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SC제일은행 부행장

선주 SC제일은행 부행장은 고교 시절 청소년 국가대표를 지낸 농구 선수 출신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고 때까지 농구밖에 몰랐던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1971년 제일은행 실업팀에 입단했다. 하지만 성인 무대는 청소년 대표시절과 확연히 달랐다. ‘농구 선수로는 상대적으로 단신(163cm)인 내 키로 국가대표 선수까지 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결국 입단 1년 만인 1972년 일반 은행원으로의 전직을 신청했다. 그로부터 37년 동안 김 부행장은 제일은행뿐만 아니라 국내 은행권에서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고 있다. 1981년 제일은행 최초 여성 책임자(대리)에 뽑힌데 이어 국내 은행 최초 여성 지점장(1995년), 국내 최초 여성 임원(2004년)의 화려한 경력이 김 부행장의 이력서를 채우고 있다. 지금은 은행권에서 우먼 파워가 거세지만 김 부행장이 입행하던 당시 여성 직원은 입사 때 결혼할 경우 퇴사한다는 ‘각서’까지 쓰던 시절이었다. 실제 김 부행장이 대리급인 책임자로 승진하자 인사에 불만을 품은 일부 남자 직원들의 항의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농구만 해 온 사람이 일반 행원으로 전환할 때는 당연히 두려움이 컸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변신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한번 부딪쳐 보자고 결심했어요. 이후 대주주가 뉴브릿지캐피탈과 스탠다드차타드(SC)로 바뀌는 과정을 겪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학력보다 실적과 실력을 중시하는 외국계 문화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실제 김 부행장은 평소에는 털털한 성격이지만 업무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추진력을 자랑한다는 게 직원들의 평가다. 본인도 업무 스타일이 ‘터프’한 편이란다.“일단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밀고 나가는 편입니다. 은행권에서 드문 여성 임원이다 보니 평소 ‘객관적으로 나의 차별점은 무엇인가’라는 고민도 많이 해요. 그래서 동료나 후배들로부터 부족한 부분을 배우기 위해 대화를 많이 하고 업무도 현장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고객과의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 오래전부터 시작한 골프에서도 김 부행장의 이런 성격은 고스란히 나타난다. 핸디캡 11인 김 부행장은 드라이버 비거리가 웬만한 남성 주말 골퍼를 능가한다. 남성 고객과 동반 라운드 시에도 레귤러 티에서 함께 티오프할 정도다.“술자리나 여러 가지 모임을 통해 고객과 네트워크를 구축해가는 남성에 비해 여성들은 한계가 있죠. ‘어떻게 하면 이런 부분을 상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골프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대리 시절부터 골프를 배워 차장 때부터 본격적으로 라운딩을 시작했죠. 드라이버 비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농구를 한 영향인 것 같아요.”최초의 수식어를 달고 다닐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려왔지만 지난 10년 동안 은행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는 과정에 적응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외환위기 직후 뉴브릿지로 넘어간 이후에는 1만 명 가운데 5000명에 달하는 동료들이 순차적으로 구조조정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외환위기의 애환을 보여줬던 ‘눈물의 비디오’가 우리 얘기였어요. 스탠다드차타드가 인수한 후에도 또 한 차례의 태풍을 겪었죠. 1971년 입사 후 27년 동안 겪었던 것보다 외환위기 이후 변화가 훨씬 컸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외국계 경영진으로부터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대충대충 문화가 없어요. 회의가 많은 편인데 사전 준비와 과정에 굉장히 철저해요. 개인이든, 조직이든 철저히 성과로 평가하죠. 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외환위기 직후 뉴브릿지 임원들과 회의 때마다 시달리던 영어 스트레스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점이에요”현재 김 부행장이 책임을 맡고 있는 CB오퍼레이션은 기존 영업점에서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오피스 업무를 한곳에 집중화한 시스템이다. “과거에는 영업점 직원들이 세일즈보다 여신을 위한 각종 서류 작업에 50% 이상의 시간을 허비했어요. 똑같은 업무를 전국 영업망에서 반복하던 프로세스를 한곳으로 통합하면서 영업력 개선뿐만 아니라 비용 절감 효과도 거두고 있습니다.” 실제 SC제일은행의 CB오퍼레이션 집중도는 2001년 13% 수준이었으나 2009년 2월 현재 70%까지 올라왔다.지난해 국내 대형 은행들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을 당시 SC제일은행은 위기에서 비켜나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글로벌 경기 침체로 내부적으로는 현 상황을 ‘데프콘(방어준비태세)’으로 규정하고 예의주시하고 있단다.“그동안 공격적으로 몸집 불리기를 하지 않아 다른 시중은행과 달리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쟁 은행들이 보수적으로 돌아선 올해가 역량 강화를 위한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영국 본사로부터 1억 달러를 지원받아 국내 영업점을 확장, 재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고객과의 접점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한국 사회의 엄격한 유리 천장과 끊임없이 부딪쳐야 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 국내 금융권에서도 여풍이 거세다. 후배들의 진출을 지켜보는 김 부행장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약진은 일정 순간까지는 수면 아래 가려져 있다가 폭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 전환점이 199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는 인사고과를 해보면 기준을 통과하는 책임자급 승진 대상자의 60%를 여성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어요. 오히려 남성 역차별 얘기가 나올 정도죠. 그렇지만 간부급 후보군에서는 준비된 여성 인력이 많지 않습니다. 회사의 방침도 여성 지점장을 적극 배출하려고 하지만 대상 인물이 많지 않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뛰어난데 네트워크와 정보 구축 등에서는 여전히 남자 동료들에게 뒤지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통찰력이 다소 부족한 것 같아요.”김 부행장은 후배 금융인들에게 금융의 만물박사가 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희생해 가면서 업무에 매진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앞서 갈 수 없다”며 “전문 자격증 등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높이면서 네트워크를 충실히 다져 놓는다면 앞으로 국내 금융계 여성 임원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글 김형호·사진 이승재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