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 지난해 12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동안 퇴직연금 가입자 중에서 적립금을 중도에 빼 쓴 근로자가 7만2830명이나 된다. 중도인출 금액도 2조8000억 원에 육박한다. 이들은 무슨 이유로 퇴직급여를 중도에 헐어 쓴 걸까. 그런데 퇴직급여는 필요하면 아무 때나 찾아 쓸 수 있는 걸까.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죠. 나한테 한 대 처 맞기 전까지는요.” 공포의 핵 주먹으로 불리던 헤비급 복서 마이크 타이슨이 한 말이다. 그렇다. 살다 보면 계획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부족해서일까. 애당초 목표를 너무 무리하게 세워서 그런 걸까. 이도 저도 아니면 계획을 세울 때 예상하지 않았거나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노후 준비만 해도 그렇다. 퇴직급여는 직장인의 소중한 노후생활비 재원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퇴직급여만큼은 손대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정년까지 남은 시간에 예상치 못한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장 다급한 일이 생기면 퇴직급여에 손을 대야 할 수도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강 건너 불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이런저런 이유로 퇴직금과 퇴직연금 적립금을 중도에 찾아 쓰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주택 구입과 전세자금이 부족한데 중간정산 할 수 있나

퇴직급여는 근로자의 노후생활비 재원이므로 법에서 정한 사유가 아니면 중도에 찾아 쓸 수 없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퇴직급여를 찾아 쓸 수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퇴직급여제도로 퇴직금과 퇴직연금을 모두 인정하고 있는데, 퇴직급여의 종류에 따라 중간정산 가능 여부와 조건에 차이가 난다.

퇴직금 제도하에 있는 직장인부터 살펴보자. 2012년 7월에 퇴직금 중간정산 요건이 강화되면서 사용자가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일괄적으로 퇴직금 중간정산을 실시할 수는 없게 됐다. 하지만 개별 근로자는 법에서 정한 사유에 해당되면 중간정산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언제 퇴직금을 중간정산 할 수 있을까. 먼저 무주택자인 근로자가 본인 명의로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에 퇴직금을 중간정산 할 수 있다. 주택 보유자가 새로이 주택을 구입할 때에는 중간정산을 할 수 없다. 주택 구입과 마찬가지로 무주택자인 근로자가 주거 목적으로 전세보증금을 부담하는 때에도 중간정산을 할 수 있다. 다만 전세보증금 마련을 위한 중간정산은 한 사업장에서 한 번만 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었는데 중간정산 할 수 있나

근로자 본인과 배우자, 그리고 부양가족이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때, 질병이나 부상에 대한 의료비를 근로자가 부담해야 하는 때에도 중간정산을 할 수 있다. 과거에는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의료비 크기에 상관없이 중간정산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 요양에 따른 퇴직금 중간정산 신청이 늘어나자 요건을 강화해 지금은 근로자가 부담하는 의료비가 연간 임금 총액의 12.5%를 초과해야 퇴직금을 중간정산 할 수 있다.
이 밖에 근로자가 최근 5년 이내 파산선고를 받았거나 개인회생 절차 개시를 결정받은 경우에도 중간정산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중간정산을 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에만 중간정산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등 사회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중도인출을 할 수 있도록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

임금피크로 급여가 줄어드는데 중간정산 할 수 있나

근로자의 정년을 연장하는 대신 연장된 근로기간 동안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는 사업장이 적지 않다. 그런데 퇴직금제도에서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면, 근로자가 퇴직급여를 손해 보는 일이 발생한다. 퇴직금 제도하에서 퇴직급여는 퇴직 이전 30일분 평균임금에 계속근로기간을 곱해서 산정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임금피크제로 임금이 줄어들면 덩달아 퇴직급여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임금피크 적용을 앞둔 A(55)씨를 예로 들어보자. A씨는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 30년을 일해 왔고, 현재 30일분 평균임금은 600만 원이다. 만약 A씨가 지금 퇴직하면 퇴직금으로 1억8000만 원(=600만 원×30년)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임금피크를 받아들이면 5년을 더 일하는 대신 매년 임금이 10%포인트씩 삭감된다고 해 보자.

