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 트레일 러너 임재영 기자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마라톤. 여기 그 마라톤을 넘어 울트라 마라톤(울트라 마라톤은 일반 마라톤 풀코스 42.195㎞ 이상을 달리는 것으로 세계적인 대회는 보통 100㎞ 이상 초장거리를 의미)까지 완주하는 중년의 남성이 있다. 32년 차 기자 임재영 씨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100m도 채 걷지 않으려던 그가 이제는 울트라, 그것도 트레일 러닝까지 정복하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그는 어쩌다 100km나 뛰게 됐을까.
[special]“100km 달리기, 새로운 도전의 문이었죠”
[트레일 러너에게 꿈의 무대로 불리는 울트라트레일 몽블랑(UTMB)에서 101km 레이스를 완주했다. 사진 임재영]

스위스 철학자인 H.F. 아미엘은 “세상은 지혜보다는 의지에 달려 있다”고 했고, 탈무드엔 “네 발이 네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너를 이끌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렇다. 인간은 인생의 매 순간 자기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행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혹은 삶이 팍팍해질 때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길 주저하게 되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또다시 실패할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다. 하지만 뭐든 ‘시작이 반’이고, 결국 기회는 하고자 하는 자에게만 주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중년들 상당수가 다가올 제2, 제3의 인생을 꿈꾸며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저마다 도전의 계기는 달랐지만, 이들의 시작은 대개 흡사했다. 그저 ‘한번 해보자’는 순수한 의지와 열정에서다.

울트라 러너 임재영(58) 씨도 불과 10여 년 전까지 자신이 100km 이상의 거리를 뛸 수 있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1990년부터 제주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2007년 건강 적신호를 기점으로 제주 곳곳을 찾아다니고 자연에서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한 임 씨는 인생에 있어 상당한 변화를 맞이했다. 걷기와 등산을 생활화하면서 경이로운 제주의 자연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했다. 사진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지면서 사진 기사에 새로운 접근과 아이디어가 나왔고, 사진전 또한 열게 됐다.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던 중에 취재 또한 걷기와 마라톤에 관심을 더욱 기울이게 됐다.

그러던 중 오지 마라토너 안병식 선수와 인연을 쌓게 됐고, 안 선수가 디렉팅한 제주 100km 트레일 러닝 대회에서 완주하며 트레일 러닝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됐다고. 이후 그는 사하라사막 마라톤을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하라를 넘어 세계 10대 울트라 트레일 러닝 대회를 목표로 삼았다. 10대 대회 중 7개의 대회인 사하라사막, 홍콩, 울트라트레일몽블랑(UTMB), 호주, 그란카나리아, 타라웨라, 그랑레드를 완주하며 그야말로 아름다운 도전의 중년기를 보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지난해 저서 <어쩌다 100km>까지 출간한 울트라 중년 임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07년 6월, 건강의 적신호가 오면서 걷기 시작한 것이 트레일 러닝으로 이뤄지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어땠나요.
“건강을 등한시한 채 술자리를 자주 가졌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유대를 쌓는 것을 즐겼는데 그만 도를 넘었습니다. 운동보다는 몸에 좋다는 무슨 즙을 다량 섭취한 것도 원인이었습니다. 결국 간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죠. 며칠이 지나도 호전이 되지 않아 생사의 기로에 서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퇴원하고 나서 한라산 중턱의 사찰을 찾아 명상을 하다가 근처 암자로 가는 트레일을 걷기 시작한 것이 새로운 전환점이었습니다.”

걷기를 시작으로 등산학교까지 입문하셨는데, 등산학교에 간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변화를 이끌었나요.
“걷다 보니 제주의 오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름은 작은 화산체로 제주 지역에 368개가 있는데, 비고가 100m에서 200m 정도로 오르내리는 운동을 하기엔 최적이었습니다. 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제주의 풍광도 일품이었고요. 걷기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주말이면 오름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산행 멘토’로 부르는 친구에게 오름 길을 물어보거나, 동행할 때가 많았는데 그 친구가 한라산등산학교 수료생이었습니다. ‘나도 등산학교에 다녀볼까’라는 말을 했을 때 무시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는데 오기가 생겨 등록했죠. 한라산등산학교는 인생에서 탁월한 선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보다 체계적인 걷기가 가능했습니다. 스스로 걷기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토양이었습니다. 사전 준비와 장비, 안전 산행, 위험 예방 등을 하면서 국내 유명 산 등을 홀로 다니기도 했습니다.”
[special]“100km 달리기, 새로운 도전의 문이었죠”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트레일러닝 대회인 UTMB는 유럽 최고봉인 몽블랑 주변 둘레길을 기반으로 기반으로 코스가 짜였다. 사진 임재영]

