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 읽어주는 화가.’ 화가 박희숙에게는 늘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캔버스와 인쇄 활자로 세상과 소통하길 즐긴다. 대상은 관람객이 될 수도 있고 독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만 있다면 대상은 아무 상관없다.지난 몇 년간 박희숙의 관심은 온통 ‘창’에 쏠려 있다. 그에게 창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물체이자 ‘나와 너’,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대상이다. 창을 넘어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두려움에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일반 군상을 그는 창으로 표현해 냈다.최근 그녀는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동안 선보인 창의 대상은 고독, 길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에 국한돼 있었다. ‘인간 존재의 이유’, ‘내가 가야 할 길’처럼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 작품 경향만 놓고 보면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삶의 지표를 찾아 방황하는 소시민의 고뇌를 그는 창이라는 경외의 대상으로 승화했다. 그러나 모든 숙제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바라볼 때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창을 이제는 동경과 소망의 대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는 이번 9번째 개인전의 주제를 ‘동경’으로 선택했다.피카소의 그림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근대 추상화의 기초를 다진 그의 그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미술 초보자들에겐 커다란 부담거리다. 그러나 정작 피카소 자신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과 그림을 바라보라”고 외친다. 피카소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박희숙이 이번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은 ‘과거 순수했던 우리 영혼’이다. 지금까지 그가 미래와 실존의 가치를 창에서 찾았다면 이번 작품은 철저히 지나 온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창에 비친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제 어린 시절이요? 거침이 없었죠. 물론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요.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회적 관습과 굴레가 서서히 저를 옭아매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당찬 모습이라곤 사라진 그저 그런 사람이 됐습니다.”그에게 창문 밖에서 뛰놀고 있는 10대 소녀 박희숙에게 말을 건넨다면 어떤 말을 하겠느냐고 물었다.“꿈을 키우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릴 적 저는 만화와 소설에 푹 빠져 있던 문학 소녀였습니다. 지금의 독서 습관도 그때 키워진 것 같습니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네요. 다큐멘터리 작가 어때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면 꼭 해보고 싶은 직업이에요.”그의 작품에는 산과 꽃, 달, 창문 등 우리의 감성을 사로잡는 대상이 자주 등장한다.“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제게 산이라는 존재는 정신적인 지주입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 있고, 어떤 대상일 수도 있죠. 산을 보면 왠지 편안함과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꽃은 변화무쌍함을 상징합니다. 아름답지만 시간이 지날 때마다 변하는 그 어떤 대상이죠.”그는 명화 칼럼을 쓰는 미술 전문 칼럼니스트로 유명하다. 미술계 거장들의 내면을 잘 분석한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라는 책을 지난 2004년 출간하기도 했다. 그림과 글이라는 두 가지 매개체를 넘나들며 작가들의 심리 상태를 여러 각도로 분석했다.글과 그림이라는 두 가지 매개체를 넘나드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훌륭한 비평가가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듯이 현직 작가가 남의 그림을 평가한다는 것 역시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작업 시간을 정확하게 나누는 편입니다. 글을 쓸 때는 글만 생각하고 붓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두 작업 모두 제게는 매력적입니다. 글이 세상과 나, 독자와 나를 연결해 주는 통로라면 그림은 나 자신과의 소통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긴장감도 생기게 되고 작품 활동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작품 스타일이 어떻게 바뀌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밝은 색상을 많이 사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존재 등의 철학적인 성찰을 수없이 되뇌던 때 그의 작품은 어두움과 침울함이 전체적인 색상을 지배했다면 이번 동경에서는 동심의 세계로 바라본 밝고 희망찬 세상이 캔버스에 옮겨져 있다.“어릴 적을 떠올려 보세요. 꿈으로 가득 차고, 소유에 대한 열망도 그다지 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굴레 앞에 놓인 우리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가 돼 있죠. 제 그림을 보면서 관객들의 희망을 찾을 수만 있다면 전 그것으로 만족합니다.”그의 작업 공간은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책들마다 그녀의 손때가 묻어 있다. 실제로 그녀는 1주일에 6~7권 이상의 책을 읽는 독서광이다. 경제 서적에서부터 만화책까지 장르 구분도 없다. 요즘 읽은 책은 랜디 포시가 쓴 ‘마지막 강의’와 재즈의 여왕 빌리 홀리데이의 일대기를 그린 ‘빌리 홀리데이(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다. 특히 빌리 홀리데이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무척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이 여자의 삶 자체가 ‘비주류’예요. 미국에서 여자가 재즈를 부른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죠. 그런데 흑인입니다. 비주류의 설움을 딛고 일어선다는 부분이 읽는 이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제 인생이 비주류여서 그런 게 아닐까요?”(웃음)언제쯤 그녀는 창밖으로 나올까. ‘동경’ 이후 그녀의 창에는 어떤 것이 비춰질까.“다음번 작품에는 좀 더 세상 밖으로 나가 있을 겁니다. 지금은 몸이 반쯤 나갔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채색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것만 봐도 소녀는 ‘기대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창밖을 나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밖에는 역동적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그림 읽어주는 화가박희숙박희숙 개인전주제 : 창 시리즈-동경일시 : 2008년 12월 17~23일장소 : 인사동 가야갤러리동경-2, Oil on Canvas, 116×91cm,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