A씨가 임금피크 이후 5년이 지나 60세가 되면 30일분 평균임금은 300만 원, 계속근로기간은 35년이 된다. 이렇게 되면 A씨는 퇴직급여로 1억500만 원(=300만 원×35년)을 받게 된다. 5년을 더 일하고도, 퇴직급여는 7500만 원이나 덜 받으라고 하면 억울하지 않을까.
이 같은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자가 기존의 정년을 연장하거나 보장하는 조건으로 임금을 줄이는 제도를 시행하는 경우에는 근로자로 하여금 퇴직금을 중간정산 할 수 있게 했다.

이 밖에 사용자가 근로자와 합의에 따라 소정근로시간을 1일 1시간(또는 1주 5시간) 이상 변경해 3개월 이상 계속 일하도록 하는 등 근로시간 단축으로 근로자의 퇴직금이 감소되는 경우에도 중간정산이 가능하다.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도 중간정산 할 수 있나

이번에는 퇴직연금을 살펴보자. 퇴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는 원칙적으로 중간정산을 할 수 없다. 그러면 퇴직연금 가입자는 다급한 사정이 있어도 퇴직급여를 찾아 쓸 수 없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가입자도 법에서 정한 사유에 해당되면 퇴직급여 적립금을 중도에 인출할 수 있다.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도 DC형과 마찬가지로 법정 사유에 해당하면 적립금을 중도인출 할 수 있다.

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적립금을 중도인출 할 수 있는 사유는 몇 가지만 빼면 퇴직금 중간정산 사유와 동일하다. 무주택자가 주택을 구입하거나 전세보증금을 부담하는 경우, 본인·배우자·부양가족이 6개월 이상 요양하고 임금 총액의 12.5% 이상을 의료비로 사용한 경우, 근로자가 5년 이내 파산선고나 개인회생 절차 개시를 결정받은 경우,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에는 금융사에 예치돼 있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중도인출 할 수 있다.

그런데 임금피크 적용을 받거나 근로시간 단축을 이유로 임금이 줄어드는 경우에는 적립금을 중도인출 할 수 없다. 이 경우 퇴직금제도하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중간정산을 받을 수 있는데, 왜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중간정산을 할 수 없는 걸까. 앞서 설명했듯이 퇴직금제도하에서 임금피크를 적용받으면 퇴직금이 줄어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DC형 퇴직연금에서는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DC형 퇴직연금 제도를 운영하는 회사에서는 근로자가 1년 일하면 임금의 12분의 1 이상을 근로자의 퇴직계좌에 이체해 준다. 따라서 임금피크 이후 급여가 줄어들면 미래에 퇴직계좌로 이체되는 퇴직급여는 줄어들지만, 이미 퇴직계좌에 이체된 퇴직급여에는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중도인출을 허용하지 않는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임금이 줄어드는 경우도 마찬가지 이유다.
DB형 퇴직연금 가입자도 중도인출 할 수 있나

DC형과 달리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중도에 인출할 수 없다. DB형 퇴직연금에서 퇴직급여 산정 방식은 퇴직금 제도와 같다. 즉, 퇴직 이전 30일분 평균임금에 계속근로기간을 곱해 퇴직급여를 산출한다. 따라서 임금피크를 적용받아 평균임금이 줄어들면 퇴직급여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는 DB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퇴직급여를 손해 보고서라도 임금피크제를 수용해야 하는 걸까.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는 사업장에서는 DB형과 함께 DC형 퇴직연금을 도입하는 곳이 많다. 그리고 근로자가 임금피크에 이르렀을 때 근로자로 하여금 DB형에서 DC형으로 갈아타도록 하고 있다. 전환 시점에 임금피크 이전까지 발생한 퇴직급여는 고스란히 근로자의 퇴직계좌에 이체된다. 임금피크 이후 퇴직할 때까지 매년 임금의 12분의 1 이상이 해당 퇴직계좌에 입금된다. DC형으로 변경한 이후에는 법정 사유에 해당되면 적립금을 중도인출 할 수도 있다.

