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김성호
책은 욕망의 집이다. 흰 종이의 텍스트 너머에 인간의 욕망이 숨겨졌다. 김성호 작가는 그 인간 욕망의 허와 실을 책에서 들춰낸다. 책(冊)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글자나 그림으로 기록해 꿰맨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설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인류의 모든 생각을 담아 후손에게 전하는 유용한 매개체이기도 하다. 결국 김 작가에게 책이란 소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생각의 도구인 셈이다 “예술, 그 모호함 속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마치 진리의 책을 찾는 ‘보르헤스 도서관’의 사서나,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세계를 구조화 혹은 해석하려는 노력을 ‘끝없이 쌓여가는 책 이미지’로 드러냈다. 한편으론 무한히 반복되는 이 지난한 과정들을 와해하고 틈을 만들어내려고도 시도한다. 그 존재로 등장하는 사물들과 그 경계를 오가며 표현하는 그리기 방식이 내 작품을 읽어내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탑처럼 쌓인 책, 복잡한 구조와 틀, 각각의 경계에 놓인 사물들(장난감, 포스트잇, 책갈피 등). 김성호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작품은 책의 표지나 타이틀이 될 이미지와 텍스트를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물론 실재하는 책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주제에 어울릴 만한 가상의 책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책들로 만들어낸 공간적 구성미도 굉장히 사실적이다. 평면의 회화지만, 에스키스 단계에서 입체물로도 미리 만들어 형태를 구성해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여러 부분으로 나눠진 작품들을 하나로 결합하거나 화면이 비정형적으로 돌출되는 캔버스를 직접 제작하기도 한다. 제목을 보면 작품이 보인다. 김 작가 역시 애용하는 작품 제목들이 있다. 주로 ‘볼륨 타워(volume tower)’, ‘신기루(mirage)’, ‘고원(tableland)’ 등이다. 특히 책들이 쌓인 <볼륨 타워>가 초기부터 사용해온 대표적인 예다. 책의 속성을 ‘검증된 정보의 집적’이라고 할 때, 인간적 삶은 책을 통해 무한대로 열려진 정보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김 작가는 그러한 인간들의 삶을 마치 순시 혹은 순례하듯 장난감처럼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그는 이를 ‘스스로 쌓아온 구조들에 자신이 갇히는 모순된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속성은 또 다른 시리즈 <테이블랜드>나 <미라지> 등과도 연계된다.
“인간이 파악 불가능한 영역(자연)의 개입을 드러낸 <미라지> 시리즈를 통해 다시금 해체되는 구조를 표현했다. 그 과정에서 구조와 동화돼가는 나의 모습을 <플라스틱 가든(plastic garden)> 시리즈를 통해 이야기했다. 무한히 열려진 세계를 파악 가능한 형태로 구조화하려는 노력은 스스로를 속박하는 형태로 나아가게 됨과 동시에 단절에 의한 불안을 야기한다. 이는 추억(retro)으로 보정된 안전한 자신만의 공간(topia)을 떠올리며 과거로 회귀하는 레트로피아(retrotopia)로 연결된다. 인간이 이룩한 많은 사회제도적 성취들이 그 부작용을 드러내는 오늘날의 사회 모습은 이러한 회귀(回歸)를 부추기는 것 같다.”
책을 오브제로 한 은유적 표현
김 작가의 작품은 책을 중심 테마로 삼아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과 구조가 지닌 다양한 문제성을 은유적으로 해석해낸다. 그가 재현해낸 정교한 환영은 ‘책(들)’을 통한 초현실적 풍경이기도 하고, 회화와 조각 및 설치적 요소를 넘나드는 복합적인 조형어법을 보여준다. 특히 ‘책’의 지속적인 탐구 과정은 ‘비언어의 미술 언어를 다양하게 시각화하는 작업’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전 작품 속엔 책장 혹은 책들과 갖가지 장난감 형상이나 기호들(표지판, 캐릭터)이 은유적인 조화를 연출했다. 하지만 최근 <볼륨 타워> 시리즈엔 피규어(figure) 대신 상하로 길게 늘어진 리본이 등장한다. 쌓인 책들 사이로 잘 정돈된 고서(古書)들이 포진했다. 그 사이사이엔 기명절지 소재들이 속속 들어앉았다. 굳이 힘들여 해석하지 않아도,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조우했음을 첫눈에 알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구조의 폭과 범위가 훨씬 광대(廣大)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리본의 역할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두 시간대를 꽉 조여 맨 것이 아니라 느슨하고 여유롭게 흐르듯 걸쳐 있는 것이 작가적 관점으로 읽힌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초월적 신념’이다.
