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윤종석

주사기로 찍은 점, 일상의 파편을 담다
삶에도 고유한 향이 있다. 옳은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연꽃처럼 맑고 청아한 향기가 피어난다. 그런 삶의 태도로 그림을 그렸다면, 그림에서도 역시 좋은 향기가 나기 마련이다. 윤종석 작가는 회화 작가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흔히 쓰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지만, 그의 결과물은 완전히 색다른 신선함이 압권이다.

오래 두고 볼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나오듯 쉼 없이 긴 시간을 함께해서 깊고 온화해진 그림 향에선 더 큰 위로를 받게 된다. 그것은 감흥이다. 작품이 지닌 순수노동력의 온전한 힘은 눈을 감았을 때 비로소 온몸에 스며든다.

윤종석 작가는 ‘주사기 작가’로 통한다. 말 그대로 바늘을 제거한 주사기통에 물감을 넣어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간혹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그 작가의 경쟁력이 된다. 아주 획기적인 재료를 선택하거나 평범한 재료를 비범하게 사용하면서 차별화를 꾀한다. 윤 작가의 경우엔 후자다.

줄곧 주사기를 사용한 기법을 구사하면서도 그동안 몇 차례의 작품 변화를 보여줬다. 우선 아버지의 초상이나 어머니의 손, 주변 지인의 초상 등 인물 소재 시리즈물의 대형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빨래를 마친 옷가지들을 개다가 우연히 발견한 형상들의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재미와 읽는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주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의 파편을 모으듯 단순한 풍경의 단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윤 작가는 “주변을 들여다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채집하듯 기억을 기록한다”며 “이것들이 모이면 어제의 오늘을 통해 내일의 오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스치는 ‘자신의 날들’인 일상을 기록하고 채집한다. 매일매일 보는 것들 중에서 남겨두고 싶은 이미지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그 기록들 중에서 작가의 감정에 특별한 감흥을 전하는 것들을 회화나 드로잉으로 옮긴다. 무심결의 수많은 시간과 피사체의 잔상들을 깨알보다 작은 점들이나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직선 혹은 흩뿌린 실선으로 재창조해낸 것이다. 그의 작업은 ‘하찮음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촘촘히 잘 짜였으면서도 본능적인 자유로움이 공존한다.

보통 붓으로 그릴 때, 붓의 크기에 따라 물감이 칠해지는 면적도 큰 차이를 보인다. 위아래 혹은 좌우로 붓질을 할 경우 그 면적의 너비는 수십 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사기를 활용하는 윤종석은 한 번의 붓질(손짓)로 단 하나의 점만 찍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크기의 작품 한 점을 완성하려면 수십만 개 이상의 점을 찍어야 한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방법이다. 마치 수도자의 자세로 작품에 임한다. 게으름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로지 정직한 노동의 대가로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된다.
주사기로 찍은 점, 일상의 파편을 담다
“최근의 작업은 수없이 많은 일상의 사물과 관계 속에서 무의식이든 의식적이든, 어떤 소재나 상황에 반응하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됐어요. 이때 선별한 이미지들과 연결된 역사적 시간을 추적하고 채굴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선택된 이미지들이 현재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고, 그 과거가 미래에 어떤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가를 찾아봐요. 켜켜이 쌓인 과거를 밟고 살아가는 현재의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죠. 이것은 마치 여러 단계의 질문을 풀어가며 자신의 내면심리를 알아가는 일종의 심리테스트와도 같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윤종석의 신작들은 ‘현재의 내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나누는 심리게임’과도 같다. 여전히 주사기를 활용해 일일이 수만 개의 점을 찍어 그렸다. 그린 방법이야 짐작돼도 작품의 내용은 아리송하다. 알 듯 모를 듯 묘한 형상들이 어우러진 작품에서 의외의 비밀들을 만나게 된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시점에서 가슴속 깊이 훅 들어오는 감동의 여운이 있다. 윤종석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의 힘이자 매력이다.

