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뉴욕 월가에서는 선진국 자금과 개도국 자금 간에 벌이는 ‘글로벌 쩐(錢)의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21세기 들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글로벌 쩐의 전쟁은 ‘S’자형 투자이론으로 잘 설명된다. ‘S’자형 이론은 사람의 성장곡선에서 유래됐다. 모든 신기술과 제품은 시장점유율을 일일이 측정하지 않아도 서서히 틈새시장을 파고든다. 일단 소비자와 가정 속에 10% 정도가 보급되고 나면 급속히 퍼져나가는 큰 흐름을 이룬다. 즉 한 제품이 시장을 10%를 점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이후 90%를 점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같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이 이론을 각국의 경제발전단계에 적용해 보면 1인당 국민소득(GDP) 3만 달러 이상인 선진국은 중 장년기에, 1000달러에서 3만 달러에 속한 개도국과 선진 중진국은 청소년기에, 1000달러 이하인 저개발국은 유아기에 해당된다. 투자의 3원칙인 수익성·안정성·환금성으로 볼 때 선진국은 수익성이 낮은 대신 안정성이 높으나 개도국은 이와 반대다.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동성이 워낙 풍부해 선진국, 개도국 자금 모두가 환금성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투자했다. 이 때문에 선진국 자금들은 높은 수익을 쫓아 잉여자금은 펀드 형태로, 잉여자금이 없을 때에는 금리차를 이용한 캐리자금 형태로 개도국에 유입됐다.또 개도국 자금도 수익성보다는 안정성을 중시해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받았던 미국의 국채를 비롯한 선진국 자산에 투자했다. 모기지 사태 이전까지 세계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국 자금이 유출되더라도 이를 개도국 자금이 메워주는 자금흐름 메커니즘이 잘 작동됐기 때문이다. 선순환 구도로 자산시장이 최대 수혜자가 됐다.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선진국 자금은 수익성을, 개도국 자금은 안정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투자함에 따라 글로벌 쩐의 전쟁이 치열해지면 질수록 개도국보다 선진국의 자산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우리를 비롯한 개도국들이 자국의 토종자본을 육성하고 세계적인 투자은행(IB)을 만들기에 고심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하지만 이런 선순환 구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갈수록 심화되는 국제수지 불균형으로 미국 국채를 비롯한 선진국 자산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유가 상승 등으로 과잉 축적된 중동 산유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저축분이 선진국의 기업인수와 같은 실물자산으로 투자방향이 옮겨지면서부터다.그 중에서 개도국 자본이 선진국의 항만, 에너지와 같은 기간산업을 인수함에 따라 선진국들은 경제안보를 크게 위협 당했다. 이 점이 2차 대전 이후 ‘세계화’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를 외쳐왔던 선진국이 모든 경제 현안을 자국의 주권확보 차원에서 바라보는 ‘경제 애국주의’로 돌아서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최근에는 금융 분야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보호주의 움직임이 글로벌 쩐의 전쟁구도를 악순환으로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 금융 보호주의란 모기지 사태와 유가 급락 등으로 자금의 여유가 없어진 선진국과 개도국들이 자국의 자금을 움켜지는 과정에서 ‘서로 준다 못준다’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자국의 자금 회수를 놓고 벌이는 글로벌 쩐의 전쟁에서는 증시를 비롯한 자산시장이 최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미 글로벌 자산 가격은 떨어질 데로 떨어진 데다 이를 구제하기 위한 어떤 신호에도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다. 이른바 살아 있어도 죽은 시체와 같은 ‘좀비 증시’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이 이유에서다. 이 상황에서 그동안 월가의 시장참여자 사이에는 간헐적으로 거론돼 왔던 2차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2차 금융위기란 지난해 9월 리먼 사태 이후 약 2개월 동안 지속됐던 1차 금융위기에 이어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일련의 위기 조짐을 말한다. 앞으로 2차 위기가 올 경우 어떤 형태로 그 파장이 얼마나 클 것인가가 초점이다. 이 문제를 알아보려면 1, 2차 위기 주역인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거래형태, 글로벌 투자비중, 감독정도 등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론적으로 레버리지 비율과 글로벌 투자비중이 높고 감독이 소홀할수록 위기강도와 한국 등 역외국에 미치는 파장이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1차 위기의 주역인 미국의 투자은행은 고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레버리지 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투자가 선진국보다 이머징 마켓에 집중됐다. 