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 만든 스카치위스키를 한 단어로 설명하라면 전통(heritage)으로 요약됩니다. 윌리엄 그랜트 가족이 힘을 합쳐 술을 만들었고 지금도 오너가 제품 생산과 마케팅 전반을 책임지는 가족 경영회사(Family Company) 형태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죠. 가문의 이름을 걸고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장인정신이 술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 점이 위스키 마니아들에게 호평을 받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대량 생산이 아닌 제대로 된 스카치위스키를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너부터 말단 직원까지 바로 이 한 가지 가치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스카치위스키 생산이 가능한 것입니다.”지난 3월3일 내한한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의 글로벌 수석홍보대사인 로버트 힐은 자사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간단하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힐 수석 홍보대사는 198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입사한 이래 20년째 근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장기근속 배경도 전 직원이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쳐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라고 말했다.스코틀랜드 더프타운을 지나 스페이 강과 합류되는 피딕(Fiddich)강은 스카치위스키 명산지로 유명하다. 피딕강은 유속이 빨라 플라잉 낚시로 연어와 송어를 잡는 강태공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정통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피딕 증류소도 물 맑기로 유명한 피딕강에 위치해 있다. 피딕(Fiddich)은 스코틀랜드 지역 언어인 게일어로 ‘사슴’, 글렌(Glen)은 ‘계곡’을 뜻한다.기후나 토양이 맛을 결정한다는 와인의 테루와르처럼 스카치위스키도 재료의 품질이 곧 맛을 결정한다. 힐 수석홍보대사는 “스코틀랜드 오지인 스페이사이드의 천연수 로비듀에 최상급 맥아를 사용하며 증류도 예전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고 말하고 “증류된 원액을 버번, 쉐리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켜 일정한 맛을 유지시킨 것이 우리만의 비법”이라고 설명했다. 일반 블렌디드 위스키가 호밀, 밀, 옥수수 등 곡물을 증류하는 것이라면 싱글몰트 위스키에는 맥아 한 가지만 들어간다. 더군다나 글렌피딕이 생산되는 스페이사이드는 스카치위스키 숙성에 가장 알맞은 기후, 습도를 제공한다.그는 글렌피딕의 매력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연산(Age)에 따른 다양성”을 꼽았다. 윌리엄그랜트 앤 선즈는 현재 12년, 15년, 18년, 21년, 30년산을 생산하고 있으며 스카치위스키 평론가 마이클잭슨 추모기념 40년산을 2001~2007년까지 4차례 생산했다. 40년산은 600병만 한정 생산됐으며 각 병마다 오크통 생산번호가 적혀 있다. 글렌피딕은 숙성기간 뿐만 아니라 제작 방법도 다양하다. 15년산은 셰리, 버번 오크통에서 각각 15년간 숙성시킨 원액을 솔레라 베트라는 큰 오크통에 담아두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절반만 솔레라 툰으로 불리는 새 통으로 옮긴 뒤 재 숙성해 병입한다.그는 싱글몰트 위스키에 있어 연산은 ‘기초(Fundamental)’와 같다고 말한다. 맛은 어떤 오크통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숙성기간의 한계는 극복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숙성 기간이 딱 1개월 모자란 원액이 단 1%라도 들어가는 것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고집스런 장인정신은 각종 주류평가회 수상으로 입증되고 있다. 글렌피딕은 지난해 세계 3대 주류 품평회인 IWSC(국제와인,위스키품평회), SWSC(샌프란시스코 세계 위스키 품평회), ISC(국제위스키대회)에서 모두 최고상을 휩쓸었다. ISC에서는 지난 4년간 ‘올해의 위스키 제조사’로 선정되고 있다.글로벌 경기불황으로 위스키 시장의 침체도 심각하다.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에서 온트레이드 디렉터를 함께 맡고 있는 그는 “경기 불황으로 바, 카페 등 온트레이드 시장이 위축되고 있지만 대형 마트, 주류 판매점으로 대표되는 오프트레이드 시장은 조금씩 커지고 있다”며 “소량 생산하는 싱글몰트 시장은 지금과 같은 경기 침체에도 꾸준한 성장세를 그리고 있다”고 매출 성장에 자신감을 나타냈다.현재 글렌피딕은 전 세계 200여개 국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판매량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에서는 글렌피딕 외에도 수제 몰트위스키 발베니(The Balvenie), 블렌디드 위스키 그랜츠(Grant's) 등을 생산하고 있다. 규모, 매출로 놓고 보면 디아지오, 페르노리카에 이에 세 번째다. 그는 “5대째 가족경영을 유지하면서 전통을 고집하고 있지만 마케팅 전략만큼은 늘 앞서나가고 있다“고 판매성장 비결을 설명했다. 글렌피딕은 1909년 스코틀랜드 업체들 중 처음으로 해외 수출을 시작했고 1914년에는 이미 전 세계 30개 국에 판매망을 구축해 세계화에 가장 먼저 눈을 떴다. 뿐만 아니라 1969년부터 일반인들이 증류공장을 방문해 둘러볼 수 있는 투어프로그램도 개발했다.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는 지난 1월 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법인을 설립했다. 전 세계 200여개 국에 판매되고 있지만 직접 법인을 설립해 판매에 나서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한국은 대만,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선 다섯 번째로 수입량이 많은 나라”라며 “경기가 위축된 지난해에도 18.3%나 성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글렌피딕은 올 1월 현재 국내 싱글몰트 위스키 시장의 60.5%를 점유하고 있다. 힐 수석홍보대사의 직책은 부사장(Vice president)급이며 전 세계 25명의 브랜드 홍보대사를 관리감독하는 일을 맡고 있다.글렌피딕을 설명하려면 우선 스카치위스키의 슬픈 역사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1707년 제임스 1세는 대영제국을 탄생시킨 후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술에 대한 세금를 부과했다. 이에 상당수 스코틀랜드인들은 정부의 주세 부과에 대항해 산속으로 증류기를 옮겨 밀주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1746년 영국정부는 밀주 생산을 빌미로 스코틀랜드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컬로든(Culloden)전투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로 유명한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는 대패했다. 창립자의 증조부인 알렉산더 그랜트는 이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그와 가족들은 평생 산속에서 숨어 지내며 살아야 했다. 1886년 증손자인 윌리엄 그랜트는 스코틀랜트 오지인 스페이사이드의 계곡 땅을 구입하고 여기에 7명의 자녀들과 함께 증류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글렌피딕의 출발점이 됐다.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