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11월 1일 일본 요요기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J리그 나비스코 컵 결승전. 이날 경기는 만년 하위 팀 오이타 트리니티가 전통의 강호 시미즈 에스펄스를 2-0으로 꺾는 이변으로 막을 내렸다. 오이타가 J-1리그(1부)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은 창단 이후 14년 만에 처음. 그동안 오이타는 1, 2부 리그를 오가는 ‘그저 그런’ 팀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모기업도 없고 평평한 마운드밖에 없던 야구장에서 훈련하던 오이타가 J리그 패권을 차지하자 일본 언론은 빠찡꼬 기업 마루한의 한창우 회장을 숨은 공로자로 꼽았다.오이타와 한 회장의 인연은 지난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이타 구단주가 찾아와 “한 번만 도와 달라. 우리 팀의 재정이 너무 어려운데 스폰서가 돼 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하자 60억 원을 쾌척한 것이다. 그는 “제대로 된 후원 기업도 없이 맨땅에서 시작한 오이타의 사정이 내 옛날 모습과 너무 비슷했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곳에 (돈을) 지원해 주는 것은 한 푼도 아깝지 않다”고 후원 배경을 설명했다.한창우. 그는 일본에서 ‘빠찡꼬 제왕’으로 통한다. 올 7월 포브스 일본판은 ‘일본의 억만장자(日本の億万長者)’라는 커버스토리로 일본 부호들을 소개했는데 여기서 한 회장은 개인 재산 1700억 엔(2조2415억 원)으로 전체 17위에 랭크됐다. 한 회장의 재산은 지난해 조사 때의 1320억 엔(22위)에서 28.8%나 늘어났으며 이로써 그는 4년 연속 일본 30대 거부 리스트에 올랐다. 참고로 지난해 1위를 차지했던 한국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재산은 6960억 엔에서 5100억 엔으로 줄어 4위로 내려갔다.특히 일본의 부호들은 대부분 상장 기업들의 오너인데 비해 마루한은 비상장 기업으로 자산의 대부분을 한 회장 일가가 보유하고 있다. 더군다나 빠찡꼬는 현금 장사다. 이 때문에 그의 실제 자산은 일본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금 동원 능력으로만 보면 재외 동포들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이런 한 회장이지만 그가 대중에게 모습을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언론과 거의 접촉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를 인터뷰한 매체는 뉴욕타임스 포브스 파이낸셜타임스 등 해외 유명 언론과 국내 일간지 몇 곳뿐이다. 이번 MONEY와의 인터뷰도 1년여의 끈질긴 섭외 끝에 모처럼의 방한 일정 중 몇 시간을 할애해 숙소인 제주 중문단지 내 한 호텔에서 이뤄졌다.좀체 만나기 힘든 대부호를 만난다는 생각에 다소 긴장한 채 그의 호텔 방문을 여는 순간 한 회장에 대해 그동안 갖고 있던 이런저런 선입견이 일시에 없어졌다. 기자가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지인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손수 담고 있었다. 수십 개나 되는 쇼핑백에 지난 5월에 있었던 창립 기념식 행사 CD와 자신의 일대기를 쓴 책, 포브스 일본판 등을 넣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던 그는 기자에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인터뷰는 요거 다 하고 시작합시다”라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수행 비서 없이 다니는 것으로도 일본 비즈니스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세계 그 어느 곳을 방문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해외 출장을 나갈 때도 자가용 대신 교토~오사카 간 전철인 ‘하루카’선을 타고 간사이국제공항으로 간다. ‘돈은 기술적으로 벌고 쓰는 것은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기업인으로서의 한 회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물이다. 일선 지점에 전화를 걸어 매출 현황을 챙기고 문제가 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호통을 치기도 해 사내에선 ‘호통 회장’으로 통하지만 자신보다 사원, 나아가 이웃을 챙기는데 더 신경을 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데에는 인색하지만 공익사업에는 수십억 원을 아낌없이 쾌척한다. 현재 그는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스폰서와 이사도 맡고 있는데 바로 이 같은 사회 공헌 활동이 일본인들이 마루한과 한 회장을 일본 기업, 일본 기업인보다 더 사랑하는 이유다.사실 일본에서 빠찡꼬 사업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태생적으로 야쿠자(일본 조직 폭력 집단)와 연관이 깊었던 데다 탈세도 비일비재했다. 지금도 일부 빠찡꼬는 야쿠자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러나 마루한은 처음부터 지하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야쿠자 세력이 강한 지역에는 아예 점포를 개설하지 않았다. 