김 작가의 그림은 표면의 시각효과가 굉장히 명징하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글레이징(glazing) 기법 덕분이다. 마치 ‘익은 음식의 표면을 윤기 나게 코팅시키는 조리법’을 적용한 것과 같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처럼, 매끄럽게 마무리된 화면은 보는 이의 눈을 더없이 즐겁게 한다. 여기에 유화 특유의 밀도감과 깊이까지 더해져 극사실화로서의 완성도를 잘 보여준다. 특히 최근 작품의 경우 우리나라 전통의 ‘책거리(冊巨里)’ 요소를 접목해 특유의 평면성을 이끌어냈다. 부드러운 유화의 터치와 간결한 동양적 먹 선의 기묘한 조화로움이 일품이다. 서양의 유화와 동양의 채색화 중간 영역을 넘나드는 색조도 ‘김성호식 공감각’을 자아내는 요소다. “경험은 실험을 통해 얻을 수 없다. 만들 수도 없다. 반드시 겪어야 얻는다.” 소설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말이다. 반드시 스스로 겪어야만 온전히 자신의 경험이다. 그래서 책의 역할이 중요하다. 책을 통해서 온갖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서고(書庫)를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 역시 책이 그의 관심사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김 작가의 전시에서 “작품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높게 쌓인 책들을 보면 그간의 삶에 대한 과정과 노력을 확인받는 기분이 든다”고 얘기하는 관람객이 종종 있다고 한다. 김 작가의 그림에서 경험이 투영된 책의 역할이 제대로 발현된 결과다.
“삶의 과정 사이사이에 소소한 기억들이 함께 등장하는 사물들과 연결하는 걸 즐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음이 더더욱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간혹 자신에게 선물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했다는 고객의 말을 듣게 된다. 예술 영역 안에서 시작된 작가적 고민이 작품을 만나는 사람들의 삶과도 연결되고 의미가 확장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다. 작업하는 것은 곧 의미(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에게 작품은 무엇인가 찾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쌓아온 모든 것(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책만큼 인류사를 관통하며 통섭을 이끌어낼 매개체도 없을 것이다. 김 작가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의식을 책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로 쉽고 편안하게 풀어냈다. 그 특유의 밝은 색감과 흥미로운 사물들로 책이 지닌 상징적 역할과 의미에 다가섰다. 누군가에겐 그 책이 마음 속 집이고, 추억의 보고이며, 상상했던 드림시티가 됐다. 다양한 시대성과 환경을 넘나드는 화면 구성으로 회화적 일루전의 묘미를 한껏 선사해준다. 김 작가 작품의 전시 가격은 대략 100호(130.3×162.2cm) 크기가 1500만~1800만 원 정도다. 김성호 작가는…
1980년생. 대구대 회화과, 홍익대 일반대학원 회화과 석사 및 박사과정 등을 졸업했다. 그동안 박여숙갤러리, 갤러리현대, 박수근미술관, 영은미술관 등에서 7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주로 볼륨타워, 신기루, 고원 등의 테마를 중심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과 구조가 지닌 다양한 문제성을 은유적으로 해석한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재현해낸 정교한 환영은 ‘책(들)’을 통한 초현실적 풍경이며, 회화와 조각 및 설치적 요소를 복합적으로 아우른 형식이다. 특히 ‘책’의 지속적인 탐구 과정은 ‘비언어의 미술 언어를 다양하게 시각화하는 작업’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글·사진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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