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핑크 & 그린 와인잔(아르누보), 실버 오버레이 디너 접시 &
에칭 수프 접시(아르누보), 산당화가 아름다운 오렌지 화기(아르누보).
[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앤티크의 발견> 저자 | 사진 서범세 기자] 겨울밤의 낭만, 일상사 축하의 자리에
함께하는 신의 물방울, 와인의 역사.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많은 시간을 제약받으면서 한 해를 허망하게 보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도 다 가고 2월을 맞고 있다. 요즘처럼 바깥에서의 활동이 제약받는 시기에 가장 부각되는 곳은 아마도 집이라는 공간일 것이다.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집이 사무실이고, 학교이고, 식당이고, 카페의 역할을 하고 있다. 떡 본 김에 쉬어 가라고 기왕 우리들의 집이 식당이며 카페의 역할을 하게 됐다면 그 또한 멋지게 꾸미고 즐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저녁 6시가 되기 전에 어두워지는 긴긴 겨울밤에 요즘 집에서 즐기는 핫 아이템으로 차와 와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겨울밤의 낭만으로 여겨지는 와인은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사 축하의 자리에 늘 함께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사진) 스털링 오버레이 디캔터(아르누보).
(사진) 레드 & 골드 무라노 와인잔(아르누보).
고대 이집트인의 포도주 사랑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매우 밀접하게 다가와 있는 와인은 서양 역사에서 커다란 사건의 배경으로 등장하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아이템이었다. 그렇다면 와인은 언제부터 인류와 함께했을까.
와인은 그 어떤 다른 술보다도 가장 일찍 인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많고 많은 과일 중에서 포도만이 유일하게 껍질 안에 발효물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주의 생산은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신석기 말에 자생포도의 열매가 우연한 기회에 발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이집트인은 포도주를 매우 사랑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집트인들은 커다란 자루에 포도송이를 집어넣고 밟아 으깬 뒤 막대기로 자루를 비틀어 즙을 짠 다음 지하창고에서 발효시켜 술을 만들었다. 1922년에 발굴된 투탕카멘의 묘에서 여러 개의 포도주 항아리가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발굴된 포도주 용기 뚜껑 위에는 포도농원, 수확일, 즙을 짠 날, 색깔, 양조자 이름과 상표가 새겨져 있었으니 현대판 포도주 라벨이라 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정복의 역사와 함께 세계 곳곳으로 포도나무의 재배를 퍼뜨렸다. 로마군대는 정복한 지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전략의 일환으로 포도나무를 옮겨 심고 원주민에게 포도나무의 재배 및 포도주의 생산 기술을 전수했다. 그리고 중세에 이르러 기독교가 발전함에 따라 포도주가 널리 전파됐다.
1년 내내 빵과 포도주로 집전하는 미사를 거르지 않기 위해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포도 재배에 정성을 다하는 일꾼이 됐다. 중세의 도시 생활에서 포도주가 매우 귀한 물품이 된 것에는 미사를 와인으로 집전하게 된 것 외에도 유럽의 매우 열악한 식수 사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유럽의 물은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경우가 많았으며, 물 대신 마시던 맥주는 양조와 저장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 보관이 불가능했다.
이에 반해 포도주는 2세기경에 발명된 오크통을 이용해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기에 비교적 장기간 보관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포도주는 기본적인 음료수로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게 됐고 포도주의 수요는 커져만 갔다. 17세기까지도 이어졌던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시던 풍습은 유럽의 나쁜 식수 사정을 반영하는 습관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와인을 물을 소독해 주는 용도로도 썼으며 실제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40세 전까지 물에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포도주를 결코 마신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와인은 유럽의 많은 전쟁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고 많은 역사적 사건들의 주역이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귀족들만 소유하던 비싼 포도즙 압착기를 일반인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변화 외에 신흥 사회 주도 세력인 부르주아 계급이 고급 와인을 대량 소비하면서 와인 시장이 팽창했고 와인 산업은 새로운 발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1820년대에는 와인을 유리병에 담아 팔기 시작했고 비로소 와인병 규격이 통일되는 전기를 맞게 됐다.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가속화된 산업혁명과 더불어 와인 산업도 크게 변했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대량 생산, 대량 소비가 와인 산업에도 도입돼 늘어 가는 와인 소비를 감당할 수 있도록 대량 생산 체제로 돌입했다.
이즈음부터 보르도 지방에서 포도원을 소유한 생산 공장에 ‘샤토(château)’라는 귀족적인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포도원이나 와이너리를 구입한 사람들은 주로 돈 많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는데, 이들은 귀족에 대한 열등감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귀족 문화를 모방했고 그 일환으로 와이너리에도 ‘샤토’라는 우아한 명칭이 붙게 됐다. 사실 보르도와 함께 유명한 와인 산지인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와이너리에 샤토라는 말 대신에 ‘도맹(domain)’이라는 말을 붙인다.
(사진) 조선의 유기와 아르누보 디너 접시가 콜라보돼 동서양의 조화가 아름답다.
인류사에 함께한 와인이 주는 위안
‘신의 물방울’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는 와인은 딱히 축하 자리가 아니더라도 식사하면서 반주로 한 잔 곁들일 정도로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다. 코로나19의 영향 아래에서 힘들게 견뎌 내야 하는 지난한 시간이 올해에도 이어질 듯하다.
비대면의 환경 속에서 친숙한 공간으로서 나의 집이 거듭 태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구수한 커피와 함께 일을 즐기고, 만날 수 없는 친지들과의 아쉬움을 향기로운 와인으로 위안 삼으며 경험해 보지 못한 환경에 익숙해지기로 다짐해 볼 때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y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9호(2021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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