아직도 트레일 러닝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트레일 러닝은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인가요.
“포장도로를 달리는 로드 마라톤과는 달리 산, 숲, 언덕, 사막 등 비포장도로(트레일)를 달리는 아웃도어 스포츠입니다. 사실 ‘달린다’는 표현보다는 뛰고 걷기를 반복한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실제 대회에서도 참가자들 상당수가 뛰고 걷기를 반복합니다. 물론 순위를 다투는 선두그룹은 오르막도 뛰어오르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비슷한 아웃도어 스포츠를 마운틴 러닝, 크로스 컨트리 등으로도 표현하는데 지금은 트레일 러닝이라는 용어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국제트레일러닝협회(ITRA)가 설립되기도 했고요. 국내에서는 지금도 생소한 용어인데 2012년 제주에서 국제트레일러닝대회가 열린 후부터 트레일 러닝 용어를 붙인 대회가 많아졌습니다.”

뻔한 질문이지만 ‘어쩌다 100km'는 어떻게 뛰게 되셨고, 트레일 러닝의 참 매력은 무엇인가요.
“우선 걷는 데 관심이 커지니 자연스레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을 취재하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제주 출신으로 세계적인 트레일 러너인 안병식 씨도 그렇게 해서 알게 됐는데, 제주에 100km 대회를 만든다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혹시 나도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가 직접 참가해서 그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2012년인데 그때 도전을 했던 것이 너무나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트레일 러닝은 자연과 함께한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자동차 매연이 나오는 도로가 아니라 신선한 공기가 듬뿍 있는 산길, 숲길을 걷고, 달리다 보면 몸과 마음이 절로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100km 정도의 레이스를 하려면 고통이 따르지만, 완주 후 기쁨은 더욱 큽니다.”

2012년 제주도에서 첫 트레일러닝대회에 참가하신 뒤 세계 10대 울트라 트레일러닝대회에 줄줄이 도전하셨는데, 어떤 경험들이었나요.
“걷기가 일상화가 될 무렵 크고 작은 목표를 세우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제주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걷기,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걷기, 해안선 걷기, 한국의 국립공원 산 완등 등으로 목표를 정해서 걷다 보니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러다 2014년 사하라사막마라톤(MDS)에 참가했을 때 세계 10대 울트라 트레일러닝대회(100km 이상)가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10대 대회 완주를 목표로 정했는데 MDS를 시작으로 홍콩 100km(2016년), UTMB 101km(2016년), 호주 울트라트레일 100km(2017년), 스페인 트랜스 그란카라니아 125km(2018년), 뉴질랜드 타라웨라 160km(2019년), 레위니옹 그랑레드 166km(2019년) 등 7개 대회를 완주했습니다. 이 중 스페인 트랜스 그란카라니아, 뉴질랜드 타라웨라 대회는 한국인 최초 완주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나머지 이탈리아, 일본, 미국에서 열리는 3개 대회가 남아 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중단된 상태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레이스는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대회마다 새로운 도전이었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완주의 기쁨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얻곤 했는데 이 중에서도 UTMB가 가장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트레일 러너에게 꿈의 무대로 불리는 이 대회의 5종목 가운데 101km 레이스에 참가했습니다. 산악지대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상당한 경사여서 중도 포기를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마실 물이 없어서 상당한 고통을 겪기도 했고요. 체력을 바닥난 상태여서 정신력으로 버텼습니다. 제한 시간을 불과 18분 남겨놓고 피니시 라인을 넘었습니다.”
[special]“100km 달리기, 새로운 도전의 문이었죠”
[졸음과 사투를 벌이면서 레이스를 펼친 뉴질랜드 타라웨라 160km 레이스는 한국인 최초 완주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사진 임재영]