이에 더해 마루한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힘을 쏟았다. 지역사회를 위한 시설 건립은 기본이다. 최근에는 캄보디아 빈민 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한 회장은 1999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재일교포는 이희건 신한은행 창립자와 한 회장 둘 뿐이다.이 정도로 크게 성공한 인물에게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드라마틱한 인생 편력이다. 그래서 인터뷰의 첫 화제도 그의 인생 역정으로 잡았다.한 회장은 1930년 12월 17일 경남 삼천포에서 소작농의 5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천시로 바뀌었건만 그는 자신의 고향을 굳이 사천이 아닌 삼천포라고 불렀다.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을 들어봤냐고 묻자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삼천포 사람인 내가 이렇게 잘됐는데 삼천포로 빠지는 게 왜 잘못되는 거냐”며 너털웃음을 지었다.태어난 환경에서 짐작되듯 그의 어린 시절은 빈한했다. 하지만 머리가 비상해 일찍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고 덕분에 동네 읍장이 장학금을 대줘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시작됐다. 학비를 대준 읍장이 남로당 하부 조직의 간부로 지목되면서 그도 덩달아 좌익으로 몰린 것.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그에겐 당장의 은신처가 급했다. 결국 그는 일본으로 징용 갔다가 현지에 정착한 큰형에게 의탁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공부를 워낙 잘했기 때문에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고등학교까지 무시험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 사정으로는 일본행 외에는 대안이 없었습니다.”1945년 10월 21일 밤 소년 한창우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눈물을 머금고 밀항선을 탔다. 당시 그의 짐에는 영한 콘사이스 사전 한 권과 어머니가 싸준 쌀 두 되뿐이었다. 밀항선은 꼬박 하루가 지나 목적지인 시모노세키에 닻을 내렸다. 그는 “10월 22일 시모노세키 항에 내렸는데 머리 위에 그믐달이 떠 있었다. 구성진 엔카가 흘러나오고 게다(나막신)를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목욕탕으로 향하는 일본 아가씨를 보니 비로소 일본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고 당시를 회고했다.어렵사리 형을 만난 그는 검정고시로 도쿄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도일 후 얼마 안 돼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도 해봤지만 마침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전 국토가 폐허가 되고 바로 아래 동생도 전쟁 통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갈 생각을 접어야 했다”고 말했다. 전후 일본은 좌우익 이념 투쟁이 사회 전반에 몰아친 시기였다. 물론 청년 한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와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됐던 그는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형의 빠찡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이것이 그와 빠찡꼬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당시 한 회장의 매형은 20대의 게임기를 놓고 막 사업을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인근에 대형 빠찡꼬가 들어서면서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처했고 결국 매형은 처남인 한 회장에게 가게를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갔다.매형 가게를 인수한 한 회장은 다른 빠찡꼬 가게들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당시 가게가 들어선 미네야마에는 빠찡꼬 가게가 30~40곳이었지만 과당경쟁으로 1년도 못돼 3~4곳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그의 가게는 당당히 살아 남았다.미네야마에서 큰 자신감을 얻은 그는 도심에 루체라는 고급 레스토랑을 연다. 이탈리아어로 ‘등불’인 루체는 미네야마의 명소로 성장했는데 한 회장은 여기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미네야마와 효고현 도요오카에 2, 3호 빠찡꼬를 연이어 연다. 이때만 해도 그의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했다. 밀항선을 타고 온 젊은 청년의 일본 성공기는 곧 이뤄질 것 같았다. 전후 일본은 6·25전쟁 등 호황이 겹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고 한 회장의 일본 생활도 시간이 갈수록 나아졌다.한창 잘나가던 빠찡꼬 사업에 시련이 찾아온 것은 1972년부터다. 