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슬립테크, 기술로 불면을 정복한다
한국인 평균 수면 시간 7시간 41분. 언뜻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적지 않은 시간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면 시간인 8시간 22분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OECD 국가 최하위권이다. 미국(8시간 48분), 캐나다(8시간 40분), 프랑스(8시간 33분)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국민의 수면 시간은 낮은 편이다.

필립스가 ‘2021 세계 수면의 날’을 맞아 진행한 각국 수면 동향 설문조사에서도 한국인의 수면 상태는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이 설문조사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영국, 호주, 이탈리아, 독일 등 13개국을 대상으로 진행됐는데, 전체 응답자의 55%가 자신의 수면에 만족한다고 밝힌 반면, 한국인의 만족도는 41%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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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장애를 앓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민관심질병 통계에 따르면 불면증으로 치료받은 환자 수는 최근 5년 연속 꾸준히 증가했다. 2017년 56만855명이었던 불면증 환자는 2018년 59만7529명, 2019년 63만3620명, 2020년 65만8675명, 2021년 68만4560명으로 상승했다. 의료기관을 방문해 적극적으로 치료받지 않은 가벼운 수면 질환 경험자까지 포함하면 이 수치는 수백만 명 단위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숙면이 돈이 되는 시대
수면 문제는 비단 개인의 건강 문제를 일으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생산인구가 수면에 문제를 겪을수록 그 나라 경제에 큰 손실을 입힌다는 조사 결과도 존재한다. 미국 민간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노동자들의 수면 부족이 자국 경제에 끼치는 비용은 연간 최대 4110억 달러에 달한다.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 또한 연간 최대 1380억 달러의 경제적 손해를 수면 문제로 인해 입는다. 일본인의 평균 수면 시간이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7시간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 경제적 손실 규모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코 하프너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자는 “일하는 사람들의 수면 습관은 그들의 건강과 국가 경제에 굉장히 큰 영향을 준다”면서 “앞으로 노동자의 수면 문제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잠’이 곧 ‘돈’이 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슬리포노믹스라는 트렌드 용어에서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슬리포노믹스란 수면(sleep)과 경제(economics)를 결합한 말로, 수면을 보조해주는 기능성 침구는 물론이고 식음료, 전자기기 등 잠과 관련된 모든 수면 경제를 통칭한다. 이른바 ‘꿀잠’을 위해 소비자들이 자신의 지갑을 아낌없이 여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주목받게 된 용어다. 슬리포노믹스의 성장은 비단 우리나라만 겪는 현상은 아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전 세계 슬리포노믹스 산업은 2019년 4320억 달러에서 2024년 5850억 달러로 35.4% 성장할 전망이다.
[special] 슬립테크, 기술로 불면을 정복한다
특히 최근에는 수면 산업 내에서도 진화된 기술과 빅데이터를 접목한 슬립테크 기업들이 뜨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츠는 슬립테크 시장 규모가 2021년 150억 달러에서 오는 2026년 321억 달러까지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인 2022 CES에서도 ‘혁신’을 구호로 내세운 30여 곳의 슬립테크 기업들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해외 기업 중에서는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유니콘 기업인 핀란드 ‘오우라헬스’를 대표적인 슬립테크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오우라헬스는 티타늄으로 제작한 반지 형태의 ‘오우라링’을 통해 수면 상태를 측정해준다. 미국 ‘슬립넘버’는 심박 수와 호흡 수 등을 기반으로 수면 상태를 자동 측정한다. 사용자가 질 좋은 수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침대 매트리스 내부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침대 높낮이와 온도를 조절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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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업 중에서는 수면 중 호흡 소리 등을 분석해 비접촉식으로 수면 단계를 진단하는 스타트업 ‘에이슬립’을 꼽을 수 있다. 에이슬립은 올 상반기 160억 원 규모의 추가 투자 유치에 성공하면서 기업 가치가 900억 원까지 올라갔다. 특히 이 회사는 아마존과의 협업을 통해 알렉사(아마존이 내놓은 음성인식 AI 스피커)에도 슬립테크 기술을 적용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대기업들도 슬립테크 시장의 미래가 무궁무진하다고 보고, 저마다의 특기를 살려 뛰어들었다. 필립스는 잠든 이의 뇌파를 분석한 뒤 백색소음을 들려주는 전자 헤드밴드를 선보였다. 삼성과 애플은 이미 막대한 사용자 수를 확보한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를 통해 수면 분석 기능을 제공 중이다. 두 기업이 주도하던 이 시장에 최근 구글이 스마트워치 ‘픽셀워치’를 공개하며 합세했다. 구글은 앞서 슬립테크를 포함한 헬스케어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웨어러블 기업 핏빗을 21억 달러에 인수한 바 있다.
[special] 슬립테크, 기술로 불면을 정복한다
쏟아지는 슬립테크 제품, 실제 효과는
다만 검증되지 않은 슬립테크 제품에 대한 과도한 맹신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의료계의 조언이다. 이미 전 세계 시장에서 슬립테크 디바이스로 활용되는 스마트워치 또한 이런 측면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 록펠러 신경과학연구소의 실험 결과를 보면, 애플워치를 포함한 글로벌 스마트워치 8개 제품의 수면 분석 정확도가 뇌파검사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통상 의학계가 추정하는 웨어러블 기기의 수면 분석 정확도는 60% 이하 수준으로, 높은 신뢰성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슬립테크 업계의 한 전문가는 “의약품과 건강보조식품의 범주가 구분되듯, 의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제품들까지 포함하면 슬립테크의 영역이 굉장히 넓어진다”면서 “단순 플라시보 효과에 그치는 경우도 있어, 수면에 미치는 효과에 비해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지 않도록 소비자들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글 정초원 기자 cc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