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의 ‘국민작가’ 폴 헉슬리의 작품은 그리스 철학과 동양 음양오행 사상을 그대로 함축한 느낌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동서양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화단에서 그는 유럽의 정통과 미국의 추상 모더니즘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작가로 통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심미적 시각을 동양으로 향한다. 구대륙과 신대륙의 초현실주의 작품 세계를 통달한 그가 아시아로까지 관심영역을 넓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아시아 투어 일환으로 내한한 폴 헉슬리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정반대의 두 가지 요소를 하나의 화폭 속에서 자연스럽게 버무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세계 포스트 모더니즘계의 이 같은 찬사에 대해 그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상은 두 가지 존재가 하나로 승화되는 장소”라며 “색감과 면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통해 경쾌한 하모니를 연출할 뿐”이라고 설명했다.아직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폴 헉슬리는 영국은 물론 유럽에서 화제를 몰고 다닌 유명 작가다. 왕립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하면서 오늘날 영국이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우뚝 솟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왕립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위촉됐고 귀중품 출납관으로 왕실과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왕립아카데미 교수로 재직 시 그가 길러낸 작가로는 세계 현대 미술계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yBa(Young British Artist) 멤버 디노스 챕멘, 트레이스 에민, 크리스 오필리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오늘날 세계 현대 미술계의 거목으로 제자들을 길러낸 비결을 묻자 그는 “워낙 뛰어난 인재들이 모였던 곳이라 나 자신도 행운아”라면서 “학생들에게 나 자신의 예술세계를 설명하려기보다는 각자 잠재된 창의성과 예술성을 맞춤형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지난 2004년 레드맨션 재단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 그는 중국 한자와 자신의 작품 세계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는 “중국, 일본에서 유학 온 제자들 중 상당수가 나의 작품을 보면 아시아가 느껴진다고 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2004년 중국을 방문해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 이후 그는 한자를 모티브로 한 중국시리즈를 진행 중이다. 중국 시리즈를 통해 그는 동양, 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다. 가령 한편에는 한자로 된 ‘흑(黑)’이 써 있고 반대편은 검은색으로 칠한다. 그에게 문자는 의미보다는 디자인적인 요소다. 그러면서도 “나의 작품에 그려진 문자를 하나의 개념으로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흑자 옆을 파란 색으로 채운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스스로가 자신을 ‘파란 눈을 한 중국 팝아티스트’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음, 양을 기반으로 한 주역과 태극문양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성질이 하나가 되고자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에너지를 그 역시 캔버스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표현하고 있다. 아시아 작가들의 강점에 대해 그는 “사고의 폭이 굉장히 넓다”며 “백남준을 제외하고는 한국 작가들을 별로 알지 못했지만 이번 내한기간 동안 한국 작가들과 작품을 둘러보니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에게 태극기와 태극 문양이 그려진 인쇄물을 다시 보였더니 “앞으로 작품에 반드시 반영하겠다”며 굉장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즐거워했다.폴 헉슬리 개인전: 3월 6일~4월 7일논현동 워터게이트 갤러리(02-540-3213)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