특히 2020년 이후의 신작들엔 남다른 짜임새의 깊이가 돋보인다. 작품 제목의 괄호에 써진 숫자에 비밀이 있다. 그 숫자는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윤 작가는 평소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이미지를 발견하면, 그 소재에 대해 추가로 검색해 알아간다. 검색한 같은 날짜의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추가로 검색하다가 주목되는 3~4개의 이미지를 선별한 후, 그중에 1~2개 이미지를 처음 시작점에서 흥미를 끌었던 소재와 연결시켜 작가만의 창의적인 이야기로 재해석해 완성하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작품 <이기적 진실(0222)>을 보자. 양들이 방울 달린 왕관을 쓰고 있는 장면이다. 윤 작가는 지난해 ‘2월 22일’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흥미롭게 생긴 방울 달린 왕관을 발견한다. 그 용도가 궁금해 추가로 검색했다. 그것의 용도는 왕관이 아니라, 옛날 흑인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에 채웠던 것이었다. 순간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연이어 ‘같은 날(0222)’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니, 마침 세계 최초의 복제 포유동물인 새끼 양 돌리가 태어난 날이었다. 이 두 소재를 합친 이미지로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은유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주사기로 찍은 점, 일상의 파편을 담다
또 다른 작품 <구도자(1104)>에선 흰 소가 연꽃 봉오리를 뿔에 매달고 있다. 이 역시 어느 날(11월 4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소를 키우는 모습을 만난다. 소와 함께 살며 소의 오줌으로 머리를 감을 정도로 신성시 여기는 모습이 묘하게 느껴졌다.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TV를 시청한 같은 날짜의 과거 기록에 마침 성철 스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심우도(尋牛圖)>가 떠오르고,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구도 과정을 신령스러운 흰 소에 비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매달린 분홍빛 연꽃이 우리가 좇는 이상향으로 보인다.

어린 조카로 인해 얻은 교훈을 작품에 옮기기도 했다. 작품 <내일을 위한 기념비(1212)>가 그 경우다. 조카에게 장난감을 사주러 마트에 들렀다. 조카의 손에 든 레고블록을 보며, 저 작은 조각 하나로 별스런 세상을 다 만드는구나 싶었다. 다시 인터넷을 뒤졌다. 이날은 유독 전쟁에 관한 사건들이 많았고, 학문적인 성과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았다. 상반된 두 이미지와 레고블록 한 조각의 만남! 아주 작은 한 조각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세상의 모습은 당사자인 우리가 하기 나름이겠다 싶은 교훈으로 다가왔다.

대부분의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을 소재로 삼아 그림에 옮긴다. 여행에서 만난 풍경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사건의 심리적 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일 수도 있으며,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걱정하는 개인적 대의의 실천일 수도 있다. 윤 작가가 보여주는 표현의 영역도 매우 폭넓은 깊이를 자랑할 만하다. 스스로 게으름을 경계하며 선택한 노동집약적인 화법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작가의 덕목을 지녔다. 윤종석의 작품 가격은 30호(90.9×72.7cm) 1000만 원, 50호(116.8×91cm) 1600만 원, 100호(130.3×162.2cm) 2500만 원, 150호(227.3×181.8cm) 3600만 원, 200호(259×194cm) 4200만 원 정도로 형성돼 있다.
주사기로 찍은 점, 일상의 파편을 담다
1 <이기적 진실(0222)>, 캔버스와 종이 콜라주에
아크릴릭, 112×162cm, 2020년
2 <내일을 위한 기념비(1212)>, 캔버스와 종이
콜라주에 아크릴릭, 91×117cm, 2021년
3 <구도자(1104)>, 캔버스와 종이 콜라주에
아크릴릭, 91×117cm, 2020년
4. <고백>, 캔버스에 아크릴릭, 260×162cm, 2010년

김윤섭 미술평론가는...
미술평론가 김윤섭은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숙명여대 겸임교수,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2021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아이프AIF 아트매니지먼트 대표,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서울시 미래유산보존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아티스트 윤종석은…
한남대 미술교육과와 같은 대학의 일반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서울과 대전, 일본, 이탈리아,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15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동안 2006 화랑미술제 베스트 톱10 작가 선정, 롯데화랑 유망 작가 지원 프로그램 선정, 대한민국청년비엔날레 청년미술상,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및 특선, 대전시 초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중국 베이징 아트사이드스튜디오, 장흥가나스튜디오, 프랑스 파리 시테 예술공동체, 대만 타이페이 아티스트빌리지 등의 레시던시 프로그램에 초대돼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코오롱, 하나은행, 외교통상부, 두바이왕실, 벤타코리아, ㈜파라다이스 아트센터 쿠, 가나아트센타, 대전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보바스기념병원. 골프존문화재단, 제주현대미술관,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수원시립미술관, 롯데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글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