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후 A와 B 사이가 멀어지면서 A와 C와의 관계도 단절됐다. A는 2018년 B와 C를 상대로 친생자관계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했는데, 소송 중에 “A가 C를 친생자로 인지한다. C의 친권자 및 양육자로 B를 지정한다. A는 B에게 C의 양육비로 성년이 될 때까지 매월 200만 원씩 지급하고 면접교섭을 한다”는 내용으로 조정이 성립됐다.
A는 내연녀인 B와의 관계가 파탄이 나자, 각서에서 약속한 돈을 주지 않겠다고 했고, 법원에 B 이름으로 된 근저당권을 말소해달라는 청구했다. A의 청구가 받아들여질지는 A가 작성한 각서가 법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것을 A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인지에 달려 있다.
먼저 각서가 법률상 ‘유언’으로서 효력을 가지는지 보자.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유서’나 ‘남기는 글’과 같이 후손들에게 하는 덕담이나 당부의 말이 법률적인 효력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유산 분배와 관련된 재산적인 문제, 혼외자의 인지(認知)나 자신의 자녀로 등재된 사람이 친생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친생부인(親生否認)과 같은 신분에 관한 문제에 대해 고인(故人)의 의사가 효력을 가지려면, ‘유언’으로서 유효해야 한다. 그런데 유언은 법률이 정한 엄격한 방식을 따라야 하고, 유언 당시에 유언자에게 유언을 할 정신적 능력이 있어야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A가 작성한 각서는 우리 민법이 허용하는 5가지 유언의 방식 중에서 ‘자필증서(自筆證書)’에 의한 유언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은 유언자가 글 전부와 작성한 연월일, 작성한 사람의 주소와 성명을 직접 쓰고(自書)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A가 작성한 각서는 유언자인 A의 주소가 기재되지 않아서 유언으로는 효력이 없다.
그러나 유언증서가 법적 방식에 맞지 않아 무효라고 할지라도, 그 증서에 자신이 사망하는 경우 특정한 재산을 누군가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고 받을 사람이 동의한 경우에는, 증여하는 사람(증여자)과 받는 사람(수증자) 사이에 ‘사인증여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인증여(死因贈與)’란 무엇일까. 보통의 ‘증여’는 증여자가 수증자에게 재산을 대가 없이 넘겨줄 것을 약속하는 것을 말한다. 증여는 보통 즉시 효력이 발생하고 비교적 단기간 내에 재산이 이전되는 것을 예상하지만, 사인증여는 증여자가 ‘사망’할 때 증여의 효력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증여자의 사망 시에 대가 없이 재산을 넘겨주는 것이라면 유언으로 하는 증여인 ‘유증(遺贈)’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유증은 사인증여와 달리 받는 사람의 동의가 필요 없고 심지어 받는 사람이 잘 모르게 하는 경우가 더 많으며 유언의 방식을 갖추어야 한다.
A가 각서를 작성한 목적은 혼외자인 C가 혹시라도 상속을 받지 못할 것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각서의 내용도 C가 대가 없이 권리나 이익만을 얻는 내용이기 때문에, 결국 각서는 A와 미성년자인 C 사이에 사인증여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면 A는 자기 마음대로 사인증여 계약을 없던 것으로 해 C에게 돈을 줄 의무를 면할 수 있을까. 사인증여도 증여 계약의 일종이기 때문에 서면으로 작성되지 않았거나 계약을 체결한 후에 증여를 받은 사람의 망은(忘恩) 행위가 있는 경우, 증여한 사람의 재산 상태가 현저하게 악화된 경우에는 보통의 증여와 같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그런데 A는 사인증여 계약을 문서로 작성했을 뿐 아니라 해제할 만한 특별한 사정도 없어서, 위와 같은 이유로는 사인증여 계약을 무효화할 수 없다.
그런데 법원은 사인증여도 철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유언으로 재산을 증여한 사람이 언제든지 그 유언의 전부나 일부를 철회할 수 있는 것처럼, 유증과 실제적 기능이나 사회적 의미가 비슷한 사인증여도 철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인증여가 법률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즉 혼외자나 내연관계, 자신을 돌봐주지만 상속권이 없거나 후순위의 친족, 친구, 이웃과 같은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빈번한데, 그러한 관계가 파탄되거나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법률관계로 바뀐 경우에는 증여자의 최종 의사를 존중해 사인증여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A는 작성 당시 법률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혼외자 C에 대한 상속 내지 보상의 의미로 각서를 써준 것인데, C가 나중에 A에 의해 인지됨으로써 상속권을 취득했기 때문에, A에게 사인증여를 철회할 권리를 주어도 C에게 크게 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인증여의 맹점 노린 악용 사례도 늘어
‘사인증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관련된 최근의 분쟁 경향을 소개한다. 장례식까지 다 마친 후 상속인들이 모여 상속세 신고와 상속재산 분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즈음, 상속인 중 한 사람 또는 상속인이 아닌 제3자가 난데없이 피상속인 생전에 피상속인으로부터 중요 상속재산을 사인증여 받았다고 하면서, 상속인들 앞에 계약서를 내놓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망인의 진의(眞意)에 따라 정상적이고 유효하게 작성된 ‘사인증여계약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유언은 엄격한 방식이 필요해서 무효로 판단 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사인증여는 특별한 방식이 요구되지 않고, 증여자의 자필로 작성될 필요도 없으며 인감도장이 날인되거나 인감증명서가 첨부될 필요도 없어서, 누군가에 의해 위조되기 쉽다. 더구나 증여자가 치매와 같은 인지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계약 체결 당시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계약서가 상속인들 앞에 펼쳐질 때쯤이면 증여자는 이미 사망했을 뿐 아니라 계약서상의 작성 시점 또한 임의로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아서, 그 계약서가 증여자로 기재된 사람의 진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거나 계약서상 작성 일자가 실제로 작성된 시점과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 와서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사인증여의 이러한 맹점을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지 능력에 문제가 생긴 사람의 의사(意思)를 왜곡하거나 악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득하려고 하는 시도는, 비단 사인증여의 방법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무리 자세하고 치밀한 법령과 제도가 마련된다고 해도 이러한 시도나 분쟁은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더 기발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가족이 가지는 의미, 부나 자산의 대물림에 대한 생각이 올바로 정립되고, 자신의 미래와 사후를 스스로 미리 설계하고 준비하는 사회적 문화가 정착되는 것만이 늘어나는 상속 관련 분쟁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글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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