개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기로 인해 현금만 꼭 쥐고 있던데서 더욱 위험도가 높은 채권 쪽을 기웃거리고 결국 이런 자금이 주식 쪽으로 옮겨 올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주식시장의 기대수익률이 채권 대비 높은 수준을 보여주면서 주식의 투자 매력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오재열 IBK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소비자 물가가 불안하고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한국은행이 정책금리를 현행 2% 수준으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며 “한은이 추가로 정책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금리의 하향세가 멈추면서 채권에 대한 투자 메리트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다”고 말했다. 시중자금과 채권 선호형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돌아오면서 유동성 장세를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조성되고 있다는 설명이다.LIG투자증권에 따르면 경기상황을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성장률과 금리, 코스피지수 흐름을 살펴볼 때 우리 증시는 1992년과 1998년, 2003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유동성 장세가 펼쳐졌다.이 증권사는 과거 3차례 유동성 장세 기간을 상승세가 시작된 후 6개월까지로 보고 1992년 10월~1992년 3월, 1998년 10월~1999년 3월, 2003년 4월~9월로 정했다. 유동성장세가 펼쳐진 후에는 곧바로 실적장세로 연결되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하는 게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이들 세 번의 장세 동안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는 고점에서 평균 8.3%포인트 하락했고 GDP는 저점을 찍었다. 코스피지수는 1개월간 평균 20.6% 올랐으며 3개월과 6개월 각각 46.1% 53.1% 상승했다. 서정광 LIG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은 6개월간 2배 가까이 급등했지만 나머지 두 차례는 평균 30%가량 상승했다”고 말했다.특히 이들은 MMF 잔액이 급감한 시점과도 일치한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끝날 무렵인 1998년 10월 25조 원에 육박한 MMF 잔액은 1999년 1월 15조 원대로 줄었으며 2003년에도 4월 60조 원을 넘던 것이 35조 원 수준까지 급감했다. 강현철 우리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유동성 장세는 MMF 잔액의 감소와 함께 진행됐으며 돈의 힘이 시장을 끌어올렸다”고 강조했다. 한편 펀드자금이 폭발적으로 유입된 2004년과 2005년도 유동성 장세의 일면이 나타나긴 했지만 경기와 맞물려 보면 유동성 장세로 보긴 어렵다는 지적이 우세하다.이번 유동성 장세에 대한 기대치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코스피지수가 반등한 초기만 해도 기존 박스권(1000~1200)의 상단인 1200선을 조금 넘는 수준에서 만족하는 듯 했지만 1300선마저 넘자 1400~1500까지 높아지고 있다. 지난 세 차례와 비교할 때 1개월여 만에 30% 이상 올랐으니까 이번 랠리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오재열 팀장은 “주식형펀드로 자금 유입도 조금씩 늘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어 대형주 중심의 유동성 장세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마주옥 팀장은 “국내외에 막대한 유동성이 풀려 있고 무위험 자산의 수익률이 낮아지는 상황이어서 4~5월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는 증시 자금 유입이 더욱 본격화될 것”이라고 며 “2분기 말에는 1400선을 넘을 것”이라고 전망했다.다만 유동성장세가 실적장세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다. 서정광 팀장은 “지난 해 10월 본격적인 하락 직전 지수대인 1380~1400까지 상승세는 무난해 보인다”면서도 “아직은 유동성 ‘기대감’에 의한 장세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서정환 한국경제신문 증권부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