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라에 차나무는 언제부터 자랐고, 차 마시는 풍습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우리나라 차나무의 기원을 주장하는 세 가지 설들이 있다.먼저 자생설부터 살펴보자. 영산(靈山)인 지리산에 아주 먼 옛날부터 영초인 차나무가 스스로 자라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신라의 왕자 김교각이 중국에 갈 때 금지차(金地茶)를 가지고 갔다는 기록이 있다. 자생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때 김교각이 가져간 금지차가 우리 자생차이며, 한술 더 떠 우리 차가 중국에 전래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서기 48년, 수로왕 때 허황옥 왕후가 인도에서 불교(사파석탑)와 함께 차 씨도 가져 왔다는 설이다. 남방전래설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김해 백월산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세상에서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 씨라 전한다”라는 기록에 기초한다. 백월산에서 수도하던 장유화상은 후에 수로왕의 일곱 왕자와 지리산 화개동으로 와서 운상원(지금의 칠불사)을 짓고 도를 이뤄 성불했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지금 화개동의 차는 칠왕자가 심은 인도 차의 유종이 된다.세 번째가 중국 차의 전래설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3년(828년)조를 보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 이미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이 학설을 믿는 사람들은 서기 828년을 우리나라 차의 시배년, 흥덕왕의 명으로 차 씨를 심은 지리산 화개동의 쌍계사 장죽전(長竹田)을 차 시배지라고 한다. 고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 기록된 원효대사의 원효방 이야기, 신문왕의 보천·효명 왕자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께 차를 올린 일, 설총이 신문왕에게 들려준 화왕계 등 차에 대한 기록들이 모두 선덕왕 때 이후인 점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왕명에 의해 대렴이 중국에서 차 씨앗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것은 그만큼 차 수요가 늘어났다는 것과 차 문화 진흥을 위해 국가가 공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시도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세 번째 학설이 역사학자들에게 최초의 차 재배 기록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그렇다면 차는 원산지가 어디일까. 차나무의 원산지에 대해서 한때는 교목이고 잎이 큰 대엽종은 인도가 원산지, 키와 잎이 작은 소엽종은 중국이 원산지라는 주장이 정설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의 서남쪽 윈난성과 구이저우성, 쓰촨성의 3성 접경지역인 윈구이고원이 원산지라는 일원설이 인정받고 있다. 차나무의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 (L)O. Kuntge). 시넨시스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차나무의 학명만 보더라도 원산지가 중국임을 세계 식물학계가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차나무는 중국 소엽종으로 성목이 되어도 2~3m가 넘지 않는 관목으로 상록수다. 많은 사람들이 찻잎의 생김새나 품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차나무의 독특한 생태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얀 꽃잎과 황금색 꽃술을 가진 작고 예쁜 꽃은 늦가을인 10월 중·하순에 피기 시작해 초겨울까지 계속된다. 꽃이 진 자리에는 열매가 아주 작은 수정체로 월동을 하고 이듬해 초겨울까지 꼬박 1년을 커 간다.이와 같이 차는 열매가 오랫동안 성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물들이 당해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자손을 남기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지난해의 꽃이 열매가 돼 영글면 올해 새 꽃이 바로 옆에서 피어난다. 그래서 예로부터 차나무를 열매와 꽃이 서로 만나는 나무, 즉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고 불러 가족·세대간의 화합을 상징했다.김동곤농림부 지정 대한민국 차명인경남 하동군 화개면 출생쌍계제다 대표저서-‘화개동의 향기(1987)’,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 같아라(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