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알랭 들롱이 귀족 역할을 맡지 못했던 것은 은제 식기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였다는 얘기가 있다. 귀족 생활은 전통적으로 은을 중심으로 꾸며진다. 그러나 은제 식기를 다루기는 매우 어렵다. 만일 이러한 까다로움까지 즐길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귀족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유럽에서 ‘은수저(silver spoon)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라는 말은 부유한 귀족 출신을 의미한다. 반면, ‘나무 스푼을 들고 나왔다’고 하면 가난한 평민 출신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귀족의 자식들이 아니고서는 값비싼 은 스푼을 사용할 수가 없었으니 귀족이라 함은 곧, ‘실버 라이프(silver life)’를 향유하는 소수의 그룹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례를 기념해 대부가 은제 사도 스푼(silver apostle spoon)을 선물로 주는 관습은 귀족 사회의 전통이다.그러나 이런 유럽에서도 스푼은 17세기 중엽에 와서야 사용되기 시작했고 식탁에 나이프, 포크, 스푼을 세팅하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일반화됐다. 초기에는 거의 귀한 장식품쯤으로 손잡이에만 장식한 것이 많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이탈리아로부터 선물로 받은 포크에 장식을 해서 귀중품으로 보관할 정도였다. 17세기 들어 영국에서는 손잡이 끝에 12사도의 상을 새긴 12개의 사도 스푼을 새로 태어난 아기의 대부가 세례 축하로 선물하는 풍습이 나타났다. 이것은 개인용 스푼에 이름을 새기는 풍습과도 관계가 있고, 생명과 건강의 상징이라고도 여겨 오늘날에도 세례나 결혼 축하 선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앤티크 스푼은 컬렉터들에게 언제나 인기 품목으로 꼽힌다.고대 로마제국에서는 명망 있는 귀족이 연회를 베풀고는 그 은 식기들을 테베레 강에 던져 버림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소문에는 강바닥에 그물을 쳐놓고 몰래 다시 회수했다고도 한다. 유럽은 로마 시대로부터 중세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정치제도와 문화의 격랑을 겪어 왔지만 귀족들이 은기(銀器), 즉 실버 플레이트(silver plate)로 식사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며 신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경계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귀족 집단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 중에 ‘블루 블러드(blue blood)’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귀족들은 푸른 피를 가졌다’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는 중세 시대에 봉건 체제 속에서 농노 수준의 평민들이 들판에서 볕에 그을리거나 노동으로 거친 피부를 가졌던 반면, 힘든 일을 하지 않아 햇볕에 노출되지 않은 귀족들은 하얀 피부와 푸른 정맥이 대비돼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자신들과는 달리 항상 은 식기로 식사하는 그들의 핏줄이 은으로 침염(浸染)돼 푸르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수도 있다.앤티크 실버를 살펴보면 대부분 정중앙에 문장이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장(紋章)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귀족들의 전유물이며 은을 소유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말해 준다. 일반적으로 가구나 유리, 도자기 등에서는 소유주를 밝히는 경우가 흔치 않다. 그러나 실버 웨어에서는 대부분의 제품에 꼭 문장이나 마크가 찍힌다는 사실은 은이 귀족들의 일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수년 전 필자는 옥스퍼드 셰어 코츠 월드에 있는 매너 하우스(manor house)로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꿀이 흐르는 빌리지라는 평을 듣는 코츠 월드는 윌리엄 모리스가 격찬했던 것처럼 아름답고도 풍요로웠다. 저택의 주인은 앤티크 딜러이자 실버 웨어 컬렉터로 잘 알려진 인물이어서 그 가문의 초대에 기대가 컸다. 도착하니 고딕 양식의 넓은 다이닝 룸에는 스털링 실버와 더비 포슬린(Derby Porcelain), 빅토리안 클라렛 저그(claret jug)와 워터포드 크리스털(Waterford crystal)로 세팅돼 있어서 한눈에도 그날 다이닝 서비스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식탁 위에는 한 쌍의 은촛대(silver candle stick)에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식사가 시작되면서 나는 “충분히 실내가 밝은데 또 초를 켤 필요가 있느냐”고 질문해 보았다. 