어떤 사유로 중도인출을 많이 하나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어떤 경우에 퇴직급여를 중도인출 할까. 2019년 한 해 동안 퇴직연금을 중도인출 한 근로자는 7만2830명이다. 이 중 본인, 배우자, 부양가족의 장기 요양에 따른 의료비를 마련 하려고 중도인출 하는 사람이 2만7430명(37.7%)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 순위는 무주택자의 주택 구입이 30.2%(2만2023명), 무주택자 주거 임차가 22.3%(1만6241명)를 차지했다.

이번에는 중도인출 금액을 살펴보자. 2019년 한 해 퇴직연금 가입자가 중도인출 한 퇴직연금 적립금은 2조7758억 원이다.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1조4382억 원(51.8%)은 장기 요양을 이유로 찾아 쓴 금액이다. 다음으로 주택 구입 30.2%(8382억 원), 주거 임차 14.2%(3940억 원) 순으로 나타났다.

장기 요양 인원이나 금액 면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것을 두고, 중도인출 요건이 너무 느슨해서 그렇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2020년 4월 30일부터는 해당 근로자의 한 해 임금 총액의 12.5% 이상을 의료비로 부담한 경우에만 중도인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중도인출 사유를 연령별로 살펴보면, 시기별로 어떤 용도로 목돈이 들어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0대 중도인출자(4019명) 중에는 주거 임차자금을 마련하려고 중도인출을 했다는 사람이 54.3%(2185명)로 가장 많았다.

30대(2만8230명) 중에는 주택 구입자금을 마련하려고 중도인출을 한 사람이 36.8%(1만391명)로 1순위를 차지했고, 40대(2만4946명) 중에는 장기 요양 의료비 때문에 중도인출 했다는 직장인이 44.9% (1만1197명)로 가장 많았다. 50대(1만4144명)도 40대와 마찬가지로 장기 요양이 59.0%(8341명)를 차지했다.

중간정산이나 중도인출 할 때도 세금을 내나

근로자가 퇴직금을 중간정산 하거나 퇴직연금 적립금을 중도인출 할 때도 세금을 내야 할까. 그렇다. ‘소득세법’에서는 중간정산 또는 중도인출 사유에 해당해 퇴직급여를 미리 지급받는 경우에는 그 지급 받은 날에 퇴직한 것으로 보고, 퇴직소득세를 부과한다.

회사에서는 중간정산(중도인출) 할 때 근로자에게 퇴직소득세 원천징수 영수증을 발급해 주는데, 이를 잘 보관해 둬야 한다. 회사에서 실제 퇴직할 때는 중간정산 한 다음 날부터 퇴직하는 날까지를 계속근로기간으로 보고 퇴직급여를 산출하고 퇴직소득세를 부과한다.
이때 과거 중간정산을 했을 때 퇴직급여와 최종 퇴직할 때 받는 퇴직급여를 합산해서 퇴직소득세를 산출한 것과 그렇지 않고 산출한 것의 세 부담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만약 합산해서 퇴직소득세를 산출했을 때 부담이 덜 하다면, 둘을 합산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때 중간정산 당시 퇴직소득세 원천징수영수증이 편리하다.

지금까지 퇴직급여 종류별로 중간정산(중도인출)이 가능한 조건과 세금, 주의사항을 살펴봤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면 퇴직급여를 중도에 찾아 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노후를 위한 저축을 중단할 수는 없다. 어떻든 삶은 계속될 것이고, 남은 삶이 얼마나 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9호(2021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