동시에 가장 벅차고 보람됐던 레이스가 있다면요.
“2019년 6월의 이탈리아 라바레도 120km 레이스에 실패하면서 10대 대외 완주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해 10월에 열리는 레위니옹 그랑래드 166km마저 실패한다면, 다시 이들 2개 대회를 참가하는 시간과 경비 문제 등을 감안하면 목표 달성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절체절명의 대회였습니다. 대회 코스의 난도는 엄청났습니다. 한라산 백록담 정상을 5~6번을 왕복해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최장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졸음과의 사투,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등을 견디며 완주한 순간 모든 고통을 보상받은 느낌이었습니다. 10대 대회를 완주하는 목표 달성에 불씨를 살려놓았습니다.”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취미 혹은 제2의, 제3의 인생을 준비하는 4050세대 중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트레일 러닝 세계에서도 중년 도전자들이 실제로 많은지요.
“동료 기자나 지인들은 내가 100m를 걷는 것조차 싫어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100km를 걷고 뛰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책 <어쩌다 100km>를 읽고 오름부터 걷기 시작한 이들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30~40대에게 트레일 러닝이 새로운 아웃도어 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소규모 단위 동호인 중심으로 활동이 활발하고 트레일 러닝 스쿨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트레일 러닝에 도전하는 사람은 많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트레일 러닝을 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들이 필요한가요.
“우선 자신의 몸 상태부터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각의 몸 상태가 다르기에 동일한 훈련 조건이나 강도로 시작하기보다는 자신에 맞게 횟수나 거리를 조절해야 합니다. 걸을 때 자신의 체력 상태가 감당하는 속도에 맞게 걸어야 하고, 근력운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횟수와 세트는 자신의 체력에 맞게 스스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꾸준하게’, ‘지속적으로’입니다. 고통이 있어야 얻는 부분이 있고(no pain, no gain), 땀 흘린 만큼 갈 수 있을 정도로 몸은 정직합니다.”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닌데, 시작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가만히 있으면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두드려야 문이 열립니다. 실패는 목표를 달성하는 자양분의 하나입니다. 더욱 단단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도전 뒤에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계획하는 습관을 들이셨다는 부분에서 공감이 갔습니다. 요즘은 또 어떤 도전들을 계획 중이신가요.
“새로운 도전을 계획하는 습관은 몸과 마음에 밴 듯합니다. 세계 10대 울트라 트레일러닝대회 가운데 3개 대회를 남겨뒀는데, 코로나19 상황을 보면서 도전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멀게는 100세 때 100km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면 수년 전에는 비웃는 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점차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70대 후반인 부산의 트레일 러너는 100km를 거뜬히 완주합니다. 국내 최초 100세 때 100km 완주의 유력한 후보 중 한 분입니다.”

2015년 홍콩울트라레이서에서 쓰라린 실패를 맞보셨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2014년 MDS를 완주하고 나서 100km는 무리 없이 걷고 뛸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전혀 달랐습니다. 하루에 수십 km씩을 걸어서 6일 만에 244km를 완주하는 사막마라톤은 논스톱으로 30시간 이내 100km를 완주하는 홍콩 레이스와 비교할 때 체력적인 부분에서 달랐습니다. 훈련이 필요했는데 속 시원히 방법을 가르쳐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독학으로 몸을 만들었습니다. 지구력에 필요한 근력운동을 중점적으로 하고, 주말에는 걷는 거리를 늘렸습니다. 재도전 끝에 홍콩 100km를 완주하면서 불완전하지만 저만의 노하우를 만든 것에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special]“100km 달리기, 새로운 도전의 문이었죠”
어떤 한 분야에 진심으로 빠지고, 공부하다 보면 그 관심이 관련 기타 분야로 확산되기도 하죠. 운동을 시작하시면서 사진에도 입문하셨는데, 그 과정이 궁금하고, 달리기와 또 다른 매력이 있다면요.
“주말마다 걷다 보니 길가의 들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데 이름을 모르니 답답했습니다. 사진을 찍어서 지인에게 보냈는데, 꽃이 흐리게 찍혀서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게 계기였습니다. 쌀알보다 작은 꽃을 찍으려고 하니 접사렌즈가 필요했고, 날아다니는 새를 찍으려니 망원렌즈가 필요했습니다. 귀동냥, 눈동냥으로 사진을 배웠습니다. 워낙 야외에서 찍은 양이 많다 보니 노하우가 생기고, 사진공부도 된 듯합니다. 그러다 ‘드론 사진’의 매력에 빠지면서 제주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담아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라산은 걷기와 사진에서 평생의 화두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트레일 러닝은 000이다. 한마디로 정의해주신다면.
“나에게 트레일 러닝은 ‘문(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을 열기 전에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었지만, 그 문을 열고 나간 순간 새로운 경험과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서 나갈 때마다 자존감이 형성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글 김수정 기자 ㅣ 사진 임재영 제공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