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권 광주요그룹 회장

인 즉, 한국 음식의 세계화가 더딘 것은 한국 지도자들의 무관심 탓이 크다는 얘기다. 이제는 지도층이 나서 한국 음식을 최고로 인정하고 고가에 소비해줄 때가 됐다고 조 회장은 강조했다."미쳤다고요. 그렇죠. 저 미쳤습니다. 미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조태권 광주요그룹 회장은 열정적이다. 그는 성성한 백발이 무색하게 힘찬 어조로 ‘한식의 세계화’에 대해 열변을 쏟아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며, 자신이 먼저 시작했으니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얘기다. 이것저것 재고 이리저리 휘둘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조 회장 본인도 순순히 인정하듯, 세상은 이런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실제로 그의 지난 20년은 ‘한국 음식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오롯이 바쳐진 ‘미친 세월’이었다. 부친이 운영하던 도자기 기업인 광주요를 물려받은 1988년 이후 다른 길은 보지도 않고 한국 음식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고민하고 실천했다. 도자기에서 시작해 이 도자기에 어울리는 음식을 내놓을 식당을 차렸다. 식당 분위기도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민화를 소재로 한 벽지를 만들었다. 2003년 만든 벽지 브랜드 ‘자비화’가 그것이다.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적인 분위기의 식당에서, 한국적인 도자기 그릇 위에, 한국적인 음식을 올려놓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뭔가 빠졌다는 느낌이었다. 술이었다. 음식에 어울리는 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는 증류식 소주인 ‘화요’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2005년 드디어 ‘화요’를 선보이기에 이르렀다.“화요는 매년 15% 정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18% 가량 커졌고요. 올해도 예년 정도의 매출 신장이 기대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양주 인구가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화요는 10만 명 수준입니다. 양주 인구의 절반만 우리 술로 옮겨와도 그게 얼마입니까. 저변은 계속 확대될 것입니다.”조 회장의 야심작인 ‘화요’는 세계에서도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2007년 국제주류품평회(IWSC)에서 우수상을 수상했고 지난해에는 세계 3대 주류 품평회라는 ‘2008 몽드 셀렉션’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최근에는 일본 수출에도 성공했다. 별다른 마케팅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식당에서 화요를 마셔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들은 일본 청주업자가 주문을 낸 것이다.“일본에선 고가인 소주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본의 소주는 대개 메밀이나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데 쌀로 만든 소주는 특히 비싸게 팔린다고 합니다. 화요는 쌀로 만든 증류식 소주입니다. 일본에서 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죠. 세계 주류 시장에서 화요의 경쟁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 정도에서 만족할 조 회장이 아니다. 조 회장은 화요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양의 주류 제조법도 응용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위스키처럼 오크 통에서 화요를 숙성시키는 작업이 그것이다. 우리 술은 우리의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만의 오크 통을 만드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토종 참나무의 향이 배인 우리 술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여러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렇다 저렇다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결국은 시장이 판단해야 할 문제 아닙니까. 다만, 더 많은 가치를 담은 술을 만들기 위해 애쓸 뿐입니다.”조 회장이 주창하는 ‘한국 음식문화의 세계화’는 말은 쉽지만 사실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길을 홀로 걷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었지만 조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 회장 말마따나 ‘한 발 두 발 담그다 보니 어느새 온 몸이 빠져든’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따지고 보면 ‘한국 음식문화의 세계화’라는 길은 조 회장 인생에서 우연의 옷을 입은 필연적 선택이었다. 1988년 도자기 사업을 하던 부친이 작고하면서 사업을 이어 받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모친은 막내아들인 조 회장이 부친의 사업을 맡기를 원했다. 단순한 이유였다. 형제 중에 유일하게 조 회장이 사업을 하니 ‘돈 들어가는 사업’을 할 사람은 조 회장뿐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조 회장은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었다.모친의 요청에 조 회장은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조 회장의 이유 역시 단순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무역업과 도자기업을 병행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사정은 ‘병행’을 어렵게 했다. 도자기 사업에서 까먹는 돈이 불어나면서 ‘한 발 두 발’ 더 깊숙이 이 사업에 빠져들게 됐다.인연이라면 인연이랄까, 도자기 사업은 자연스럽게 조 회장을 한국의 음식문화로 끌어들였다. ‘일본 도자기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있는데 일본 도자기의 원조라는 한국 도자기는 왜 안 될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시작하면서다. 해답은 도자기와 음식문화가 괴리돼 있기 때문이라는 데서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무역업을 하면서 세계의 다양한 음식 문화를 접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니 ‘한국 음식 문화의 세계화’는 조 회장에게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도자기와 음식, 술, 식당, 인테리어 등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하나만 가지고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구조인 거죠. 그래서 음식문화를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인프라를 모두 갖춘 셈이 됐습니다.”인터뷰 내내 조 회장은 한국 음식문화 세계화의 필요성과 과제, 전망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특히 일본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절박함마저 묻어났다.