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경제, '브렉시트의 저주'에 걸렸나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자동차 바퀴에서 공기가 서서히 빠지는 것이다. 영국 경제는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붕괴할 것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브렉시트 반대론자 조너선 포르테스 런던 킹스칼리지 경제학 교수가 브렉시트를 ‘타이어의 펑크’에 빗대어 비판한 말이다.

조너선 포르테스 런던 킹스칼리지 경제학 교수의 지적처럼 영국 경제가 브렉시트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가격 폭등 등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유럽에서 영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국의 7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0.1%까지 치솟았다. 이는 같은 기간 독일(7.5%), 프랑스(6.1%), 이탈리아(7.9%) 등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국가들은 물론 미국(8.5%)에 비해서도 훨씬 높은 수치다.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높다. 문제는 영국의 인플레가 아직 정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연내 물가 상승률이 13%가 넘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는 영국의 물가 상승률이 내년 초 22.4%에 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골드만삭스는 “영국의 에너지 비용이 현재 속도로 계속 상승하면 국내총생산(GDP)이 3.4% 감소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영국 통계청(ONS)은 식품과 에너지 가격 급등이 물가 폭등을 견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7월 식품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12.7%나 올랐다. 우유가 40%로 가장 많이 올랐고, 밀가루(31%), 햄(28%), 버터(24%) 등 주요 식품 가격들이 대폭 인상됐다. 특히 영국의 가스와 전기 요금은 각각 95.7%, 54% 폭등했다. 영국의 표준가구 에너지 요금은 상한이 현재 연 1971파운드(311만 원)에서 10월엔 연 3549파운드(560만 원)로 80% 올라간다. 이는 1년 전의 연 1277파운드(201만 원)와 비교하면 2.8배에 달한다.

에너지 컨설팅 업체 콘월 인사이트 전망치에 따르면 내년 1월엔 5387파운드(850만 원), 4월엔 6616파운드(1044만 원)로 뛴다. 4월 기준으로 보면 통상 방 3개짜리 주택의 2∼3인 가구의 연간 전기·가스 요금이 2년 만에 180만 원에서 1000만 원 이상으로 6배로 높아지는 셈이다. 말 그대로 국가 비상사태다.

소비를 줄이기 어려운 품목인 에너지 요금이 비싸지면 저소득층이 타격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영국 싱크탱크인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는 “저소득층은 지금도 소득의 25%를 에너지 비용으로 쓰고 있다”면서 “일부 연금생활자들의 경우 내년이면 가처분소득의 40%가 에너지 비용으로 나갈 것”이라고 추정했다.

영국의 가스와 전기 요금이 폭등하고 있는 이유는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수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 조치를 시행해 왔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영국의 6월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금액은 ‘0파운드’였다. 이는 1997년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전쟁이 벌어지기 1년 전만 해도 영국은 한 달 평균 4억9900만 파운드(7900억 원) 어치의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해 왔다. 러시아는 영국의 최대 정제유 공급국이었다. 영국이 수입하는 정제유 중 24.1%가 러시아산이었다. 수입 원유의 5.9%, 수입 가스의 4.9%도 러시아산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의 제재에 보복하는 차원에서 유럽에 공급하는 천연가스 양을 대폭 줄였거나 중단하는 등 에너지를 무기화하자 영국은 의존도를 낮춰 왔다. 원래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줄여 연말에 완전히 수입을 중단하고 액화천연가스(LNG) 수입도 가능한 빨리 중단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예정보다 6개월 빨리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영국은 부족한 에너지를 러시아 대신 사우디아라비아, 네덜란드, 벨기에, 쿠웨이트 등에서 수입하고 있지만, 에너지 가격이 크게 올라간 상태다.

영국 국민들은 물가 폭등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명목임금에서 물가 상승 효과를 제거해 산출하는 실질임금이 역대 최대 폭으로 하락하면서 끼니를 거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와 일간지 더 타임스가 공동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16%는 지난 6개월간 돈을 아끼려고 정기적으로 끼니를 건너뛰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절반이 외식을 줄였다고 답했고, 39%는 평소 슈퍼에서 사던 품목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고 밝혔다.

