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의 남쪽 끝자락. 월스트리트에 있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100여m 내려가면 진한 갈색 건물이 나온다. 미국 국기 2개가 펄럭이는 정문엔 ‘85’라는 번지수만 있을 뿐 간판이 없다. 그 유명한 골드만삭스다.평소 이 건물 주변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백인이 아닌, 다국적 인종이 유난히 많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 캠퍼스처럼 분위기가 밝다는 점이다. 다름 아닌 골드만삭스의 기업 문화 때문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골드만삭스는 직원도 다국적군으로 구성한다. 또 잘나가는 골드만삭스인 만큼 직원들의 발걸음은 바쁘지만 표정은 항상 밝다.요즘은 달라졌다. 다인종인 것은 그대로인데 분위기는 건물 색깔만큼이나 우중충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이 가져온 결과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인해 직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진 탓이다.2007년 가을. 월가의 모습은 이렇다. 한여름에 시작한 서브프라임 파문이 가을이 오도록 지속되면서 많이들 지친 모습이다. 여름휴가도 반납했고 보너스마저 사라질 지경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그렇다고 월가의 가을이 온통 ‘희뿌연 색’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역발상 투자’다. 주가가 조정을 받은 지금이 저가에 주식을 매수할 기회라는 주장이다. 워런 버핏 등 ‘투자 고수’들이 선두에 섰다.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한 귀퉁이가 내려앉은 헤지 펀드와 사모 펀드들도 투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서브프라임 파문이 휩쓸고 간 월가 가을의 화두는 ‘역발상 투자’다.지난여름 월스트리트 맨 중 마음 편히 휴가를 간 사람은 드물다. 여름휴가를 가기 위해 1년 동안 죽도록 일한다는 미국인들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휴가를 갔더라도 눈과 귀는 월가에 놓고 왔다. 서브프라임 파문이 어떻게 번질지 가슴 졸이는 날들이 계속됐던 탓이다.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업종 중 하나가 월가의 금융 회사다. 특히 투자은행(IB)과 헤지 펀드들이 그렇다. 투자은행들은 모기지 회사로부터 모기지 채권을 사들였다. 이를 묶어 자산담보부증권(CDO)으로 팔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자신들이 떠안았다. 자신들이 투자한 헤지 펀드도 수익률이 높은 CDO를 상당히 편입했다. CDO 중 일정 부분이 부실화됨으로써 투자은행들도 그 손실을 떠안게 됐다. 물론 다른 부문의 수입이 좋아 큰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직원들이 받을 타격은 클 전망이다. 보너스 감소와 해고 바람이 그것이다. 올해 월가 직원들의 연봉은 보너스 삭감 여파로 작년보다 5% 감소할 전망(뉴욕의 컨설팅 회사인 옵션스 그룹)이다. 월가의 보너스가 가장 많이 깎였던 시기는 1998년 롱텀캐피털 파산 때. 당시 월가 직원들의 보너스는 20% 이상 줄었다. 그 후 2000년대 들어 사상 최대 수익 행진을 하는 금융 회사 덕분에 월가 직원들의 보너스도 사상 최고 행진을 해 왔다. 작년 월가의 평균 보너스는 13만7580달러로 2005년의 11만9390달러보다 15.2% 늘어났다. 올해는 이 행진을 멈추고 보너스가 깎이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해고도 목전에 닥친 문제다. 이미 일부 투자은행들은 모기지 부문을 정리하거나 축소하는 방법으로 직원 감축을 시작했다. 옵션스 그룹은 올해 안에 모기지 산업이 정상화되지 못한다면 3명 중 1명은 해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엄청난 연봉을 자랑하던 헤지 펀드와 사모 펀드 매니저들도 연봉 삭감이 불가피하다. 헤지 펀드 등은 운용 수익의 20%가량을 성과 보수로 받는다. 수익을 내기는커녕 손실을 보는 헤지 펀드도 있는 만큼 수입이 예년만 못할 것은 틀림없다. 월가 직원들에겐 쓸쓸한 가을이다.위기는 기회다. 주가가 조정을 받으면서 여기저기서 싼 주식이 나타났다. 기업 가치를 감안하면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그렇지만 ‘혹시나 더 떨어지면…’이란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시류를 따르자고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그렇지만 남들처럼 따라하면 남들만큼 밖에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 남들이 주식을 팔 때 사는 용기를 가져야만 남들보다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다. 투자의 고수들이 이를 실천하고 나섰다. ‘가치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은 “금융시장에 큰 혼란이 있을 때 진정한 기회가 온다”며 깃발을 내걸었다. 