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년 고택 ‘조견당’ 주인 김주태씨

원도 횡성군 주천면 주천리를 지나는 관광객들은 시골 오지에서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고택과 마주치고는 깜짝 놀란다. “어떻게 이런 시골마을에 저런 고택이 남아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세상의 진리를 밝게 비춰 보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조견당(照見堂)은 180년 역사가 배어있는 고택이다. 강원도 지방문화재 71호인 조견당은 한때 한양의 사대부가에서도 꿈꿀 수 없었던 120칸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한옥이었으나 6·25전쟁을 거치면서 지금은 33칸 규모로 줄어들었다. 조견당은 건축 양식으로도 음양오행의 화합을 잘 살린 건축물로 꼽힌다. 팔작지붕 동쪽에는 햇살 조영을 화강암으로 새겨 넣고 북쪽과 서쪽 지붕에는 달을 조영해 넣어 음양의 화합을 강조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고택 가운데 유일한 양식이다. 또 동쪽 화방벽에는 당시 궁궐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흑백황적청 5가지 색깔의 화강암 벽돌을 쌓아올린 점도 독특하다.현재 조견당을 가꾸고 관리하고 있는 주인은 김주태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이사다. 그는 고택을 본격적으로 연구해보겠다며 3년 전 MBC를 휴직하고 전국 각지를 누비며 고택 소유자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624채의 전국 고택 주인들이 참여하는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를 발족했다. 회장은 강릉 선교장 관장인 이강백 씨가 맡고 있다. 6월 다시 MBC기자로 복귀하는 김 이사는 “기자 생활을 할 때는 고택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쉬움이 많았었다”며 “지난 3년은 조견당뿐만 아니라 우리 고택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며 돈이 생길 때마다 시골집에 투자하는 그를 옆에서 지켜본 부인은 한때 말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손을 들었단다. “20년간 기자 생활하면서 모은 돈 대부분을 ‘올인’했는데 어림잡아 7억∼8억 원은 될 거예요. 그 돈으로 아파트나 땅을 샀으면 부자가 됐을 것이라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고택에 계속 투자한 것은 요즘 사람들 같은 투자 개념이 아니라 조상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2남 4녀 중 막내인 그가 조견당을 물려받은 것도 옛것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이었다. 장남이 고택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김 이사의 부모님은 막내인 김 이사에게 조견당을 남기고 나머지 현금성 재산은 형에게 물려줬다고 한다. 하지만 직장 다니면서 수없이 손이 가야 하는 고택을 관리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동네 주민을 관리인으로 두고 월급 50만 원과 조견당 인근 1322㎡(옛 400평)의 땅을 경작하게 하며 관리했지만 손을 봐야 할 데는 끝없이 이어졌다. 김 이사는 “한때 장정 30∼40여 명이 꿀벌처럼 드나들며 생활하던 공간을 시골 어른 한 분이 관리하는 데 오죽 손이 많이 가겠어요. 고택은 6개월만 관리하지 않으면 귀신이 나올 정도로 잡초가 무성해집니다.”그런데 강원도 횡성 시골에 어떻게 조견당처럼 커다란 저택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김 이사의 7대조가 한양에서 당파 싸움에 밀려 횡성으로 낙향한 후 의주 동래 일대를 기반으로 한 무역업으로 큰 부를 일궜다고 한다. 10년간의 대규모 공사 끝에 1827년(순조 27년에)에 99칸 규모의 한옥이 완성됐고 이후 행랑채가 늘어나면서 120칸 규모로 커졌다. 당시 민간에서 100칸 이상 규모의 대저택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중앙정부의 시스템이 붕괴됐던 조선 말기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당초 조견당은 3년 공기를 예상했으나 기근과 흉작으로 굶어죽는 사람들이 크게 늘면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공역 성격을 띠면서 공사가 길어졌다고 한다. 김 이사는 “조견당 공사장에 가면 밥은 먹는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공사가 길어졌다”며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고택에는 당대 집주인들의 사회에 대한 철학아 담겨 있는 곳이 적지 않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견당은 6·25전쟁 당시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본부로 사용하는 바람에 폭격을 많이 받아 소실됐지만 인근 주민에 의한 훼손은 없었다고 한다.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고택 가운데 지리산 자락 인근인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자리한 운조루(雲鳥樓)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덕분에 6·25전쟁 전후에도 화를 면한 사례로 꼽힌다. 김 이사는 “운조루 주인이 당시 지주라는 이유로 처형 대상에 올랐으나 집주인이 흉년 때마다 쌀을 내놓아 인근 주민들을 구휼한 선행 덕분에 화를 면했다”며 “특히 쌀을 가져가는 사람의 자존심을 배려해 뒤채에 ‘타인능해(他人能解: 다른 사람도 능히 문을 열 수 있다)’라고 쓰인 쌀통을 내놓은 배려는 후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이처럼 조상들의 소중한 정신의 뿌리인 고택이 요즘은 젊은이들과 괴리되고 집을 물려받은 후손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현실에 안타깝다고 한다. “현재의 문화재법은 고택을 보수해 박물관의 유물처럼 보관하는 박제화를 강요합니다. 내부 구조까지 건축 당시의 원형을 고수해서는 요즘 사람들이 살수가 없습니다. 유럽이 외형은 유지하면서 내부는 현대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다소의 변형을 허락한 것처럼 우리도 사람이 사는 한옥이 되어야 합니다. 한옥은 사람이 살아야 박제화해 보존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김 이사는 올 여름 고택의 적극적 활용을 위한 첫 실험에 나설 계획이다. 조견당에서 청소년 대상의 ‘리더십 캠프’를 갖기로 한 것. 강사진을 포함한 구체적인 준비도 이미 마친 상태다.“과거처럼 고택을 단순 보전 관리하는 소극적 방식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위한 정서적 교육적 공간으로 활용하는 적극적 관리를 통해 전통의 맥을 느낄 수 있는 한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고택은 지형적으로 명당에 자리 잡고 있어 집에 들어서는 순간 정서적인 안정감을 안겨줍니다. 이런 공간에서 우리의 전통과 뿌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과정을 통해 표현력을 기르고 남을 배려하는 리더가 되는 방법을 일깨워줄 생각입니다.”김 이사도 짬을 내 직접 강사로 나설 생각이다. 해외로 이민을 가서 성공했지만 자녀들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교포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다. “고생 끝에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아이들도 아이비(IVY)리그 대학에 합격해 부족할 게 하나 없을 것 같지만 막상 이루고 나니 아이들과의 정체성 괴리에 당혹스러워하는 교포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의 자녀들이 고택에서 우리 뿌리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도 고택이 묻은 먼지를 털고 살아 있는 문화의 현장으로 등장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김 이사는 “명당에 자리한 고택은 풍수적으로 좋은 입지여야 할 뿐만 아니라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시대의 부름과 요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응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