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밀은 우유를 소재로 한 사업에 미래를 걸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45년 업력의 사업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파장이 커지자 노동조합, 임직원과의 협의를 통해 사업 재개를 결정했다. 쉽지 않은 경영 환경을 고려해 직원의 30% 정도를 구조조정 한 뒤 사업을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오너 경영 실패’라는 따끔한 지적에 책임을 통감하면서도, 유제품 소비 감소와 원재료비, 유류대 상승 등 대외적 경영 환경 악화까지 겹쳐 지난 4년간 누적 적자가 300억 원이 넘고 올해에만 180억 원 이상 적자가 예상되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푸르밀이 사업 종료 철회를 결정하면서 발표한 호소문의 일부다. 실제로 우유 업계의 수익성 악화는 푸르밀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해 상반기 매일유업의 영업이익은 308억 원으로 전년 대비 28.2% 감소했다. 남양유업은 상반기 영업적자가 421억 원에 달한다. 국내 주요 우유 업체 가운데 상반기 실적이 성장한 곳은 서울우유 정도다. 그렇다면 우유 산업이 성장 동력을 잃은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또 앞으로 걸림돌이 될 만한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나라 우유 시장에 드리운 5가지 그림자를 꼽아봤다. #1. 저출생
우리나라 출생률과 우유 소비량은 서로 무관하다고 하기 어렵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국내 1인당 우유 소비량은 2001년 36.6kg에서 지난해 32.0kg으로 4.6kg 줄었는데, 같은 기간 출생아 수도 56만 명에서 26만 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우유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줄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원유의 가장 큰 판로였던 우유 급식 물량은 갈수록 줄어가는 추세다. 지난 2019년 우유 급식 물량은 9만6000톤으로, 2011년에 비해 25%가 줄었다. 더욱이 이듬해에는 코로나19가 찾아오면서 학생들의 등교가 원활하지 않아 이 물량조차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2. 가치소비 트렌드
우유를 소비하는 것이 결국 기후 위기에 일조하는 행위라는 사실이 상식처럼 자리 잡으면서 젊은 소비자를 중심으로 우유 섭취를 지양하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죄책감이 가치 소비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낙농업이 기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 온실가스의 14.5%가 가축에게서 발생한다. 연간 약 71억 톤 규모다. 그중 육우와 젖소의 비중이 65%에 달한다. 소는 되새김질을 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보다 강한 온실 효과를 만드는 ’메탄가스’를 배출한다. 그만큼 기후위기에 더 치명적이다.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우유 소비를 주춤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동물보호단체 카라는 ‘우유·두유 소비 실태 및 인식에 관한 조사’ 보고서에서 “국내 젖소 농장 중에서 동물복지 농장은 1% 미만”이라며 “동물복지축산농장 인증제가 젖소 농장에 도입된 지 5년이 지난 2020년에도 전체 농장 6160곳 중에서 복지농장이 단 13곳(0.2%)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지적했다. 또 “사람이 먹는 우유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동물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지 관심을 더 가져야만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3. 활발한 대체유 개발
우유를 소비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에 이른바 ‘부스터’를 달아준 것은 활발한 대체유 시장이다. 콩, 귀리, 아몬드와 같은 식물성 대체유가 우유의 자리를 대신해준 덕에 소비자들이 가치소비를 선택하는 데 수월해졌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전 세계 대체유 시장 규모는 2016년 146억 달러에서 2021년 178억 달러로 성장했다. 오는 2026년에는 239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특히 한국 대체유 시장은 지난해 8위(5억 달러)로, 2026년까지 7억 달러의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됐다.
식물성 대체유를 넘어 비동물성 유제품을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콩이나 귀리로 만든 대체유가 특정 식물의 향취를 완전히 없애기 어려운 것과 달리, 비동물성 유제품은 진짜 우유와 거의 동일한 맛과 영향소의 재현을 추구한다. 세포 배양을 통해 젖소 없이도 진짜에 가까운 우유를 만드는 기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설립된 미국 브라운푸드는 젖소의 세포 배양 기술을 사용해 기존의 우유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제품을 개발 중이다. 또 2019년 설립된 미국 바이오밀크는 인간 유방세포에서 배양된 모유를 생산하는 기술에 대한 특허를 보유한 회사로, 체외 모유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지현 코트라(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은 “식물성 유제품을 만들기 위해 식물을 재배하면서 여전히 삼림 벌채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식물 기반 단백질은 동물성 단백질에서만 얻을 수 있는 필수 아미노산 함량이 적고 맛과 풍미가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며 “식물 기반 단백질은 커피에 응고되고 버터나 치즈를 만드는 데 적합한 지방과 단백질이 없어 제품을 다양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체 단백질을 합성하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4. 우유를 둘러싼 잦은 논쟁
우유는 어떤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유는 칼슘 등 영양분을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는 완전식품으로 각광받았지만, 일각에서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 대중의 혼란이 커지기도 했다.
<우유의 역사> 저자인 마크 쿨란스키는 “호르몬제, 항생제, 유전자 변형, 화학물질 같은 현대의 쟁점들 너머에는 1만 년이 지난 지금도 답을 찾지 못한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며 “낙농장에서 모든 걸 제대로 했고, 우유가 완벽하다면, 과연 그 우유가 당신에게 이로운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는 “어쨌든 성인이 우유를 마시는 건 자연스럽지 않다”며 “그 점에 있어서는 아기가 모유 이외의 우유를 마시는 것 또한 자연스럽지 않다. 유당불내증이 있는 세계의 60%는 자연이 의도한 대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했다. 실제로 한국인의 75%가 우유의 유당을 소화하기 어려운 ‘유당불내증’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당불내증은 체내 유당 분해 효소가 부족해 유당 성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증상으로, 우유를 마셨을 때 설사와 복통, 복부팽만을 유발한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성인의 65%가 유당불내증이다.
#5. 가격 경쟁력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 유제품 강국에 비해 비싼 우유 가격은 한국만의 특수성이다. 국산 원유 가격은 리터당 1100원으로, 호주·뉴질랜드 원유(400~500원)에 비해 2배 이상 비싸다. 유럽연합(EU) 평균(540원)과 비교해도 가격 경쟁력이 낮은 것은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비싼 가격 탓에 소비자들의 주머니가 점차 닫히고 있는 것도 우유 소비가 줄어드는 데 한몫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오는 2026년부터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미국 및 유럽 유제품이 무관세로 수입되기 시작하면 국산 제품의 경쟁력은 더욱 위협당할 가능성이 높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나라 특유의 원유 가격체계가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우리나라는 낙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2013년 원유가격연동제를 도입했는데, 원유 공급이 많아도 생산 원가와 연동해 원유 가격을 올릴 수 있는 가격 결정 방식이다. 이에 정부는 내년부터 원유가격연동제 대신 ‘용도별 차등가격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마시는 우유와 가공유에 쓰이는 원유 가격을 각각 다르게 적용해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또 원유가 과잉 공급되는 상황에서는 시장 상황을 원유 가격에 반영토록 할 예정이다. 다만 달라진 제도가 시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글 정초원 기자 cc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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