혼란이 발생하면 가치를 잘못 산정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에 ‘알짜’를 골라 주울 수 있는 요즘 증시야말로 투자가들에겐 ‘행복한 시간’이란 근거에서다. 실제 버핏은 이번 사태를 기회로 활용해 낙폭이 컸던 금융주를 대거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윌버 로스도 기회를 놓치기 싫은 모양이다. 그는 “최근의 신용 위기가 리스크를 감수하는 투자자들에게 저가 매수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며 자신이 운영하는 사모 펀드 회사 WL로스를 통해 투자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실제 그는 최근 파산 선고를 받은 아메리칸 홈모기지에 5000만 달러를 긴급 대출해 주면서 위기는 기회임을 실천에 옮겼다.‘채권 황제’ 빌 그로스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세계 최대 채권 펀드인 핌코를 운영하고 있는 그로스는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리스크를 떠안는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며 “앞으로 3개월간 저가 매수에 나서겠다”고 역발상 투자에 가세했다.상당수 월가 전문가들도 지금이 알짜 주식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데 동의한다. 우선 주가가 떨어져 주가수익률(PER)이 많이 낮아졌다. S&P500지수를 구성하는 미 500대 기업의 PER는 16.46배(9월 17일 현재)로 지난 5년 평균 21.8배를 밑돌고 있다. 일부 업종의 PER는 23년 만에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노력에 의해 극단적인 신용 경색 현상도 해소되는 단계다. 인수·합병(M&A)도 부활되는 조짐이며 기업들의 순이익 증가율도 여전히 탄탄한 편이다. 잘만하면 시장의 흐름에 휩쓸려 기업 가치 이상으로 주가가 내린 종목을 골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물론 반론도 상당하다. 아무리 역발상 투자가 좋다곤 하지만 주가가 바닥에 다다르려면 한참이나 남은 상황에서 투자에 나서는 것은 오히려 손실만 키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서브프라임 파문이 어디까지 번질 지 알 수 없는 데다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둔화되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특히 미 경제성장률이 2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침체(recession) 가능성도 상존하는 만큼 너무 빨리 역발상 투자에 나설 경우 제 발등을 찍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떨어지는 칼날을 잡지 말라’는 거다.이들은 특히 경제 전망이 썩 좋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상당 기간 우량 주식을 싼 값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만일 역발상 투자에 나설 경우 버핏처럼 장기 투자를 염두에 두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단기 투자에 그쳐야 한다고 이들은 권한다. 주가가 단기 반등할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이들의 주장은 서브프라임 파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서브 프라임 파문→주택 경기 침체 장기화→고용 불안→소비 둔화→기업 이익 둔화→주가 추가 하락’이란 악순환 구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얘기다.역발상 투자를 둘러싼 월가의 논란은 국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국내 증시와 뉴욕 증시의 동조화 현상이 심화되는 만큼이나 논란도 똑같다. 따라서 월가에서 일고 있는 역발상 투자 논란을 지금 국내 증시 현황이나 자신의 투자 전략과 비교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을 듯하다.참고로 미 경제전문지 포천은 전체 운용 자산의 80%를 주식이나 주식 관련 상품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권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이에 따라 위험을 감내하는 정도도 달라지는 만큼 나이별로 주식 비중을 조정하라고 조언한다. 120에서 자신의 나이를 뺀 숫자만큼 주식 비중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50세면 70%(120-50)를 주식 및 관련 상품에 투자하는 게 적정 수준이다. 반면 30세일 경우 90%(120-30)까지 주식 비중을 늘려도 된다는 얘기다. 여기엔 장기 투자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월가에서 일고 있는 역발상 투자 논란.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투자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하영춘 한국경제신문 뉴욕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