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벌 경제 위기로 달러 가치가 추락하면서 엔화 강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일본의 자동차 전자 등 주요 수출 기업들은 지난해 대규모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동시 불황에 ‘엔고’라는 악재까지 설상가상으로 겹치면서 일본 경제에 ‘어닝 쇼크’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40%나 급등했다. 작년 말엔 엔화 가치가 한때 달러당 87.13엔까지 올랐다. 1995년 7월 이후 13년 5개월 만에 최고치다. 가파른 엔고로 도요타자동차 등 일본의 수출 기업들이 타격을 입자 일본 정부는 2004년 3월 이후 중단했던 외환시장 개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엔화 가치가 오르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적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한 안전 자산 선호 현상 때문이다. 그로 인해 소위 엔 캐리 트레이드(싼 이자의 엔화를 빌려 고수익의 외화 자산에 투자하는 것) 자금이 청산되고 있다. 초저금리의 일본을 빠져나가 해외 채권이나 주식 등에 투자됐던 돈들이 일본으로 되돌아오면서 엔화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그 배경엔 일본 엔화가 세계에서 그나마 안전한 통화라는 ‘신뢰’가 깔려 있다. 일본의 경영 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 박사는 엔화가 신뢰받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일본 국민들은 1400조 엔의 금융자산을 갖고 있는 데다 저축률도 높다. 둘째, 1990년대 워낙 심각한 거품 붕괴를 맛봤기 때문에 일본은 2000년대 들어 미국이나 유럽처럼 부동산 버블이 생기지 않았다. 셋째, 일본은 대외 채무가 거의 없는 나라다.”또 국제 유가 하락도 엔고를 부추기고 있다. 전통적으로 국제 유가와 엔화 가치는 상관관계가 깊다. 과거 통계를 보면 원유 가격과 엔화 가치는 반대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의 수입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예컨대 국제 원유 값이 떨어지면 일본은 수입액이 줄어 무역 흑자 규모가 늘어난다. 무역 흑자가 는다는 건 일본에 달러가 많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상대적인 엔화 가치는 올라가게 된다. 반대로 원유 가격이 올라가면 일본의 수입액이 늘어 무역수지가 악화된다. 그만큼 일본으로 들어오는 달러가 줄어 엔화 가치는 떨어진다. 실제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원유 값이 급등했을 때 엔화 가치는 급락했다. 최근 엔화 가치 급등은 국제 유가 급락의 영향이기도 하다는 얘기다.어쨌든 엔고 때문에 일본의 주요 기업들은 요즘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올해 3월 만료되는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결산에서는 도요타자동차 소니 도시바 등 일본을 대표하는 간판 기업들이 줄줄이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소니의 경우 지난 회계연도에 1000억 엔(약 1조5000억 원)가량 영업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소니는 지난해 10월 전망에서는 같은 기간 중 2000억 엔의 흑자를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니가 영업 적자를 기록하는 것은 1994 회계연도 이후 14년 만이다. 또 1958년 증시 상장 이후 두 번째다.소니의 적자는 금융 위기가 심각해진 지난해 가을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액정 TV 등 주력 제품의 판매가 급감한데다 엔고 현상으로 채산성이 크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소니는 전체 매출의 80%를 해외에서 내고 있다. 엔화 동향에 따라 실적이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소니는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가 1엔 내리면 연간 40억 엔의 영업이익이 감소한다. 작년 하반기에 소니는 엔·달러 기준 환율을 달러당 100엔으로 잡았지만 급격한 엔화 강세로 평균 90엔선으로 떨어졌다.소니가 전자부문의 판매 부진으로 적자를 내기는 상장 이후 처음이기도 하다. 1994년 적자는 당시 소니가 진출했던 미국 영화 산업의 부진에 따른 일시적 손실이 주요인이었다. 현재 소니는 TV 등의 재고가 많아 1~3월 중 재고 처리 실적에 따라서는 영업 적자 폭이 2000억 엔대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도시바 역시 반도체 시황 악화도 7년 만에 큰 폭의 영업 적자를 낼 것으로 보인다. 