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위기의 첫 사례인 코로나19 사태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종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의 말을 빌린다면 ‘초거대 위협(mega threats)’을 초래했다. 엔데믹 시대에 접어들더라도 코로나19 사태로 나타난 뉴 앱노멀 현상이 앞으로 더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 어느 분야보다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세계 경제 질서는 각국 간 관계가 “이미 신냉전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미국과 중국 간 패권 다툼이 더 심해지는 추세다. 경제 분야에서 시작된 양국 간 패권 다툼은 이제 정치, 군사, 문화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종에 이르기까지 복합적 중층적 성격을 띠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양국 간 패권 다툼이 동맹국과의 편 가르기 양상으로 치닫는 것은 엔데믹 시대에 더 주목해야 할 변수다. 미국은 전통적인 동맹국뿐만 아니라 인도, 한국 등 지정학적 요충지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협력 프레임을 구축하고 있다. 중국도 사회주의 국가와 브릭스 국가를 중심으로 한 반미 프레임 구축에 분주하다. 코로나19 사태는 세계 경제를 한순간에 ‘원시형 구조’로 바꿔놓았다. 원시형 경제는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절벽형’, 선점 여부가 중요한 ‘화전인식’, 하늘만 쳐다보는 ‘천우신조형’, ‘K자형 계층적 양극화 구조’ 등 크게 4가지다. 미래 예측까지 어렵다고 해서 뉴노멀에 대비해 별도로 뉴 앱노멀이라 부른다.
원시형 경제의 특징을 코로나19 이후 지금까지 세계 경제에 적용해보면 사이먼 쿠츠네츠가 국민소득 통계를 개발했던 1937년 이후 코로나19 기간처럼 세계 경기 앞날이 엇갈리는 적이 없었다. ‘I’자형, ‘L’자형, ‘W’자형, ‘U’자형, ‘나이키형’, ‘V’자형, 심지어는 ‘로켓 반등형’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예측 시각이 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종전에 알려진 거시경제 변수 간에 ‘정형화된 사실(stylized facts)’까지도 흔들어 놓았다. 대표적으로 성장률과 실업률 간의 역관계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각종 지원금에 따른 자발적 실업 증가와 재택근무 등으로 성장률이 둔화되더라도 고용이 줄어들지 않는 현상(job full downturn)으로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흔들어 놓고 있다.
코로나19 시대의 최대 과제로 대두된 인플레이션도 같은 통화정책 시차(9∼1년) 내에 모든 가능성이 한꺼번에 거론되는 ‘다중 복합 공선형’이라는 점이 종전과 다르다. 가장 큰 요인은 코로나19 사태의 초기 충격이 워낙 커 미국 중앙은행(Fed)이 무제한 통화 공급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다른 중앙은행들도 마찬가지다.
2년 전 인플레 지속 여부를 놓고 ‘일시적’이냐 논쟁이 거세질 무렵 당시 각국의 2분기 성장률이 높게 나오자 곧바로 하이퍼 인플레이션 우려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하이퍼 인플레 우려도 잠시 그해 여름휴가철이 끝나자마자 노동 시장을 중심으로 심화된 병목(bottle neck)과 불일치(mismatch), 공급망 붕괴 등으로 비용 요건이 악화되자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부상했다.
공식적으로 엔데믹 시대에 접어드는 올해 하반기에 앞서 현실로 닥치고 있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총수요를 늘리면 물가가 앙등하고 물가를 잡기 위해 총수요를 줄이면 경기가 더 침체돼 정책 대응이 어렵기 때문이다. 각국 국민은 소득이 줄어드는 속에 물가가 오름에 따라 경제고통지수가 높아진다.
각국 중앙은행도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다. 미 Fed는 인플레를 잡기 위해 불과 1년 만에 기준금리를 500bp(1bp=0.01%p) 올렸지만 오히려 경기를 침체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올해 1분기 성장률을 보면 1.1%로 지난해 4분기 2.6%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정도 차가 있지만 다른 중앙은행도 같은 비판을 받고 있다.
전통적인 대책으로는 안 된다. 40년 전 2차 오일쇼크 이후 들이닥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레이건 정부가 곤혹을 치르자 감세 등을 통한 ‘공급 중시 경제학(supply side economics)’으로 경기를 부양하고 물가도 잡을 수 있었다. 이론적 근거가 됐던 래퍼 곡선은 당시 주류경제학이었던 케인즈언의 총수요 이론으로 보면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여러 방안이 모색되고 있지만 각국이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빠르게 정착되고 있는 디지털 콘택트 산업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네트워크만 깔면 갈수록 공급 능력이 확대되는 이른바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디지털 콘택트 산업이 발전되면 고성장하더라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골디락스 국면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챗GPT(ChatGPT)로 상징되는 인공지능(AI)이 세계 경제에 가져올 변화다. 산업의 생장곡선인 S자형 이론으로 보면 AI는 ‘그린 슛(green shoot)’ 단계다. 앞으로 급성장해 세계 경제의 커다란 축이 형성되는 ‘골든 골(golden goal)’이 될 것인지, 아니면 ‘시든 잡초(yellow weeds)’가 될 것인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전자가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디지털 콘택트와 AI 산업이 발전하면 2가지 새로운 현안을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기업 권력이 국가 권력을 넘보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크래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테크래시(techlash)란 ‘기술(technology)’과 ‘반발(backlash)’의 합성어로 각국 정부와 빅테크 기업 간 힘 겨루기를 포함하는 쌍방향 의미의 용어다.
