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년부터 지난 해 초까지 달러화는 약세를 지속해왔다. 미국 경제 비중의 상대적인 약화도 문제였지만 쌍둥이 적자로 대표되는 미국경제의 취약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라크전쟁과 사회복지 수요 급증으로 재정적자가 확대되는 가운데 주택버블 등에 힘입어 가계소비가 늘어나고 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사이에 미국의 경상수지적자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나 GDP의 6%에 근접하게 되었다. 때마침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확대와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큰 폭 경상수지 흑자를 의미하는 글로벌 임밸런스(Global Imbalances)가 세계경제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면서 달러화의 미래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전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달러화 약세 전망에 따라 달러화 표시 자산비중을 조정한다거나 혹은 달러화를 거부하는 선언이 줄을 이었다. 중국 등 주요 흑자국 당국자의 입에서 외환보유고 중 달러화 표시 자산의 비중을 줄이겠다는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나왔으며 이란은 원유수출 대금으로 달러화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 등은 달러 약세로 인한 물가급등을 우려해 자국통화의 달러화 페그를 중지하기도 했다. 인도의 세계적 관광지인 타지마할 매표소에는 ‘달러 사절’이라는 표지가 나붙었으며 브라질 출신의 수퍼모델 지젤 번천은 달러화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달러화로 모델료를 받지 않고 유로화로 받겠다고 말하기도 했다.이러한 선언들이 주로 2007년 하반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이들의 환테크가 실패한 듯하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서서히 경제 전반에 번지면서 지난해 3월부터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국 통화에 대한 가중평균 환율을 지수화한 달러 인덱스를 보면 2009년 3월 현재 달러화 가치는 거의 2004년 수준으로 복귀했다.쌍둥이 적자라는 구조적인 요인으로 약세를 지속하던 터에 금융위기가 터졌고 이것이 실물부문으로 전이된 상황에서 달러화 가치는 오른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서 금융기관들의 디레버리지로 인해서 글로벌 유동성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기축통화인 달러화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금융시장 호황기에 공세적인 태도를 취해 레버리지를 늘려 투자해 온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이제 자산규모를 줄여서 건전성을 강화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자산처분 과정에서 우리 나라를 비롯한 신흥국에서 자산을 매각해 자본을 역류시키는 반면에 가계의 소비가 줄어들고 이로 인해 미국의 무역적자 폭이 줄어들면서 세계경제에 대한 달러 공급은 줄어드는 상황이다. 여기에 국제금융시장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도 달러화 강세를 부추기고 있다. 금융시장이 호조를 거듭하고 수익이 좋을 때에는 금융기관들이 잠재적인 리스크에 대해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기가 악화되고 동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채무불이행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그래도 믿을 것은 달러밖에 없다는 심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현재의 달러화 강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이번 위기의 진원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4분기 EU와 일본의 경기침체가 미국 못지 않게 심각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유로화와 엔화가 달러에 대해 약세를 나타내고 있다. 엔화의 경우 세계교역 부진과 엔화강세에 따른 수출경기 급락 위험에 내수부진 등 국내요인까지 가세하면서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에 따른 엔화강세 요인이 제약되고 있다. 유로화는 작년 하반기 약세에 힘입은 경상수지 개선 효과가 제한적인 데다 동유럽 경제위기 및 그 여파로 인한 금융 및 실물위기의 추가 악화로 인해 약세를 띨 전망이다. 반면에 달러화는 그간의 강세로 인한 수출부진 및 경상수지 약화요인이 민간소비 조정에 따른 글로벌 임밸런스 완화로 상쇄되는 상황이 지속될 전망이다. 낮은 물가상승률과 빠른 저축률 상승 등 최근 경기침체가 심화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로 인한 무역수지 개선이 달러화를 강세로 이끄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달러화 약세가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치 않다. 과거의 경험을 보면 세계경제의 성장세 측면에서 달러 약세기와 강세기 간에 뚜렷한 차이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분명한 것은 달러 강세기에 신흥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달러가 강세를 띠면 국제자본이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개도국으로부터 자금이 유출되어 개도국이 금융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1980년대 초·중반 중남미 외채위기라든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와 러시아의 채무불이행 등이 모두 달러화 강세기에 일어난 바 있다.그러나 성장산업이었던 금융산업 부문의 막대한 타격과 향후 미국경제의 느린 회복속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의 재정적자 확대 추세 등을 고려할 때 중장기적으로는 달러화가 약세를 나타낼 가능성이 크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미국 경제가 회복되고 이번 경제위기가 종료되는 조짐이 나타나면서 달러화가 약세로 전환할 가능성이 크다. 금융위기가 완화되면서 안전자산 선호현상도 약화될 것이고 금융기관들의 디레버리지가 약화되면서 미국경제의 근본적인 취약성이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일부에서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달러화가 힘을 잃고 기축통화의 자리도 내놓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제프리 프랑켈 하버드대 교수는 2022년경 달러화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달러화 시대의 종언을 이야기하기에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는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 기축통화라는 것이 경제논리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며 해당국가의 정치·군사적인 힘에도 좌우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대안 부재론도 달러화 몰락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말해준다. 달러화의 기축통화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유로화 등 여타 통화가 달러화를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달러화 약세기간에 유로화의 위상이 올라간 데에는 달러의 영향력 쇠퇴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직접적으로는 일본 엔화와 영국 파운드화의 상대적인 위상 추락에 힘입은 바 크다. 유로화의 근본적인 문제는 유로존에 속해 있는 국가의 정치 시스템과 경제시스템의 불일치에 따른 비효율성을 들 수 있다. 일본의 금융시스템이 미국보다 약하기 때문에 엔화가 기축통화 지위를 누리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위안화의 경우에도 중국이 달러화를 내대 팔아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릴 수는 있지만 기축통화로 만들만한 금융시스템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축통화로까지 올라오기는 무리라고 할 수 있다.이렇게 볼 때 향후 국제통화시스템은 달러화가 상대적인 우위를 지속하는 다원적인 시스템으로 서서히 전환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먼델이 말했듯이 달러와 유로로 통화 바스켓을 만들고 여기에 엔화와 파운드, 위안화로 점차 확대하는 양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신민영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