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적 경기 불황의 그늘에서 미술 시장도 자유롭지 못했다. 많은 미술 애호가들은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엔 어떤 작가와 그림에 주목해야 하는지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대안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우선 ‘안정성’을 꼽을 수 있다. 대개 미술품 투자 측면에서 안정성이 있는 작가로는 소위 ‘블루칩 작가’를 일컫는다. 이미 시장의 검증이 끝났고, 폭넓은 지지층을 갖고 있으며, 어느 정도 최소한의 환금성도 갖춘 작가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국내 작가의 경우 작고 작가, 혹은 원로 중진 작가 몇몇에 국한됐었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해외의 유명 작가에게 관심이 쏠린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빠른 속도로 국제 미술 시장이 평준화되다 보니 작가에 대한 평가 기준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가령 국내외의 미술 시장에서 고른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는 섭외 1순위다. 나이나 학력, 출신, 경력 등 외부적인 요인보다 작가적 이념과 독창성, 창의력 등 무형의 비전을 더욱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예쁘고 장식적인 것에 눈길이 쏠리던 불과 몇 년 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저런 작품도 팔릴까’라는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만의 독창성을 지닌 작품이 경쟁력을 얻고 있다.너도나도 움츠린 불황의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지혜롭게 실리를 취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미술품 투자를 너무나 거창하게 생각했던 사람일수록 요즘처럼 힘든 상황은 견디기 힘들 법하다. 하지만 미술이나 미술품이 지친 일상에 활력소를 제공해 주는 산소 같은 존재로 여겼던 진정한 애호가들은 경우가 다르다. 아마도 좀 더 좋은 조건으로 평소 원하던 작품을 얻을 수도 있고, 앞으로 더 큰 비전을 보여줄 만한 작가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남다를 것이다.이번 호부터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할 예정이다. 각 장르와 성별, 국적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눈여겨볼만한 작가를 추천해 프로 미술 애호가의 길로 들어서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뜻에서다. 이이남의 작품만큼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예가 또 있을까. 그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영상 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점이다. 그는 발상부터 다르다. 비록 작품의 모태를 평면성에 두고 있지만 적절한 시간과 움직임을 가미해 공간예술로 승화했다. 하지만 그 동영상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평면적인 이미지로 회귀한다. 마치 윤회의 공전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그리고 첨단 과학과 고전이 만나는 창의적인 역발상이 돋보인다. 하이 테크놀로지와 고전의 전통성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한 몸에 붙어 있지만 결코 마주볼 수 없는 숙명처럼, 결코 쉽게 융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예가 많다. 그 전통적인 고전을 숙주로 전혀 예상 밖의 새로움을 창조해 냈다. 여기에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로벌 노마드(Nomad) 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초기 작품이 우리의 고전 이미지를 차용했다면 최근엔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동서양의 친숙한 명화들은 그의 영상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을 이룬다. 다른 시대적 배경이나 여건은 그의 창의적인 자유의지 앞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이강욱의 회화에서 빛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화면 전체에 고르게 깔린 크고 작은 유리구슬들은 빛을 흡수하거나 난반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특히 작품의 장식적인 면모는 바로 빛과 구슬의 만남으로 완성된다. 전체적인 느낌은 우선 부드럽고 차분함이다. 아마도 부드러움의 시작은 작은 구슬의 표면이겠지만 시각적인 재미와 율동감을 더해주는 것은 자유롭게 유영하는 곡선일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점점이 이어진 작은 흔적들, 그것은 마치 꽃봉오리를 막 떠난 어린 벌 한 마리의 공중곡예 행로를 좇는 듯하다. 파닥이는 날갯짓에 꽃가루들이 점점이 떨어져 꽃향기의 파편들이 방울방울 구슬에 맺힌 것처럼 달콤함을 풍긴다. 매력적인 그림에선 가끔 좋은 향기가 난다. 이강욱의 그림이 그렇다. 자유롭고 무질서하게 펼쳐 놓았지만, 그 우연함 속에서 모종의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작가의 꼼꼼한 작품 제작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친다. 먼저 캔버스 바탕에 미시 현미경 사진 같은 어렴풋한 이미지를 앉힌다. 그 위에 반투명 흰색 물감을 칠해 바탕의 이미지가 희미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 과정에서 밝고 차분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여기에 연필이나 펜 등으로 자유분방한 드로잉 선이 가미된다. 이 선들이 등장함으로써 긴장과 완화, 응축과 팽창, 집중과 확산 등의 다양한 감성이 생겨난다. 최종적으로 미세한 큐빅이나 유리구슬이 골고루 화면 전체에 뿌려지고 반짝이는 소재를 뿌려 마무리한다. 이로써 미지의 정신적이고 명상적인 배경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생명의 배는 유영을 시작한다.지용호의 뮤턴트(mutant) 시리즈는 마치 다종 교배로 태어난 괴상한 동물의 형상을 지녔다. 그것은 ‘육식동물, 초식동물, 잡식동물, 절지동물, 어류 등’ 매우 다양한 종을 구성하고 있지만 결국 ‘교배종’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초기의 단일한 종의 변이 형태를 넘어 점차 여러 군의 동물이 한꺼번에 교배된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가령 2000년대 초반엔 한 가지 동물 패턴에서 적당히 왜곡한 공격적인 포즈와 근육 표현으로 출발했다면, 지금은 순종적으로 길들여진 개의 몸통에 거칠고 야생적인 독수리의 머리가 합쳐진 변종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는 격이다. 온몸에 검은색 폐타이어를 외피 삼아 뒤덮은 돌연변이는 전체적으로 하나같이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인 인상이다. 하지만 작가의 메시지는 그것이 다가 아니다. 바로 그 변종들의 눈빛을 놓쳐선 안 된다. 아크릴 구슬로 표현된 이 동물들의 눈빛은 순수한 아기의 영혼을 보는 듯 맑고 깊으며, 심지어 불안정한 심리마저 숨기지 못해 서글퍼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는 바로 강약, 외면과 내면, 공격성과 순종 등 상반된 감성의 혼재가 결국 우리 자신이 숨기고 싶었던 심리적 진정성은 아닐까 묻고 있는 듯하다. 타이어가 자신의 온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쉼 없이 달려야만 살 수 있는 숙명을 갖고 태어났다면, 인간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죽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열정을 불태운다. 지용호가 폐타이어로 보여주는 제3의 변종들 역시 결국 우리 인간의 또 다른 자화상은 아닐까.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