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 도시,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남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컬러는? 단연 그레이다. 블랙 슈트를 입은 남자는 무언가 딱딱해 보이거나 가까이 가기 어려워 보이고, 네이비 슈트를 입은 남자는 무언가 차갑고 이성적이고 논리적 논쟁을 좋아할 것 같다. 반면 그레이 컬러를 입은 남성은 모던하고, 도시적인 뉘앙스를 가지지만 그래도 따뜻한 포근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그레이는 모던함을 넘어 답답함, 무미건조한 시멘트 더미, 숨 막히는 도시의 매연을 떠올리게 하는 컬러이기도 하다. 사실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가장 세련되지만 가장 밋밋해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어려운 컬러가 바로 그레이다. 이번 가을, 백화점 매장과 길거리의 사람들을 보면 온통 그레이 컬러로 도배된 듯한 느낌이 든다. 멋진 남성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가을. 가을을 대표하는 그레이 컬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그레이 컬러. 뭔가 세련되고, 새로운 느낌으로 그레이를 입는 방법은 없을까.그레이 컬러의 대두는 이번 가을 겨울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에서도 예고된 바 있다. 그레이라고 하면 장롱 속 먼지 냄새 푹 전 오래된 슈트가 생각나 싫증이 난다면 디자이너들의 트렌디한 그레이 센스를 잠시 엿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많은 주요 디자이너들이 기존의 그레이를 보다 신선한 감각으로 연출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앞 다퉈 제시하고 있다. 돌체앤가바나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영감을 받아 차콜 그레이, 실버 등 대기의 빛깔에 영향을 받은 새로운 미래적 그레이를 선보였다. 버버리 프로섬은 영국의 ‘샌드허스트(Sandhurst)’ 육군사관학교에서 영감을 얻어 영국의 전통적인 엄격한 실루엣에 소프트 그레이와 보다 짙은 차콜 그레이를 절제되고 모던하게 결합했다. 커스튬 내셔널은 윈터 화이트, 그레이와의 깔끔한 코디네이션을 통해 도시 속의 밀리터리를, 프라다는 그레이의 그러데이션 효과나 그레이의 컬러 매치를 신선하게 제안했다.이처럼 이번 가을 그레이는 그 종류도 다양하고 표현 방식도 풍부하다. 옅은 그레이에서 부드러운 중간 톤, 짙은 그레이, 실버까지 다양한 그레이가 슈트는 물론이고 코트, 캐주얼 단품 아이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용된다. 그레이의 영향을 받은 컬러들도 함께 부각돼 그레이와 베이지의 중간 컬러인 ‘그레이지(greige)’도 등장했다.그런데 혹시 다양한 그레이들이 등장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여러 가지 컬러 군을 함께 매치하겠다고 욕심내고 있지는 않은가. 이번 가을 트렌디 컬러인 그레이는 한껏 멋을 내고도 코디 한번 잘못하면 ‘촌스러운 멋쟁이’가 되기 십상이다. 이번 가을 그레이를 입는 정석은 깔끔함과 절제이기 때문이다. 매치되는 컬러의 수는 되도록 적게 하되, 컬러 매치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싶은 경우에는 다른 컬러를 코디하기보다는 밝기가 조금 다른 같은 그레이끼리 매치하거나 그레이 톤의 컬러를 활용해 ‘톤온톤 매치(비슷한 색상끼리 코디하는 것)’하거나 또는 블랙과 함께 심플하고 모던하게 연출하는 것이 좋다. 그레이가 지루해 보일까봐 과도한 악센트를 가미하거나 다른 여러 컬러들과 함께 코디하면 그레이의 맛이 떨어지게 된다. 소재나 실루엣의 선택도 절제된 감각이 중요하다. 기존의 매끄러운 광택감이 흐르던 번쩍이는 실버 그레이는 당분간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중간 톤의 마일드 그레이에서 다소 짙은 차콜 그레이에 이르는 차분한 그레이는 부드러운 가을 남성의 품격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화려한 광택의 실크 혼방이나 합성 소재들의 광택 소재들 대신 울 베이스의 따스한 소재들을 활용해 좀 더 부드럽고 감수성 있는 남성미를 표현하자. 차분해진 그레이의 컬러감만큼 스타일도 최대한 심플하고 깔끔하게 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도한 디테일이나 소재의 강한 패턴은 절대 금물이다. 액세서리는 절제해 사용하고 악센트 컬러도 타이나 아주 작은 면적의 포인트면 충분하다. 화려한 디테일의 슈트로 멋을 내기보다는 심플하게 떨어지는 실루엣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너무 넉넉한 실루엣보다는 몸에 잘 맞아 깔끔하게 떨어지는 정도의 슬림함을 갖춘 것이 멋스럽다.화려함보다는 심플한 세련미가 더 어려운 법이다. 절제는 과도함보다 더 힘을 갖는다.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계절의 맛에 흠뻑 젖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이 가을, 멋진 타이에 매치한 그레이 슈트 한 벌이 주는 가을 냄새는 그 아쉬움마저도 금세 날려 보낼 수 있지 않을까.이정민 퍼스트뷰코리아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