또 고도의 파생기법을 동원하기 때문에 감독기관은 쫓아가지 못한다. 이 때문에 1차 위기 때는 그 강도가 컸고 파장도 당사국인 미국보다 역외국에 집중되는 ‘나비 효과’가 발생했다.반면 2차 위기의 주역이 될 미국의 상업은행은 투자은행에 비해 레버리지 비율과 글로벌 투자비중이 낮고 일거수일투족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감독 하에 놓여 왔다. 앞으로 2차 위기가 발생하면 그 강도는 1차 위기 때보다 적고 파장도 역외국보다 미국 내로 수렴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2차 위기가 제기된 후 미국 주가가 1차 위기 때보다 더 떨어지고 곧바로 미국경제의 ‘잃어버린 10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이 국면에 빠질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금까지 진행상황이 1990년대 일본이 겪은 ‘부동산 버블붕괴->정책대응 미숙->통화강세’ 등의 경로와 비슷하기 때문에 갈수록 힘을 얻어가는 상황이다.이미 미국경제는 공식적인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3분기 이후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지난해 3분기 -0.5%, 4분기 -6.2%의 성장률을 비교할 때 경기하강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경기하강속도가 경제주체들이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면 그 나라 경제는 ‘좀비 국면’으로 변한다.증시에 이어 경제도 좀비 국면에 놓이면 경기회복과 시스템 개선을 위해 추진하는 어떤 정책도 의도했던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정책당국은 ‘정책함정’ ‘유동성 함정’ ‘구조조정 함정’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경제주체들은 미래가 더 불투명하게 느끼는 ‘불확실성 함정’에 빠지면서 빚만 늘어나는 또 다른 ‘빚의 함정’에 놓이게 된다. 이른바 ‘5대 함정’ 논란으로 이 상황에 처하면 미국경제 회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2차 위기가 1차 위기 때와 달리 그 부담을 미국에 수렴하는 형태가 된다면 최근 들어 우리 경제와 증시의 앞날을 놓고 벌이는 ‘재추락론’과 ‘재도약론’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 그 답을 쉽게 예상해 볼 수 있다. 많은 변수가 있지만 통계기법상 요인분석을 통해 현 주가의 결정요인을 보면 대외적으로는 △외국인 향방 △미국보다 중국 증시 움직임, 대내적으로는 △성장률 추이 △경상수지 흑자여부 순으로 영향력이 큰 것으로 나온다.종전보다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외국인들은 지난해 12월 이후 순매수세로 돌아서 2월 중순까지 그 규모가 3조 원에 달한다. 물론 우리 증시에 투자하는 원인은 기초여건 개선보다 지난해 과다 이탈에 따른 저가 메리트와 환차익을 겨냥한 포트폴리오 성격이 강하다.그 후 외국인 매수세가 주춤거리면서 포트폴리오상의 메리트를 다 따먹으면 외국인들이 떠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른바 ‘먹튀’ 논란이다. 이 문제는 이번에 들어오는 외국인 자금의 주체를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종전처럼 투기성이 강한 헤지펀드나 미국계 단기자금보다 이번에는 미국계 장기자금과 엔화 자금, 화인자금이 주도하고 있어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올 들어 중국 증시도 의외로 강하다. 모기지 사태 이후 저점대비 45% 정도 올랐다. 주요인은 대규모 경기부양과 신속한 집행 등에 따른 정책랠리 성격이 짙지만 ‘미국이 어려워질수록 중국으로 몰리는 현상(rally around china)’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미래학자들은 당초 예상보다 빨리 중국 중심의 ‘팍스 시니카’시대가 올 것으로 내다본다.대내적으로는 우리 경제 전망이 가장 큰 변수다. 국제통화기금(IMF), 정부, 민간연구기관들은 올 성장률을 -2~-4%로 전망하고 있지만 투자자 입장에서 더 중요한 것은 경기순환상의 흐름이다. 정부의 분기별 성장률을 보면 2분기에 -4.1%로 저점을 기록한 후 3분기 -3.8%, 4분기 2.8%로 회복할 것으로 예상했다.또 우리처럼 외환위기의 트라우마(상처)가 있는 상황에서는 성장률 못지않게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경상수지다. 외환위기 이후 경상수지와 주가와의 상관관계를 보면 흑자일 때에는 상승, 적자일 때에는 하락했다. 대부분 기관들은 올해 경상수지가 130억 달러 내외의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아직까지 모기지 사태가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올해는 기본적으로 ‘어렵다’는 자세로 투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리 주가결정 요인을 곰곰이 따져보면 일부 비관론들처럼 그렇게 어려운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한상춘 한국경제신문 객원 논설위원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