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다섯 살인 홍길동 씨는 조만간 은퇴할 예정이고, 은퇴 기간은 30년으로 예상한다. 은퇴하는 해에는 생활비로 한 해 3600만 원(월 300만 원)을 사용하고, 이후에는 매년 물가상승률에 맞춰 생활비를 늘려 갈 생각이다. 은퇴 기간 동안 물가는 매년 2.5%씩 상승하고, 노후자금을 운용해서 연평균 3% 수익을 낼 수 있다.
매년 필요한 생활비부터 계산해보자. 65세 때는 3600만 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물가상승률에 맞춰 2.5%씩 생활비가 늘어나기 때문에 66세 때 3690만 원, 67세 때는 3782만 원이 필요한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해 나가면 30년 뒤 94세 때에는 생활비로 7367만 원이 필요한다. 이번에는 미래에 생활비를 현재 가치로 할인할 차례다. 이때 할인율로 투자수익률(3%)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매년 필요한 생활비를 현재 가치로 할인한 다음 전부 더하면 10억731만 원이 나온다. 홍 씨에게 필요한 노후자금 계산 방법
은퇴 설계 전문가가 직접 계산을 하든, 금융사 등에서 제공하는 노후자금 계산 시뮬레이터를 활용하든 간에 계산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노후자금이 10억 원이나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홍 씨는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이렇게 노후생활비가 많이 나왔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것이다.
먼저 은퇴 기간을 너무 길게 잡은 것은 아닐까. 95세까지 살면 평균수명보다 10년은 더 사는 셈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은퇴 기간을 20년으로 잡으면 6억8774만 원만 준비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모든 사람이 평균수명에 죽는 것은 아니다.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본인과 배우자 중 한 명이라도 살아 있으면 생활비가 필요하다. 30년도 넉넉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물가상승률을 너무 높게 잡은 것은 아닐까. 홍 씨는 매년 생활비가 물가상승률에 맞춰 2.5%씩 상승하는 걸로 봤다. 2021년 우리나라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2.5%라는 점을 감안하면 높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할인율(투자수익률)은 어떤가. 할인율을 높이면 필요자금이 줄어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홍 씨가 은퇴자금을 4%로 운용하면 8억8179만 원, 5%로 하면 7억7818만 원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무턱대고 투자수익률을 높이 잡을 수만도 없다. 높은 수익에는 상응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생활비가 증가한다는 가정에는 문제가 없을까. 나이가 들어가면 바깥 활동이 줄어들고 자연스레 씀씀이도 줄어들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은퇴자가 주로 사는 물건과 이용하는 서비스가 달라지기도 한다. 은퇴 초에는 여행과 외식 비용이 많이 들지만, 후반에는 의료와 간병비가 많이 든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각의 지출 항목이 전체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달라지고, 기간별로 상승률도 다르기 마련이다.
은퇴 이후 지출 항목과 소비 패턴에 따라 노후 필요자금 규모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지금부터 은퇴 후 소비지출 패턴에 대한 다양한 연구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물가상승률만큼 노후생활비도 늘어날까
은퇴자의 지출이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늘어난다는 생각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여러 곳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겠지만, 학문적으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기반을 둔 재무 설계 전문가 윌리엄 벤젠이 1994년 10월에 발표한 ‘안전 인출률’에 대한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벤젠은 은퇴자금에서 매년 몇 퍼센트씩 인출해야 은퇴 기간 중에 파산하지 않는지 알고 싶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벤젠은 몇 가지 가정을 세웠다. 먼저 은퇴 기간은 30년(65~94세)으로 잡았다. 당시로는 매우 보수적으로 은퇴 기간을 잡은 셈이다. 은퇴자금은 미국 주식과 채권에 반반씩 나눠서 투자한다.