미네야마의 성공 이후 그는 ‘니시하라상고’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그는 빠찡꼬 3개와 볼링장 2개, 레스토랑, 골프 연습장 1개 등을 보유한 중견 사업가로 성장해 있었다. 사업에 자신감이 붙자 그는 시즈오카에 아피아라는 볼링장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그가 세운 아피아는 일본 내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 120개 레인이 설치된 그의 볼링장은 국제경기도 가능한 수준으로 건설비만 27억 엔이 들었다. 그러나 1차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볼링 열기는 일순간 꺼졌고 그는 60억 엔이라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인플레를 감안하면 지금 돈으로 2000억 엔이 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한 회장에게 당시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지나친 자신감이었습니다. 볼링 사업을 준비할 때 주변에서 많이 말렸는데, 다른 사람이 실패해도 전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볼링 붐이 사라지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제가 직원들에게 긴장감을 강조하는 것이 당시의 교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업이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은 거죠. 지금 전 세계적인 금융 불황으로 거대 기업들이 하나둘씩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와 같은 큰 기업들이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즘 기업 경영에서 ‘리스크 관리’가 중요시 되고 있는데 저는 그 중요성을 그때 이미 경험했습니다. 붐이 꺼질 때 경영자들은 사업을 효율적으로 축소해 경영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60억 엔이라는 부채가 생기자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제가 부도를 내면 피해는 고스란히 금융회사 등 채권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보증인들은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당시 아이들이 7명이었는데 제가 쓰러지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은행을 찾아갔죠. 파산신청을 할 생각이었는데 은행에서 되레 자금을 추가로 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당시 제 재산을 모두 추징해도 대출금의 10분의 1밖에 안 됐는데 그럴 바에는 회생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겠죠.”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던 어느 날 그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손에 들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산티아고는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하다 어느 날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다. 하지만 상어들의 공격을 받게 된 위기 상황에 처하자 ‘이것은 하나님이 준 시련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한 회장은 무릎을 쳤다. ‘그래서 일어서자. 예순 살이 넘은 산티아고도 도전을 하는데 내 나이 마흔이 아닌가.’그는 1973년 회사 이름을 마루한으로 바꾸고 새롭게 출발한다. 마루한은 구슬이란 뜻의 마루(丸)와 한 회장의 성씨인 한(韓)의 합성어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니시하라라는 일본식 성을 회사명으로 쓰고 있었다.“친구들이 한두 푼씩 빌려줘서 시작했습니다. 계(契)도 만들었죠. 지금도 주변 지인들이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오는데 대부분 한두 달 내 자금 계획만 수립해 옵니다. 전 그때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저는 당시 만기 약속어음이 돌아오기 6개월 전부터 자금 계획을 짰습니다. 대신 은행에서 추가로 자금을 빌리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은행도 저에게 자금을 빌려 줄 리가 없죠. 이자 부담은 계속됐지만 신용도를 최대한 유지했습니다. 대신 경비는 최대한 줄였습니다. 하루 1500km를 차로 다녔습니다. 미친 듯이 일했죠.”“물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루한의 성공에는 교외형 전략이 주효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다른 업체들이 3.3㎡당 20만 원짜리 도심에 빠찡꼬를 지은데 비해 우리는 절반인 곳을 찾았습니다. 여기에 운 좋게도 당시 개발된 피버(그림 3개를 맞추면 잭팟이 터지는 기종)가 히트를 치면서 드디어 10년 만에 빚을 모두 청산했습니다.”한 회장이 외부로 동분서주할 동안 직원들도 회사 회생에 전력을 기울였다. ‘우리 월급은 우리 손으로 벌자’는 생각에 볼링장 구석에 요즘 할인 매장과 같은 쇼핑센터 ‘세이한’을 열었다. 200만 엔으로 시작한 세이한은 10년간 운영돼 마루한 회생에 큰 역할을 했다.피버의 등장으로 빠찡꼬를 찾는 고객도 급속도로 불어났다. 