테크래시가 범세계적인 성격을 띰에 따라 디지털 뉴라운드 협상이 전개될 움직임도 주목해야 한다. 디지털 뉴라운드 협상은 디지털 경쟁 정책 라운드(CR: 빅테크 독점 규제), 디지털 기술 라운드(TR: 랜섬웨어 차단), 디지털 노동 라운드(BR: 빈곤층 고용 차별), 디지털 환경 라운드(GR: 무관세 모라토리움 방지) 등 ‘4R’이 핵심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다른 하나는 디지털 콘택트 기업이 시장을 독점할 경우 국가와 기업, 국민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K’자형 구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빅테크’로 상징되는 디지털 콘택트 기업은 발전 정도에 따라 ‘횡재 효과(bonanza effect)’와 ‘상흔 효과(scarring effect)’가 뚜렷하게 나타나 소득 계층별로 중하위 계층이 두터워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이드 섀플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명예교수와 앨빈 로스 하버드비즈니스스쿨(HBS) 교수의 공생적 게임이론이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공생적 게임이론을 경영에 접목시키는 일환으로 BOP(Bottom Of Pyramid), 즉 빈곤층 비즈니스를 새로운 사업모델로 주목하고 있다.
수익과 빈곤층 자립 기반 조성을 동시에 목표로 하는 BOP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동반자 관계 설정, 각종 기부 등을 통해 중소기업과 저소득층과 함께 가는 제3의 길인 ‘임팩트 경영’에도 주력하고 있다. 임팩트, 즉 ‘empact’란 감정이입을 뜻하는 ‘empathy’와 사회적 연대를 나타나는 ‘pact’가 결합된 용어로 사회적 연대 경영을 말한다. 4차 산업혁명 논의 다시 활기 띨까
엔데믹 시대를 맞아 코로나19 사태로 잠시 주춤했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하게 전개될 움직임도 주목된다. 매년 1월 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이해와 영향 그리고 그 대응 방안’을 단골 주제로 다뤄 왔기 때문이다.
WEF 창시자인 클라우스 슈바프는 ‘4차 산업혁명’은 이전 산업혁명보다 훨씬 큰 속도와 강도로 생산, 분배, 소비 등 전체 시스템을 바꾸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인류의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엔데믹 시대에 화려하게 꽃 피울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 확보 여부에 따라 세계 경제 패권과 각국의 운명이 좌우될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 콘택트 산업, BOP 비즈니스, 4차 산업혁명뿐만 아니라 새롭게 떠오르는 알파라이징 산업(α-rising industry), 해빙에 따른 북극과 그린란드에서 시작되는 신천지 산업(new frontier industry), 대중화 단계에 들어가는 우주항공 산업(off the earth industry) 등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제3의 섹터’가 부상할 가능성도 높다.
경제정책 운영과 관련해 공생적 게임이론이 ‘공유경제’ 논의로 급진전되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콘택트 산업의 발전으로 자신의 능력과 결부되지 않은 외부 효과가 많이 발생함에 따라 경제게임 결과를 인정하고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거세다. 능력 이상 얻은 것은 거둬서 능력과 관계없이 피해를 본 경제주체에게 배분해주는 과정에서 공유경제의 논리적 근거가 되고 있다.
‘공유경제를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모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발생하는 제반 문제들이 준(準)공공재 성격을 띠고 있어 ‘국가와 민간’, ‘계획과 시장’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간, 계획과 시장이 함께 풀어 가는 ‘제3의 길’이 모색될 것으로 예상된다. 수출 꺾인 한국 경제의 앞날은
한국 경제는 어떤가. 엔데믹 시대에 들어가는 한국 경제의 앞날은 밝지 않다. 지난 4월에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의 올해 성장률을 지난해 10월 전망치와 비교해보면 미국은 1.2%에서 1.6%로, 중국은 4.4%에서 5.2%로 상향 조정됐다. 하지만 한국은 2%에서 1.5%로 비교적 큰 폭으로 하향 조정됐다.
민간소비, 투자, 정부 지출, 순수출(수출-수입) 등 총수요 항목별 기여도로 IMF를 비롯한 예측기관들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뜯어보면 가장 문제가 되는 항목은 순수출 기여도가 중국은 물론 미국보다 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경제의 상징인 수출은 지난해 9월 이후 7개월 연속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
종전과 달리 수출이 부진한 것은 현 정부 들어 대외 경제정책이 너무 빠른 기간에 미국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대중국 수출 비중이 25%를 차지하는 수출 구조에서 ‘안미경중(安美經中)’으로 상징되는 직전 정부의 대외 경제정책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미국으로 급선회한다면 과도기에서 우리 수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엔데믹 시대에 우리 경제 앞날이 불투명한 것은 ‘미·중 간 경제패권 다툼’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우리 대외 경제정책이 균형을 찾지 못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新)샌드위치 위기 성격이 짙다. 인구절벽 우려 속에 저출산·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점을 감안하면 민간소비 기반도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외 경제정책상의 균형이 회복돼야 한다. 각국이 양대국으로 편 가르기를 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지는 여건에서는 하루라도 앞당겨야 할 시급한 과제다. 거시경제 목표 우선순위도 수정돼야 한다. 단기적으로 물가와 국가채무 억제보다는 경기를 부양하는 쪽으로 무게를 둘 필요가 있다. 경기 부양 주체도 정책당국뿐만 아니라 정치권, 우리 국민이 모두 나서는 ‘공공선(pro bono publico)’ 정신이 발휘돼야 한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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