생활비는 매년 연말에 한 번 인출하되, 구매력을 보전하려고 소비자 물가상승률에 맞춰 매년 인출액을 늘려 나가기로 했다. 예를 들어 첫해 생활비로 4만 달러를 인출하고 물가가 2.5% 상승했다면 이듬해에는 4만1000달러를 인출하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매년 명목소비는 늘어나도, 실질소비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벤젠은 가장 나쁜 시기에 은퇴한 사람도 은퇴 기간 중에는 파산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1926년부터 매년 연초에 은퇴해서 30년 동안(1926~1955년, 1927~1956년 등) 은퇴 생활을 하는 다양한 사례를 분석했다. 이렇게 하면 1930년대 대공황,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때 은퇴한 사람이 모두 포함된다. 이보다 더 나쁜 시기에 은퇴하는 사람이 있을까.
벤젠의 분석 결과 최악의 결과는 1966년 은퇴자였다. 이들이 30년 은퇴생활을 하는 동안 파산하지 않으려면 첫해에 준비한 노후자금에서 4.15%보다 적게 인출해야 한다. 그리고 이듬해부터는 첫해 인출액에서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증액해서 인출하면 된다. 매년 노후자금에서 4%만 인출하면 은퇴 파산을 피할 수 있다는 ‘4% 룰’은 이렇게 탄생했다.
매년 물가상승률에 맞춰 은퇴자의 지출이 늘어난다는 벤젠의 가정은 매우 보수적이다. 그래서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에 맞춰 지출을 늘려 가려면, 은퇴자들은 상당히 많은 노후자금을 준비해야 한다. 과연 그래야 할까.
나이가 들면 활동도 씀씀이도 줄어들지 않을까
매년 물가상승률에 맞춰 은퇴자들의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어든다는 연구도 있는데, 미국 위스콘신에서 재무설계사로 일하는 타이 버니케의 ‘줄다리기 이론’이 대표적이다.
버니케는 은퇴자의 지출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같은 해에 여러 연령대에 있는 사람을 조사했다가, 후속 연구를 통해 동일한 코호트에 있는 은퇴자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지출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폈다.
버니케는 조사를 통해 75세 이상 은퇴자가 65세부터 74세 사이 은퇴자보다 적게 지출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65세부터 74세 사이 은퇴자가 55세부터 64세 사이 은퇴자보다 적게 지출한다는 것도 밝혀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은퇴자의 지출이 줄어드는 것일까.
그는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줄다리기’라고 비유했다. 은퇴 기간 동안 기본적 지출과 재량적 지출이 힘 겨루기를 한다. 의식주와 관련된 기본적인 지출은 물가상승률에 맞춰 계속해서 늘어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행을 떠나고 외식을 하는 횟수가 줄어들며 재량적 지출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지출 증가를 재량적 지출 감소가 상쇄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지출이 줄어들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생활비는 줄고
의료비는 늘어나지 않을까
여행과 외식이 줄어들면 자연스레 노후생활비도 감소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노후생활비가 줄어든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간병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하면 오히려 지출이 늘어나지는 않을까.
1994년 마이클 스타인은 은퇴 기간을 10년 단위로 3단계로 나누고, 각각 활동적인 시기(go-go), 회상의 시기(slow-go), 간병의 시기(no-go)라고 명명했다. 활동적인 시기는 65세에 은퇴한 다음 74세까지 진행된다. 이 기간 동안 은퇴자들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등 재량적 지출을 많이 한다. 그래서 3단계 기간 중 지출이 많다. 게다가 물가상승률에 맞춰 매년 지출도 늘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75세부터 84세 사이에 은퇴자들은 ‘회상의 시기’를 맞이한다. 활동적인 시기와 비교하면 지출이 큰 폭으로 줄어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활동량이 줄고, 재량적 지출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가상승률에 맞춰 지출이 늘어나지도 않고 오히려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은퇴자들은 85세 이후에 ‘간병의 시기’를 맞는다. 이 기간 동안 재량적 지출은 큰 폭으로 감소하지만, 의료비와 간병비가 더 크게 늘어나면서 전체적인 지출이 상승한다. 그래서 은퇴자의 지출은 하락을 멈추고 다시 상승하는 U자 형태를 띠게 된다. U자형 소비 패턴에 대한 보다 최근 연구도 있다. 데이비드 블란쳇 모닝스타 수석연구원은 2014년에 은퇴자의 소비 퍼즐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은퇴자의 실질지출이 84세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하다가 이후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저점은 84세에 나타나는데, 은퇴 초기와 비교하면 지출이 최대 26%나 감소한다. 은퇴할 당시에 10만 달러를 쓰던 은퇴자가 84세 무렵에는 7만4146달러만 사용하는 셈이다. 이후 90세가 될 때까지 지출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초기 수준에 이르지는 못한다.