도심에서 차로 10~20분 떨어진 마루한 빠찡꼬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경쟁 업체들이 도심에서 사업을 벌일 때 마루한은 값싼 교외에 하나씩 점포를 늘려갔다. 60억 엔이라는 빚은 조금씩 줄어 그의 나이 52세 때 마침내 모두 청산했다.마루한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교외형과 함께 도심형 점포에 시동을 걸었다는데 있다. 1991년 마루한은 연매출 1000억 엔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경쟁 업체 다이남이 외곽 지역에 머물러 있을 때 마루한은 해당 도시의 심장부에 점포를 개설하는데 1차적인 목표를 세웠다. 최대한 손님이 많이 찾도록 해 가동률을 높이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었다. 지금도 마루한 대부분의 지점은 가동률이 70%를 상회한다. 가급적 사람들이 많이 몰려 스토어 로열티를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1995년 마루한은 드디어 일본 경제의 심장부인 도쿄 시부야 거리에 입성하는 쾌거를 거둔다. 1995년은 일본력으로 헤이세이 7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등극한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지상 7층 건물로 세워진 마루한 빠찡꼬 타워(MPT)는 7월 7일 7시에 문을 열었다. 그가 도쿄에 입성하자 일본 언론은 앞 다퉈 ‘빠찡꼬 제왕 드디어 도쿄에 상륙하다’라며 기사를 쏟아냈다. 이후 2002년 100호점, 2006년 200호점을 개설했고 매출 기록도 매해 갈아 치우고 있다.2005년 6월 22일에는 도쿄 인근 자바시 마쿠하리에 있는 마쿠하리 메세에서 9000여 명이 참석한 초대형 이벤트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매출 1조 엔 달성 기념 행사였다. 식사 테이블만 650개이고 호텔 직원 1500여 명이 서빙에 동원되는 등 무려 150억 원이 들어간 이벤트였다. 연회장에서 도쿄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한 회장의 머릿속에는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해는 그가 일본으로 밀항선을 탄 지 딱 60년째 되는 해이기도 했다.이렇게 성장 가도를 달려온 마루한의 지난해 매출액은 1조8600억 엔이다. 일본 전역에 220개 점포가 있고 빠찡꼬 기계는 13만여 대, 종업원은 1만6000여 명이나 된다. 일본 재계에서는 마루한의 이 같은 성공 요인으로 △탁월한 인재 관리 △출점 지역 선점 △마케팅 전략 등을 꼽는다. 정작 한 회장 자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남보다 배로 일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신용도를 높이니까 자연스럽게 성공이 따라오더군요. 물론 사회봉사 활동도 남들보다 두 배로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직원들에게 도전 정신, 헝그리 정신, 위기감, 긴장감을 요구합니다. 제가 사업을 시작한 지 52년이 되는데 이 4가지를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올해 마루한의 자산은 2조7000억 엔이 됩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30조 원이 넘지만 저는 지금까지도 마루한이 대기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대기업이라고 자만하는 순간 도전 정신도, 헝그리 정신도, 위기감도, 긴장감도 다 잃게 되지요.”“마루한이즘은 지역 사회 헌신이 요체입니다. 서비스를 통해 고객 만족도를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죠. 마루한에 매년 400명 이상의 대학 졸업생이 입사하는데 이들에게 저는 투철한 봉사 정신을 강조합니다. 일하지 않는 날에는 하다못해 주변의 도랑 청소라도 하라고 말합니다. 고객과 사회에 헌신한 우수 직원들의 사례는 전국 지점장 화상회의 때 발표돼 ‘이즘의 싹’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됩니다.”“이렇게 봉사해도 일본 내 빠찡꼬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다행히 마루한의 노력으로 빠찡꼬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하나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은 아직 멀었습니다. 산업 자체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야 합니다. 저도 신입 직원들에게 이 점을 가장 강조합니다. 빠찡꼬를 당당한 서비스 산업으로 발전시켜 추후 내 자식들도 아무 어려움 없이 이 산업에 진출하도록 하는 것이 꿈입니다. 자식들이 마루한에 취직하면 더욱 좋고요.”“아직까지도 부정적인 시각은 여전합니다. 벌써 몇 년째 도쿄 증시 상장을 준비하는데 빠찡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아직까지는 어렵습니다. 빠찡꼬 기업 중에는 물론 야쿠자와 연관된 곳도 있지만 90% 이상이 투명한 곳들입니다. 마루한은 모든 수입과 지출을 실시간으로 전산 처리해 세무 당국에 제출합니다. 만약 제가 탈세나 불법을 벌였다면 일본 정부가 훈장을 줬겠습니까. 기업에 있어선 도덕과 윤리가 중요합니다. 저도 이 점을 강조합니다. 마루한의 직원은 1만6000여 명 되는데 법에 저촉되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업을 하는데 나쁜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업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마루한은 일본 사회에서 매우 존경받는 기업입니다. 