그러자 주인은 두 개의 은촛대는 식탁에서 서로 음이온을 발생시켜 실내 공기를 정화하고 냄새도 잡아준다고 하면서 은촛대는 와인을 곁들일 때 식탁의 분위기를 한결 로맨틱하게 도와준다는 조크도 추가했다. 두 개의 은촛대 사이에는 신화를 주제로 조각한 실버 센터 피스(center peace)가 열대 과일을 담고 있었다. 은기들이 내뿜는 음이온이 정말 홀 전체를 휘감아 한층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조지안 시대의 유일한 여성 실버스미스(silversmith: 은세공인)로 유명한 헤스터 베이트맨(Hester Bateman, 1708~94) 디자인의 실버 플레이트로 서비스한 티타임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앤티크 실버를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날의 만남은 은을 즐기는 감도(感度)가 근본적으로 나와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은 제품을 고를 때는 스털링(sterling) 실버 웨어 어딘가에 분명하게 마크가 각인돼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스푼, 혹은 포크 손잡이 뒷면이나 포크나 스푼, 투린(tureen) 티포트(teapot) 등에서도 마크들은 발견된다. 이러한 마크들은 무엇일까. 특히 영국의 실버 웨어에는 마크뿐만 아니라 알파벳, 사자, 사람의 두상, 혹은 문장이나 왕관 같은 것들이 보인다. 이러한 각인된 기호들은 시공을 넘어 컬렉터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말귀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식을 갖춰야만 한다. 그러나 꼭 컬렉터가 아니라고 해도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앤티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쯤은 알고 가야 할 당연한 코스일 것이다.은은 부드러운 메탈이다. 순수한 은만으로는 실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양의 구리를 혼합해 제작함으로써 강도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한다. 따라서 스털링 실버라는 뜻은 순은(純銀)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은 92.5%와 구리 7.5%의 비율의 합금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눈으로는 얼마나 다른 금속을 섞었는지 쉽게 알아낼 수 없다. 소비자 보호를 위한 대비책이 필요해진다. 이 검증 제도는 그러한 소비자의 요구로 시행된 것으로,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소비자 보호 정책 법령으로 기록될 것이다.따라서 시중에 유통되는 은 제품에 홀 마크를 찍는 경우 법적 표준에 합격 판정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법적 표준이란 제품의 강도를 높이는 등의 여러 가지 목적으로 순금 또는 순은에 합금하는 비금속(卑金屬)의 최대 비율을 규정한 것이지만 원산지나 품질을 나타내는 제반 표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홀마크 제도는 영국에서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입법화되면서 1300년부터 시작된 것이다.1770년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은 바구니. 식탁이나 테이블 위에 놓는 장식으로 사용됐다. 실제 바구니를 모델로 매우 정교하게 투각으로 제작됐으며 중국 도자기 붐이 일 때 모델로 사용되기도 했다.실버 에나멜 시버리엄(ciborium). 일종의 성합으로 예수의 성체를 담는 그릇이며 가톨릭 성당에서 주로 사용한다. 특히 은과 에나멜 아트가 교회의 고유한 장식으로 돼 있어 품위가 느껴진다. 18세기께 독일의 실버스미스 J 반(Banh)의 작품이다.19세기 독일의 실버스미스에 의해 제작된 커버가 있는 컵.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이루어졌5다.제임스 1세 시대에 사용된 성체 안치 반. 가톨릭 성당에서 사용됐다. 성물은 귀족들이 당대 최고의 실버스미스에 의뢰해 제작, 기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완벽한 품위를 느끼게 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천상의 왕관, 최후의 만찬으로 상징되는예수 그리스도의 몸 일부가 빛으로 표현되고 성령을 의미하는 비둘기가 조각돼 있다.실버스미스 크리스천 해머가 1857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제작했다. 일종의 와인 주전자, 와인 저그(wine jug)다. 오리의 주둥이를 주전자의 주둥이로, 손잡이는 신화의 모티브로 사람을 조각했다.아우그스부르크 지방에서 슈미트에 의해 제작된 탱커드. 독일 특유의 맥주 컵이다. 로코코 양식의 조각과 돋을새김 기법이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808년 제작된 실버 티포트. 주문자의 이니셜 모노그램이 전면에 각인됐다.은과 유리로 구성된 슈거 볼 스탠드. 차를 마실 때 세터 피스로 사용됐다.스웨덴에서 19세기에 제작된 왕관이 조각된 거울. 당시 화장용 거울은 여성들의 매우 중요한 애장품이었고 신분을 나타냈다.빅토리안 시대에 한 쌍으로 제작된 챔버 캔들 스틱.벨기에에서 제작된 아르누보 스타일의 티 서비스로 아름다운 곡선이 일체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