특히, 물가 폭등 때문에 18~24세 청년이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끼니를 건너뛰는 비율이 28%, 물건을 사지 못하고 내려놓는 경험은 56%에 달했다. 영국 국민들이 수십 년 내 최악의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실질임금이 역대급으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지난 2분기 실질임금은 지난해 동기 대비 3% 하락했는데, 이는 2001년 기록을 시작한 이래 최대 하락 폭이었다. 이 기간 평균 임금은 4.7% 올랐지만 물가 상승률이 이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앞으로 상당 기간 실질임금 하락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디크 칸 런던시장은 물가 폭등으로 올겨울 수백만 명이 난방과 식량 부족에 직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 연료빈곤종식동맹은 “내년 초 영국 전체 가구의 30%인 1050만 가구가 빈곤가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영란은행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대폭 인상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영란은행은 8월 4일 기준금리를 1.25%에서 1.75%로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했다. 영란은행의 빅스텝은 1995년 2월 이후 27년 만이다. 이로써 영국의 기준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1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 됐다.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는 “가계의 어려움을 알고 있지만 지금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상황은 더 악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영란은행은 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양적완화를 끝내고 양적긴축(중앙은행이 보유한 채권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시중 유동성을 회수)에 들어갔다. 영란은행은 현재 보유 자산 8440억 파운드(1339조 원) 중 400억 파운드(63조 원)를 1년간 처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영국 파운드화의 미국 달러화 대비 가치가 브렉시트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영국 파운드화의 미국 달러화 대비 가치가 지난 7월 5% 떨어졌다. 파운드화는 브렉시트 투표가 있던 2016년 6월 8%, 10월엔 6% 하락했다. 파운드화는 앞으로 더욱 하락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내년엔 ‘1파운드=1달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파운드화 약세는 달러화 강세에 따른 상대적인 현상이지만 더 큰 요인은 영국의 어두운 경제 전망 때문이다. 영란은행은 올해 4분기부터 내년 말까지 영국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장 기간의 경기 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전망했고, 골드만삭스는 2024년까지 영국의 침체 상태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영국 경제, '브렉시트의 저주'에 걸렸나
브렉시트의 저주? 영국 경제 ‘몸살’

영국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브렉시트 때문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브렉시트의 저주’라고 말하고 있다. 영국은 2020년 1월 브렉시트를 단행하며 유럽연합(EU)과 47년간의 동거에 마침표를 찍었다. 11개월의 전환(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해 1월엔 완전히 결별했다.

영국 경제는 브렉시트로 극심한 상품과 인력의 수급 불균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무엇보다 영국의 인력난은 강화된 이민 규정과 코로나19 대유행까지 겹쳐 더욱 악화했다. 싱크탱크인 러닝앤드워크 인스티튜트는 영국에서 100만 명의 노동력이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토니 윌슨 재정연구소(IFS) 소장은 “과거에는 EU의 고급 인력이 영국으로 유입되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며 “하지만 지금은 차단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EU 회원국의 국적자들이 영국에서 일하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입국할 수 있다. 노동시장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크리스토퍼 피사리데스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현재 영국 노동시장은 1970년대보다 더 나쁘다”고 지적했다. 인력난이 두드러진 분야는 항공·화물·서비스 업계와 노인,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한 돌봄 산업 등이다. 실제로 도버해협을 통해 육로로 유럽과 활발히 무역해 오던 영국은 대형 트럭 운전사 부족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영국은 식품 등을 수입하는데 브렉시트 때문에 수입 절차가 복잡해지거나 관세가 붙고, 파운드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수입 상품의 가격이 대폭 올라갔다. 런던정경대의 보고서에 따르면 수출업에 종사하는 사업자들은 전체의 24%가 브렉시트로 인해 EU 회원국들에 대한 수출량이 크게 감소했다고 밝혔다. 수입을 주로 하는 사업체 중 33%는 EU 회원국들로부터 수입량이 브렉시트로 인해 급감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브렉시트로 인한 타격이 소규모 사업체들에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가 유럽 주요국들의 GDP 대비 교역 비중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 코로나19 직후인 2020년 2분기 최저치를 찍은 뒤 지난해 말부터 충격에서 회복했다. 하지만 영국은 코로나19 이전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애던 포즌 PIIE 소장은 “영국 물가 상승률이 높은 이유의 80%는 브렉시트와 관련돼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재무부 산하 예산책임청(OBR)은 지난해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의 무역이 앞으로 15년간 입을 손실을 국민 1인당 1250파운드(200만 원)로 추정했다. 예산책임청은 또 영국의 GDP가 4% 줄어든다고 내다봤다. 영국의 현재 경제 상황으로 볼 때 이런 예측이 어느 정도 들어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브렉시트의 저주’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영국 경제는 내년에도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자깃 차다 영국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 소장은 “무역 장벽이 세워지자 EU 회원국 국민들은 영국의 노동시장을 떠났고 정책 불확실성으로 기업 투자가 위축되면서 영국 경제의 성장이 둔화됐다”며 “올해와 내년에는 영국 경제가 거의 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 G7 국가들 가운데 경제 성장이 가장 더딜 것으로 전망되는 국가로 영국을 지목했다. IMF는 2023년 영국의 GDP 성장률이 0.5%에 그치며 G7 중 최하위를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세계 5위 경제대국인 영국은 GDP에서 과거 식민지였던 인도에 추월당했다. IMF는 올해 1분기 인도의 명목 GDP가 8547억 달러(1164조9561억 원)를 기록해 영국(8160억 달러)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분기 기준이지만, 인도 GDP가 영국을 앞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브렉시트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뒤를 이어 선출된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는 그 어느 때보다 경제 회복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 역대 세 번째 여성 총리인 트러스 총리는 ‘제2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되겠다는 야심을 보이고 있지만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아무튼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말을 들었던 영국에 서서히 석양이 드리우고 있다.

글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