이것은 제가 확실하게 자랑하고 싶습니다.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빠찡꼬 사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실제로 마루한은 다른 빠찡꼬 업체와 접근 방법부터 달리했다. 빠찡꼬 사업의 개념 자체를 사행 사업이 아닌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뜯어고친다는 각오로 접근했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도쿄 와세다 게이오대 등 일본 명문 대학을 졸업한 재원들도 속속 몰려들고 있다. 이들에게 빠찡꼬는 도박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다.마루한 이전까지 대부분의 빠찡꼬 업체 직원들의 주된 임무는 ‘감시’였다. 일선 직원들은 부정을 저지르는 고객이 없는지 감시하고 점주는 뒷돈을 챙기는 직원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 회장과 마루한은 달랐다. 객장을 쾌적하게 관리하고 고객의 승률도 최대한 높였다. 이렇게 해야만 한 번 찾아올 고객의 방문이 서너 번으로 늘어난다는 계산에서다. 이 때문에 마루한은 접객률(接客率)을 기업의 최대 가치로 꼽는다. 한 회장이 일선 매장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것도 점포 이익이 아닌 접객률이다.한 회장은 인재론도 독특하다. 한 회장은 평소 ‘어떤 사람이든 모두 훌륭한 인재(人才)로 키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직원들에게 통일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은 물론 파트타임 직원에게도 정식 직원과 똑같은 혜택을 베푼다. 마루한은 정규직과 임시직 비율이 절반씩 차지한다. 멘토 제도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일선 사원들의 의견을 경영에 적극 반영하기 위해 ‘지시’보다 ‘경청’에 더 주안점을 둔다. 매장과 본점 간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 매주 월요일마다 220여 개 지점을 연결하는 화상회의가 열린다. 그는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전선의 야전 사령관처럼 현장을 진두지휘한다.한 회장은 지난 2001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당시 그의 귀화를 놓고 재일동포 사회는 크게 술렁였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유력 언론들은 그의 일본 국적 신청을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국적을 신청하면서도 한 회장은 ‘한창우(韓昌祐)’라는 이름만은 고집했다. 법무성, 외무성이 불허했지만 그는 긴 법정소송 끝에 이를 관철시켰다. 물론 한 회장 자녀들도 한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비즈니스를 위해서는 국적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름은 다릅니다. 국적이 바뀌어도 민족은 바꿀 수 없듯이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을 어떻게 바꿉니까.”실제로 비록 국적은 바뀌었지만 한 회장에게 조국 대한민국은 여전히 삶의 구심점이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0억 원을 한국 정부에 기부했고 30억 원의 사재를 털어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도 설립하는 등 일본 내 한국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1993년에는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를 결성해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한국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나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상(韓商)들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습니까.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그때보다 훨씬 어려움이 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 차례 어려움을 겪었으니 헤쳐 나가는 방법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위기를 선진국 내지는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는 찬스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세계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부분입니다. 저도 한국에 직간접적으로 투자했는데 요즘 손해가 많습니다.”(한 회장은 구체적인 투자 내역을 밝히진 않았다.)“늘 느끼는 바지만 한국인은 머리가 비상합니다. 가끔은 그것 때문에 탈이 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회사 경영은 배를 80%만 채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 경영인들은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려요. 100%는 물론 130%가 넘게 배를 채우니 탈이 날 수밖에요. 