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에 도전하는 조각가 박선기
과 투명 낚싯줄. 예술과는 별로 연관 없어 보이는 소재이지만 ‘숯 작가’로 불리는 조각가 박선기 손에 거듭난 모습은 결코 그렇지 않다. 줄에 꿰어 매달린 숯덩이가 만들어 내는 형상은 고층 빌딩의 로비에서도, 럭셔리한 명품 매장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공간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작품은 굳이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왕왕 발견된다. 편집 매장 ‘분더숍(Boon The Shop)’, 양주 레이크우드CC, 삼성물산 본사 로비 등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숯 대신 투명 아크릴을 커팅해 매단 지난 시즌 서울 신라호텔의 크리스마스 장식과 샹들리에처럼 매달린 현재의 로비 장식도 박선기의 작품이다. ‘숯 작가’라는 닉네임 외에 따라붙는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스페인 이비자 그랑호텔(Ibiza GranHotel), 아랍에미리트 왕자의 저택에도 그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그가 숯을 소재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이탈리아 밀라노의 브레라 국립미술학교로 유학 간 이후인 1995년부터. ‘왜 숯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시시하다.“경상북도 선산이 제 고향입니다. 산골에서 살다 보니 어려서는 자연이 친구와 다름없었죠. 특히 바람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작품으로 표현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나무로 작업하고, 돌을 매달아 보기도 하다가 자연스레 숯을 활용하게 된 겁니다.”바람을 좋아하는 경상도 사나이답게 그의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유학 초기부터 화상의 눈에 띄어 밀라노 로렌스 루빈(Lawrence Rubin) 갤러리에 전속돼 최근까지 9년 여간 관계를 맺었고 유럽 지역에서 이름이 꽤 알려지는 등 탄탄대로를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러나 ‘3일마다 결심을 했다’는 말에서 작가로 살아남기 위한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고 작가적 고뇌도 적지 않았음이 짐작된다. 작품이 설치된 곳이나 전시회가 열렸던 곳을 세계 지도에 점으로 찍었을 때 밀도가 나날이 높아지는 요즘도 이전의 작업 태도와 다르지 않다. 좋은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의 기준은 예술성이나 천재성이 아닌 끈기를 가지고 얼마나 노력하느냐의 여부에 있다고 여기는 그는 쉼 없이 손을 움직이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어떤 특정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신중히 작업하는 것도 좋지만 다작만큼 쉬운 길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훌륭한 작품은 작품 속에 실수가 없습니다. 치밀하게 따져서 표현할 만큼만 표현하고, 재료의 선택과 양을 조절해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많이 만들어 보는 수밖에 없죠. 엄밀히 말하자면 눈과 머리와 손, 이 세 가지가 잘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조각은 재료의 물성과 조형적인 요소가 중요하기 때문에 길을 다니면서도 건물, 창문 크기, 보도블록 등을 유심히 보는 편이에요. 기둥이나 계단, 테이블과 의자 등을 형상화하다 보니 건축이나 가구 디자인에도 관심이 있어서 많이 보면서 눈으로 익히죠. 어떤 소재를, 어느 정도 두께로, 비례를 어떻게 했느냐 하는 미세한 차이에 의해 작품의 완성도가 달라지거든요. 작업 시간은 정해 놓고 하는 편이지만 평상시에도 작품에 관한 생각을 놓지 않으니 눈, 손, 머리가 늘 깨어 있는 셈이죠.”고향인 선산, 미술대 진학과 함께 상경한 서울, 그리고 유학을 떠난 밀라노는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특히 11년간 지낸 밀라노는 작가로서 꽃망울을 터뜨린 곳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2003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진 이후부터는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바람을 좋아하는 경상도 사나이’ 박선기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나니 좋아서’ 귀국을 결심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더 자주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2005년 김종영 미술관의 ‘오늘의 작가’에 선정된 데 이어 2007년에는 김종영 조각상을 수상했고, 이를 기념한 전시가 지난 1월 초까지 김종영 미술관에서 열렸던 것. 이때에는 이전의 숯 작업 대신 2005년에도 선을 보였던 ‘시점 놀이’를 변형한 연작을 선보였다. 사물을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을 작품화했다.“조각은 원근법이 필요 없죠. 입체니까요. 그런데 거기에 시점을 넣은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면에서만 그 형태가 제대로 보이고 다른 쪽에서는 일그러져 보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어서 한 방향에서만 대상을 보고 말아요. 그런데 그 형태를 일그러뜨리면 불안하고 불안정해 하면서 다각도에서 사물을 보게 되죠.”정면에서 보면 부피감이 느껴지고 옆면에서 보면 얇은 두께로 된, 평면과 다름없는 입체감 있는 회화적 조각이자 부조처럼 보이지만 환조인 작품 속에서 작가의 위트가 느껴진다. 이처럼 전통적인 원근법에 대한 도전장을 내민 작가라면 폴 세잔이 대표적. 꽃병, 설탕 단지, 과일 바구니, 바구니 속 과일을 모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렸기에 완성된 정물화를 보면 테이블 위에서 과일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고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원근법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단일한 시점에서 벗어나 눈이 본 대로 그리기 위해 각각의 사물이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분석해 그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선기의 ‘시점 놀이’는 세잔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원근법이라는 한계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설적으로도 그는 원근법을 이용한다. 원근법을 활용해 평면에 가까운 조각을 입체로 보이게 하지만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이내 실재가 탄로나게 하는 것. 중밀도섬유판(MDF) 소재로 만든 작품의 표면 처리 변주도 흥미롭다. 색을 칠하기도 하고 나무를 태워 숯처럼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연필로 칠하기도 한다. 어느 미술 평론가가 그의 작품을 가리켜 “이 물체를 만드는 과정은 장인적 몰입과 수도자의 엄격한 수행에 필적하는 노동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은 아마 연필로 채색하는 작업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새로운 곳은 언제나 잘 알지 못하는 약간의 두려움과 흥미로운 호기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두려움을 떨쳐내는 건 시간을 가지거나, 아니면 나의 용기가 필요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곳 사람들의 친절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곳에 가면 제일 처음 하는 일이 길거리 커피숍에 앉아 주변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멍하니 두 시간 정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면서 적응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적응 시간이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들이죠.” 새로운 장소에 갔을 때 처음 떠오르는 느낌을 물은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작품에 임하는 자세에 대한 물음의 답변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을 듯하다.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원근법을 활용해 평면에 가까운 조각을 입체로 보이게 하지만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이내 실재가 탄로나게 하는 것.©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