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이경숙 과학스토리텔러] 불사의 힘을 지닌 세포가 있다. 이 힘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 힘을 암세포가 쓰면 유기체 전체의 죽음을 불러왔다. 면역세포가 쓰면 질병을 막았고, 줄기세포가 쓰면 망가진 곳이 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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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었는데 내 세포는 죽지 않고 70여 년이 넘게 살아 있다면. 무게가 수천만 톤 규모로 불어난다면. 그리고 그 세포가 어린이들을 죽음에서 구원한다면.

이런 세포가 진짜 있다. 헬라세포(Hela Cell) 얘기다. 지옥(hell)이 연상되는 이름이지만, 지옥과는 전혀 상관없다. 세포의 주인인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의 이름과 성에서 앞 두 글자씩 따왔다.

세포가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맨 앞에 헬라가 있을 것이다. 헬라세포 덕분에 1950년대 이후 많은 이들이 죽음과 질병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수조 개 단위로 불어나는 어마어마한 증식력을 지닌 헬라세포는 수많은 백신의 안전성을 ‘값싸게’ 검증했다. 그래서 백신을 더 빨리, 싸게 퍼트리게 도왔다. 특히, 소아마비 퇴치 공로가 컸다. 헬라세포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 실험실에서 암, 에이즈 등 수많은 질병 연구에 ‘현역’으로 투입되고 있다.

어떻게 늙지도, 죽지도 않고 한 인간의 세포가 불어나고 있는 걸까. 사실 그 불사의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유두종바이러스(Human papillomavirus, HPV) 18형,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것이다. 인간의 세포에 끼어든 바이러스 유전자가 염색체 변형을 일으켰고 세포 속 ‘불사의 힘’을 깨워 사망을 막은 것이다.

‘수명시계’를 되돌리는 효소, 텔로머라제

문제는 그 힘으로 죽지 않게 된 게 암세포라는 데에 있었다. 암세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퍼졌다. 랙스는 암 진단 8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치의와 병원 연구자는 떼어낸 암 조직을 배양했다. 세포의 주인이나 그 가족의 동의 없이 배양된 헬라세포는 전 세계 실험실과 의학실로 퍼져 나갔다. 그 때문에 헬라세포는 의료윤리 논란에 휩싸였지만, 인류는 세포의 ‘화수분’을 얻었다. 실험용 동물의 죽음도 줄일 수 있었다.

학자들은 이 불사의 힘을 연구했다. 이 힘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 힘을 암세포가 쓰면 유기체 전체의 죽음을 불러왔다. 면역세포가 쓰면 질병을 막았고, 줄기세포가 쓰면 망가진 곳이 재생됐다. 이 힘에 학자들은 이름을 붙였다. ‘텔로머라제’ 혹은 ‘텔로머레이스(telomerase)’. 텔로미어(염색체 끝에 붙어 있는 비암호화 DNA 조각)를 길게 만드는 효소란 뜻이다.

염색체 끝에 붙어 있는 텔로미어의 별명은 ‘수명시계’다. 이것의 길이로 세포의 남은 생명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텔로미어가 다 닳아 없어지면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하지 않는다. 세포의 노화, 그리고 죽음이 이어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후유증 중 하나로 꼽히는 폐섬유화가 한 예다. 이 바이러스는 허파꽈리세포를 공격해 텔로미어를 손상시킨다. 그로 인해 조직 재생력이 떨어지면 폐가 딱딱해지는 폐섬유증이 유발된다. 그래서 스페인 암센터는 텔로머라제로 폐세포의 텔로미어를 다시 늘려 주는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다. 이 원리는 이미 임상에서 활용되고 있다. 혈액암 환자에게 골수 줄기세포를 복제해서 넣어 재생, 즉 세포를 회춘시키는 것이다.

세포의 회춘. 기적같이 들릴 수 있지만, 건강한 몸 안에선 일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각종 전구세포(자기 기능이 발현되기 전의 세포)와 면역세포, 생식세포, 줄기세포들은 텔로머라제로 젊음을 얻는다. 단, 체세포는 다르다. 텔로머라제가 억제돼 있다. 이 억제를 푸는 게 암이다. 암은 자신이 감염시킨 세포들이 죽지 않도록 불사의 힘을 깨운다. 암세포의 80~90%가 텔로머라제를 뿜는다. 죽지 않는 암세포들을 다른 세포들보다 빠르게 증식하며 몸 전체의 죽음을 부른다. 불로불사의 천국을 만드는 텔로머라제가 불로불사의 지옥도 만든다.

노벨상 받은 생리의학자가 밝힌 ‘늙지 않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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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텔로머라제’는 함부로 몸에 들여선 안 된다. 영양제든, 주사약이든 텔로머라제를 인위적으로 늘렸다간 자칫하면 내 몸속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헬라세포 같은 암세포에 장악당할 수 있다.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세포의 텔로미어가 짧아지지 않게 돕는 게 좋다.

우리 몸이 ‘위협 반응’을 끊임없이 일으키면 텔로미어가 짧아진다. 늙는다. 텔로미어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엘리자베스 블랙번 캘리포니아대 교수의 연구 결과다. 그러나 불안, 두려움 같은 위협 반응은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몸이 일으키는 반응이다. 완전히 없앨 순 없다. 줄이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위험한 상황 자체를 줄이는 것과 위험한 상황에서 위협 반응보다는 도전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

흥분, 기대, 자신감 같은 도전 반응은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에게서 볼 수 있다. 경기 직전의 운동선수들은 당연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실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높아진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뛴다. 그때 ‘심장을 멈추고 싶어,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라고 반응하면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반대로 ‘이건 경기를 준비시키는 신체 반응이야’라고 반응하는 선수는 좋은 성과를 얻는다.

위협적인 상황에서 도전 반응을 일으키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 심신을 훈련하고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바꿔야 한다.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친절한 마음으로 대하기. 해로운 화학물질을 멀리하고 짬짬이 운동하면서 자기 몸 돌보기, 위협을 일으키지 않는 가족 혹은 사회공동체 만들기. 코로나19, 시장 급변의 위협 앞에 놓인 기업가들에게도 유용할 것 같은 장수 비결이다.

용어 설명 텔로미어는...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에 붙어 있는 비암호화 DNA 조각’이다. 엘리자베스 블랙번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텔로미어를 ‘신발끈 끝에 붙은 보호용 플라스틱 조각, 애글릿(aglet)’ 같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텔로미어는 애글릿처럼 세포 분열 때 염색체 속 DNA를 보호한다. 세포가 분열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방추사’라 불리는 도구가 염색체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가면서 DNA를 복제하고 나눈다. 그런데 이 기구엔 단점이 있다. 지퍼 양쪽 끝의 막음쇠가 그렇듯, 맨 끝을 잡고 움직인다. 맨 끝 부분은 DNA가 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맨 끝엔 유전자암호가 없는 부분, 즉 텔로미어가 붙는다. 복제되지 못하니, 세포 분열 때마다 쪼개져 길이가 짧아지게 된다.


이경숙 과학스토리텔러는...
기자, 사회적기업가의 삶을 멈춘 후 과학을 다시 만났다. 과학이라는 창문을 통해
우주와 생명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다. 공역서로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저서로 <산타와 그 적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이야기> 등이 있다. 빅이슈 미디어사업단장 겸 세종학당 이사.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9호(2021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