블란쳇은 은퇴자의 지출이 하락하다가 상승하는 곡선을 보이는 것을 사람들의 미소 짓는 얼굴에 빗대 ‘은퇴 지출 스마일’이라고 명명했다. 보는 쪽에서 왼쪽 입 꼬리를 살짝 올라간 비대칭적인 미소를 짓는다. 지출 항목마다 상승률과 비중도 다르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은퇴자가 구매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종류와 비중에 관계없이 은퇴 기간 동안 물가 상승을 반영한 실질지출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폈다. 하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은퇴자가 구매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종류도 다르고 비중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솜나스 바수 캘리포니아 루터교대 교수는 은퇴 기간을 10년 간격으로 셋으로 나눴다. 또 은퇴자의 주요 지출 항목을 세금, 기본생활 비용, 의료·간병 비용, 여가생활 비용 등 넷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은퇴 기간과 지출 항목별로 지출 규모와 물가 변동률을 달리 적용했다. 먼저 세금 관련 지출은 은퇴 기간 동안 물가상승률에 맞춰 매년 3%씩 상승한다. 하지만 지출 규모는 은퇴 이전과 비교해 크게 감소한다. 퇴직하면서 과세 대상 소득이 줄었기 때문이다. 바수 교수는 65세 때 세금 지출이 50% 감소하고 이후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으로 봤다.
세금처럼 기본생활 비용도 매년 3%씩 늘어난다. 하지만 지출 규모는 은퇴 기간 동안 꾸준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65세 때 30%, 75세 때 다시 20%, 85세 때 다시 한 번 10%가 감소한다. 이렇게 해서 85세 때 지출은 은퇴 이전의 절반(50.4%) 수준으로 떨어진다.
의료·간병 비용은 매년 7%씩 상승한다. 물가상승률(3%)보다 2배 넘게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셈이다. 게다가 지출 규모도 계속해서 늘어난다. 65세 때에는 은퇴 전과 비교해 15% 상승하고, 75세 때 다시 20%, 85세에 다시 한 번 25%가 상승한다. 이렇게 되면 85세 때 의료·간병 비용은 은퇴 이전보다 3.7배나 늘어난다.
여가생활 비용도 물가상승률보다 빠르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여기서는 의료·간병 비용과 마찬가지로 매년 7%씩 상승하는 것으로 봤다. 하지만 지출 규모는 은퇴 시점에 크게 상승했다가 빠르게 하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65세에 은퇴할 때 지출이 50% 늘어났다가, 75세에 50%, 85세에 다시 75%가 줄어든다. 그래서 85세 때는 은퇴 이전 실질 여가생활 비용의 40%만 지출하게 된다.
바수 교수가 2005년 제시한 것을 모든 은퇴자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은퇴자의 지출을 주요 항목별로 나누고 지출 항목별로 다른 상승률을 적용한 것과 은퇴 기간에 따라 비중을 달리 가져가는 것은 노후자금을 설계할 때 참조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은퇴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은퇴자의 지출이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봤다. 은퇴 이후 지출 패턴을 어떻게 가정하느냐에 따라 필요한 은퇴자금 규모가 달라지고, 은퇴자금을 모으기 위해 매달 저축해야 하는 금액도 달라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은퇴 후 지출이 꾸준하게 늘어난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안정적인 노후 준비 방법이다. 하지만 미래 더 많은 지출을 하려면 지금 지출을 줄이고 저축을 늘려야 한다.
은퇴 후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출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노후자금 마련이 수월해진다. 하지만 물가가 큰 폭으로 오르거나 예상치 않은 지출이 발생하면 노후자금이 고갈될 수 있다. 의료와 간병 관련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후 생활비 감소가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라 할 수 있다.
글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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