“도자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우리 음식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십시오. 우리 도자기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박물관이 고작입니다. 일본을 가보세요. 그들의 일상적인 음식 문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도자기는 그들의 음식문화와 함께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음식에서 멀어져 있으니 한국의 도자기 산업이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도자기가 음식과 유리된 작금의 현실에 대한 조 회장의 설명은 좀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조선조 양반 문화와 서민 문화의 격차부터 이런 조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급 음식을 즐기는 양반들에게야 도자기가 유용했지만 그 시장은 도자기가 산업화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서민들은 하루하루 끼니 잇는 게 당면 과제였으니 도자기를 꿈꿀 처지가 아니었다. 사정이 이러니 도자기가 실생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전쟁 이후에 벌어졌다. 조선조엔 그나마 도자기가 쓰였지만 전쟁 이후 서구문화가 밀려들면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졌다는 것이다.일본의 선택은 이와 달랐다. 아편전쟁 이후 일본은 급속히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음식에서만큼은 자국의 정통성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화하는 데 성공했다. 서구의 음식을 일본화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지었다. 돈까스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본식 서구화에 대해 지도층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대중화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이다.“일본은 프랑스 음식에서 문화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문화를 이끄는 전 세계의 상류층 인사들이 프랑스 음식을 선호하는 것을 봤거든요. 일본도 이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스시 같은 자국의 음식에 최고급의 가치를 부여하고 비싼 값에 소비했습니다. 그 결과 스시는 전 세계 어디서나 최고급의 음식으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자국의 문화 지도층에 일단 인정받으니 전 세계 사람들도 최고로 쳐주게 된 것입니다. 세계화는 이렇게 되는 겁니다.”말인 즉, 한국 음식의 세계화가 더딘 것은 한국 지도자들의 무관심 탓이 크다는 얘기다. 이제는 지도층이 나서 한국 음식을 최고로 인정하고 고가에 소비해줄 때가 됐다고 조 회장은 강조했다.그러나 돌아보면 최고로 인정받기 위한 업계의 노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늘 한식을 먹기는 하지만 가치를 부여하지는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우리 안에서 먼저 가치를 인정하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사업이 가온, 낙낙, 녹녹 등의 식당 사업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도자기에 세련된 우리 음식을 내놓아 한국 음식의 ‘성공 모델’을 만들자는 취지였다.“한식을 너무 좁게 이해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음식은 늘 변하는 것입니다. 50년 전 갈비찜이 현재와 같은 모습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런데도 갈비찜 하면 지금과 같은 갈비찜이 정답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예컨대 랍스터는 한식입니까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식으로 만들고 소비하면 랍스터도 한식이 되는 겁니다(광주요의 식당에선 랍스터떡복음이라는 메뉴를 개발, 판매하고 있다). 한식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탈피해야 합니다.”이 대목에서 조 회장은 한국 지도층의 역할을 다시 강조했다. 일본의 지도층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한식에 대해 우리 지도층들이 반색을 해야 한국음식의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음식의 세계화가 필요하다는 일념 하에 자신이 이런 저런 모델을 만들어왔는데 자신의 힘은 한계가 있으니 지도층들이 나섰으면 하는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힘은 고작해야 1000명 정도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대기업 총수처럼 10만 명, 100만 명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였으면 한다는 것이다.“저는 깃발을 들고 있을 자격이 없어요. 제 힘은 부족하니까요. 대기업처럼 더 큰 힘을 가진 주체가 깃발을 들어 줘야 한국 음식문화가 세계화할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 여의치 않으면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대기업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조 회장의 주장은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설명이다. 일본이 우리의 음식을 받아들여 마치 자신들의 음식처럼 세계 곳곳에서 팔고 있기 때문이다. 타국 음식을 자국화 브랜드화해 성공시키는 재주가 뛰어난 일본이, 한국 음식을 자국화하고 있으며, 세계인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정부가 됐든 대기업이 됐든 하루라도 빨리 ‘깃발’을 들어야 한다고 조 회장은 목소리를 높였다.어찌 보면 조 회장의 대기업 역할론은 그동안의 노력이 너무나 외로운 도전이었기에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식당이며 주류 사업을 시작할 때 누구도 조 회장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기존 기업과 협 력을 시도해 봤지만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성공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직원들마저 곱게 보지 않았다. 왜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드느냐는 것이었다. 이제는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다.“사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은 독에 난 구멍 밑으로 새 사라집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투자한 만큼 남습니다. 그 문화를 향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역할을 다하고 물러난 후 누가 이 사업에 도전장을 내민다면 그 사람은 맨땅이 아니라 제가 이룬 토대 위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문화는 그런 거죠.”광주요 그룹 회장 미국 미주리 주립대 공업경영학과 졸업광주요 대표이사가온소사이어티 대표이사화요 대표이사글 변형주·사진 이승재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