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2022년 9월.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2022년 9월.
[한경 머니 기고 = 윤서윤 독서활동가]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7쪽)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말도 안 되는 부음으로 시작해 주인공 아리와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3일간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아리는 조문을 온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알고 있었던 아버지의 서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평생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만 했던 아리는 그렇게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해방을 느낀다.

정지아 작가가 30년 만에 장편소설을 냈다. 정 작가는 1990년 <빨치산의 딸>(3부작)을 시작으로 독자들과 만나, 현재는 소설의 배경이자 고향인 구례에 거주하며 중앙대 문예창작과 전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다양한 수상 경력이 있는 그녀의 이번 작품은 아버지에 대한 헌사이자 자신에 대한 반성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묵직하면서도 유머가 흐른다.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25쪽)

시종일관 평등과 혁명을 외쳤던 아버지는 변해 가는 세월 앞에서 쓸쓸하게 패배했다. 백운산과 지리산을 소총을 들고 오갔던 아버지였다. 빨치산이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위장 자수를 하면서도 지키려 했지만, 결과는 20년 장기수라는 꼬리표에 집안이 몰락한다. 작은아버지의 출세 길도 막혔다. 딸은 빨치산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이 소설은 아버지의 장례식장과 정정했던 아버지와의 일화를 통해 찬란했지만 씁쓸한 혁명가를 보여준다. ‘사상’으로 인해 동지들의 죽음을 묵도하고, 고문과 장기수까지 됐다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했을 법도 한데, 아버지는 지리산 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아버지는 밭일을 2시간도 하지 못했다. ‘새농민’ 정보에 따라 밭일을 하면서도 성공한 적 없는 ‘문자농사’만 지을 줄 알았다. 이런 아버지에게는 “오죽흐먼”이라는 십팔번이 있었다. 사람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오죽흐먼”이라며 툭하면 자신을 찾은 사람들을 도와줬다. 그들이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102쪽)고 믿었다.

아리와 아버지의 일화들은 지금의 나와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1945년에 태어나 격변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겪었던 나의 아빠. 나는 아직 아버지가 아닌 아빠라고 부르는 게 더 좋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아버지’라고 한다지만 서먹한 사이가 더 멀어질까 무서워서다. 백두대간을 2번이나 종주할 정도로 정정했던 아빠는 지난해 위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 중이다.

아마 이 일이 없었다면, 나와 아빠의 사이는 지금의 내 나이만큼 차이를 좁히지 못했을 듯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 무심한 딸이다. 아빠도 딸이라면 껌벅 죽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언제나 오빠가 먼저였고, 가족이 우선이었다. 이런 아빠가 1차 항암을 시작하던 때에는 정정했다. 언제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맛도 사라지고 아픈 곳이 늘어났다.

그래도 아빠는 언제든지 다시 산으로 갈 수 있다며 등산용품을 사들인다. 나는 최근까지도 아빠가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등산’ 외에는 몰랐다. 그러니까 나의 아빠는 직업인으로서 성실하게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는 헌신적인 아빠였고, 주말엔 자신을 위해 전국 산을 누비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남자였다.

그런 아빠가 ‘아프다’라는 말 외에는 할 줄 모르게 되자 내가 바뀌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는 잘 잤어? 오늘 컨디션은 어때?”라며 안부를 묻고, 퇴근해서는 그날 먹은 것들을 체크한다. 또 먹고 싶은 건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 그렇게 평생 몰랐을 법한 아빠의 식성과 취미를 다시 쓰게 됐다. 이런 것도 언젠가 추억이 되겠다 싶다가도 아픈 데도 말 한마디 못하는 아빠를 보면 갑갑함이 밀려온다.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군가의 아버지, 혁명가, 자식, 딸과 같은 지위는 사라지고 ‘사람’이 남는다. 이에 작가는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중략)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248~249쪽)라고 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에 흡수돼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면서도 구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종일관 큰아빠를 탓하는 작은아버지에게도 “오죽흐먼 나에게 그랬겠냐”고 하고, 사람에게 치여도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138쪽)고 하는 아버지의 말은 우리가 조금은 너그러울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떠오르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격변의 시기를 통과해 온 분들에 대한 면모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비극은 나의 부모님이나 신분 때문이 아닌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267쪽)이라는 정 작가의 말처럼 겨울이 시작되는 지금, 나로부터의 해방을 꿈꿔본다.


11월에 즐기면 좋은 콘텐츠
사진=지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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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상처주지 않게>
작가 전미경
소통의 핵심인 나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 나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라도 감정과 상황을 분리해 조금 더 자유롭고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사진=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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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작가 나혜림
제15회 창비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이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소년 정인과 고양이로 둔갑한 악마 헬렌의 일주일간의 이야기다. 청소년이기에 더 많이 흔들리고, 수많은 선택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용기를 주는 성장 소설이다.
사진=그린나래미디어
사진=그린나래미디어
<우연과 상상>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3가지의 우연이 만들어낸 인생의 큰 파장을 담는다. 친구가 전 남자친구와 사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실수로 인해 존경하던 교수가 사임하게 된 것을 알게 된 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건 아닐까.

글 윤서윤 독서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