빠찡꼬 개설을 위해 동남아 일대를 돌아다니는데 곳곳마다 한국 사람들이 사놓은 부동산이 어마어마합니다.”“이 점은 늘 조심스럽습니다. 예전에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스터 도넛’과 같은 음식 프랜차이즈에 관심이 많다고 했더니 ‘마루한, 미스터 도넛으로 한국 진출 계획’이라고 기사를 쓰더군요. 그 일로 미스터 도넛으로부터 항의를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학교를 인수해 달라, 호텔을 인수해 운영해 달라는 등 요청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확정된 바가 없습니다.”이 부분에 대한 한 회장의 답변이 성에 안차 국내 진출 계획을 재차 물어보자 그는 “서울시와 인천시로부터 카지노 투자 요청을 받았다”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서울보다는 영종도가 입지 면에서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에서 카지노 사업을 하려면 5000억~1조 원가량이 필요한데 이를 마루한이 모두 부담하기는 어렵다”며 “미국 라스베이거스 유명 카지노 회사나 한국 기업 등과의 합작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그는 이 밖에도 국내 모 은행의 지분 인수를 제의 받아 검토 중이라고 말해 기자의 관심을 끌었다. 한 회장은 문제의 은행이 어느 곳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신한은행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회장이 신한은행 이사를 역임한데다 과거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보유하게 된 지분이 잠재 매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그의 평소 일과는 어떻게 진행될까.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점인 부지런함은 한 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매일 아침 5시면 일어나 1시간 반 동안 교토 도심을 흐르는 강변 5km를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산책 후에는 출근할 때까지 니혼게이자이 아사히 요미우리 등 일본 5대 일간지를 정독한다. 경영에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스크랩해 직원들에게 읽어주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은 교토에서 보내며 도쿄 본사에는 1주일 한 번 꼴로 간다.은퇴 시점을 묻자 그는 “죽을 때까지 은퇴하지 않겠다”며 너털웃음을 짓더니 다시 정색을 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머리는 비상합니다. 그런데 끈기가 없는 게 탈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돈을 벌겠다는 의욕이 그만큼 덜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경영자는 모름지기 돈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저런 경영 기법들을 내세우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이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한 회장은 빠찡꼬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뭘 했겠느냐는 질문에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에 있었다면 필시 정치인이 됐을 것”이라며 “패션 디자인의 소질도 살렸다면 잘됐을 것”이라고 말했다.그의 화법은 굉장히 직설적이면서 간간이 유머가 넘쳐났다. 기자가 골프 실력을 묻자 “제 골프 실력이 얼마인지 궁금합니까. 85타를 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9홀까지의 기록이라는 겁니다”라고 말하며 파안대소했다. 캄보디아 훈센 총리에게도 이같이 말해 좌중에게 웃음을 선사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끝으로 한 회장에게 인생 최대의 좌절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봤다. 그는 잠시의 짬도 없이 “장남을 앞서 보낸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지난 1978년 장남 한철 씨를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발을 헛디디면서 급류에 휘말렸던 것이다. 그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그는 열흘 간 식음을 전폐하고 하늘로 떠나보낸 아들을 눈물로 그리워했다. 그리고 3년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일에 미쳐 있던 한 회장에게 장남의 죽음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지금도 아들을 기리는 마음에 자택 방 하나를 장남 생전 그대로의 모습대로 꾸며 놓고 있다. 또 야구를 좋아한 아들을 위해 미네야마시 야구장에 아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했다.일본 재계 17위 거부 마루한 회장1931년 경남 사천 출생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회장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