수주 급감으로 반도체 사업에서 수익성이 크게 악화돼 당초 1500억 엔 흑자 전망에서 1000억 엔 초반대의 영업 적자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원자력발전 사업이나 디지털 가전 사업은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반도체 사업 부진을 만회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히타치나 NEC 샤프 등도 반도체와 전자제품 판매 부진, 가파른 엔고의 영향으로 실적 전망을 줄줄이 하향 조정하고 있다.앞서 전 세계 자동차 판매 급감과 엔고로 고전하고 있는 일본 최대 회사인 도요타자동차도 2008 회계연도에 1500억 엔의 영업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난해 말 발표했다. 도요타가 영업 적자를 내기는 결산 실적을 공표하기 시작한 1941년 이후 처음이다.그렇다면 앞으로 엔화 가치는 어떻게 움직일까. 상당수 전문가들은 당분간 엔고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경제연구센터는 ‘2009년 일본 경제 전망’에서 “달러에 대한 엔화 가치는 2008년 말 대비 10% 정도 더 상승해 달러당 80엔까지 갈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이 센터는 엔화 추가 상승의 근거로 엔화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제 유가가 금년에도 약세를 지속할 것이란 점을 들었다.한국의 산업은행 경제연구소도 최근 ‘미국의 제로 금리 선언과 최근 엔화 강세’라는 보고서에서 “2009년에도 엔화 강세는 계속될 것”이라며 “1분기(1~3월)중 엔화 환율은 달러당 80엔을 밑돌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보고서는 “미국은 양적완화 정책으로 통화량 급증이 예상되는 반면 일본은 통화량이 안정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며 “또 작년 초 3.75%포인트에 달했던 미국과 일본의 기준금리 차이가 사라진 것이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도 가속화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엔고가 지속될 경우 일본 정부의 대응이 주목된다. 세계 동시불황으로 판매 부진에 애를 먹고 있는 일본 수출 기업들은 엔고까지 겹쳐 그야말로 ‘더블 펀치’를 맞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일본은 작년 말 가파른 엔고를 막기 위해 0.3%였던 기준금리를 미국처럼 제로(0) 수준인 0.1%로 낮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고가 멈추지 않는다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엔고를 저지하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것이다.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은 지난해 말 기자회견에서 “엔화 가치 추이를 지켜보면서 외환시장 개입을 포함해 적절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2004년 3월 이후 외환시장에 개입해 오지 않던 일본 정부가 ‘시장 개입 가능성’을 시사한 건 이례적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일본 간에 ‘통화 전쟁’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일본 기업인들의 경기 전망도 밝지 않다. 일본 주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10명 중 8명은 일본 경기가 내년 이후에나 바닥을 통과해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이 최근 주요 기업 30개사의 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0%인 24명이 경기 저점 시기를 ‘2010년 이후’로 내다봤다. 금년 중 바닥을 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5명에 불과했다. 도쿄신문이 주요 208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서도 경기 회복 시기와 관련, 82.1%가 ‘내년 이후’를 꼽았다.요미우리 설문 조사에서 현재의 경기 상태를 묻는 질문엔 28명이 ‘확실하게 후퇴’, 2명이 ‘완만하게 후퇴’라고 응답했다. 1년 전 비슷한 조사에서는 ‘경기가 후퇴하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경기 회복을 위한 조건으로는 27명이 ‘미국 경제의 회복’을 꼽았다.금년 일본 경제의 실질성장률에 대해서는 12명이 ‘마이너스 1%보다 낮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등 29명이 마이너스 성장을 예상했다. 일본 정부는 2009년 실질성장률 공식 전망치로 0.0%를 제시하고 있다.1990년대 ‘10년 장기 불황’을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긴 호흡의 회복세를 보이던 일본 경제가 다시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모습이다.차병석 한국경제신문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