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문제는 최신 자동차 디자인 방향이 브랜드를 직접 으스대는 단계까지 왔다는 점이다.
[사진] 최근 발표한 BMW 5시리즈의 그릴에는 아웃라인을 따라 조명이 점등되는 ‘아이노킥 글로우’ 기능이 적용됐다.
고가의 차량일수록 자사를 상징하는 다양한 표식을 은근슬쩍 디자인에 녹인다. 부가티의 말발굽 모양 그릴과 벤틀리의 타원형 테일램프처럼 디자인을 통해 은유적으로 브랜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고유한 레시피로 특유의 맛을 내는 것. 그러나 요즘 나오는 신차를 보면 은유 대신 직설적으로 브랜드를 내세우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엠블럼을 여기저기 반복적으로 새기는가 하면, 어떤 브랜드의 차에서는 번쩍번쩍 불까지 들어온다.
BMW는 근래 디자인 변화가 가장 심한 브랜드 중 하나다. 세로로 확장된 키드니 그릴을 사용하면서부터다. 1930년대 초창기 그릴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배경은 그럴싸하지만, 사람들은 이 디자인에 ‘뉴트리아’라는 별명을 붙였다. 길쭉한 앞니 2개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설치류 동물 말이다. 그릴 모양이 어떻든 전체 디자인에 잘 녹아든다면 무엇이 문제랴.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 논란인 것이다. 세로로 길쭉한 그릴은 가로로 날렵한 헤드램프와의 관계성도 어색하고 차를 붕 떠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몇몇 모델의 키드니 그릴에는 조명까지 들어온다. 조명이란 무릇 무엇인가를 잘 보이게 하려는 의도. 주간 주행등(DRL)이 별도로 있음에도 그릴에 조명을 넣었다는 건, 사람들에게 이 차의 키드니 그릴, 그러니까 이 차가 BMW임을 다시 봐달라는 의도로 풀이된다.
아마도 전 세계 자동차 엠블럼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메르세데스-벤츠의 일명 ‘삼각별’일 것이다. 이 브랜드 또한 빛나는 엠블럼 옵션이 존재했지만 그저 별 모양이 반짝이는 것이기에 이질감이 덜했다.
하지만 최근 발표한 신형 ‘E-클래스’에는 빛나는 삼각별이 들어갔다. 그것도 무려 새빨갛게 빛난다. 테일램프 브레이크 등의 광원 모양을 삼각별 모양으로 디자인한 것. 그게 4개나 되다 보니, 중앙의 엠블럼까지 합치면 후면에만 엠블럼이 5개나 드러난다. 뒤차는 새빨갛게 빛나거나 은빛으로 반짝이는 5개의 엠블럼을 보며, 앞차가 메르세데스-벤츠임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된다.
[사진] 메르세데스-벤츠의 신형 ‘E-클래스’의 테일램프에는 4개의 삼각별 모양 램프가 탑재됐다. 상단 중앙에 위치한 엠블럼까지 고려하면 후면에만 5개의 삼각별 로고가 드러난다.
이뿐이 아니다. E-클래스 모델 중 AMG 라인의 전면부 그릴에는 중앙의 메인 엠블럼 외에 무려 212개나 되는 삼각별 패턴이 새겨져 있다. 즉, 그릴에만 총 213개의 엠블럼을 장식한 것.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범퍼 하단 좌우의 검정 처리된 부분(에어 인테이크 주변부)에도 삼각별 패턴을 끊임없이 치장했다. 엠블럼 개수가 얼마나 많은지 세어볼 엄두조차 안 날 정도다.
반면, 반대로 브랜드 존재감을 줄이려는 브랜드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현대자동차다. ‘캐스퍼’와 ‘아이오닉 5’ 이후 최근 출시한 ‘그랜저’와 ‘쏘나타’에 이르기까지 스티어링 휠의 엠블럼 장식을 과감하게 삭제했다. 100여 년 넘게 자동차 운전대 정중앙을 장식해 온 브랜드 엠블럼 대신 현대차를 상징하는 영어 알파벳인 ‘H’를 점자로 새긴 것이다. 심지어 ‘아이오닉 5’와 ‘아이오닉 6’의 내수 모델은 자동차 후면에도 엠블럼을 없애, 뒤따라오는 차가 앞차가 어느 브랜드의 모델인지 알 수 없게 했다.
폴스타의 경우도 비슷하다. 현대차처럼 엠블럼을 없앤 것까지는 아니지만 차체 도장과 같은 색상으로 칠해 눈에 띄지 않게 했다. 크롬 도금을 없애 친환경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엠블럼에 도장을 하든 도금을 하든 환경에 미치는 차이가 얼마나 될까. 결국 엠블럼을 눈에 덜 띄게 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사진] 현대자동차 ‘쏘나타 디 엣지’의 스티어링 휠에는 엠블럼이 삭제됐다.
이렇듯 어떤 브랜드는 그릴이나 엠블럼으로 브랜드를 더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반면, 또 다른 브랜드는 정반대의 행보를 취한다. 일종의 엠블럼 양극화 현상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현재 자동차 시장은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100년이 넘은 내연기관 기술이 어느 정도 상향평준화돼 브랜드별 격차가 예전 같지 않다. 특히 앞서가던 브랜드들이 전기차 생태계로의 전환을 위해 내연기관 관련 투자를 줄이는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두 그룹의 기술 발전이 둔화하면서 뒤따라오던 그룹들과의 기술 격차가 급격하게 가까워지고 있다. 반면 전기차는 기술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에 신생 브랜드가 무섭게 치고 올라온다. 결국 모두가 엇비슷한 영역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초조한 것은 전통적인 강자들일 수밖에 없다. 제품의 됨됨이가 곧 브랜드이자 색깔이었던 과거와 달리, 점점 내세울 만한 차별점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릴을 키우고, 차체에 엠블럼을 수십·수백 개씩 치장하며 보다 노골적으로 브랜드를 강조하려 한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브랜드 이미지가 약한 경우에는 오히려 제품 자체만으로 승부를 보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내로라하는 유명 자동차 브랜드들이 디자인 균형을 깨뜨리면서까지 심벌을 강조하거나, 자사 엠블럼을 여기저기 붙여 놓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상품성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호령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간판을 내세워야 하는 ‘종이호랑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물론 이는 개인적 생각. ‘드러내지 않을수록 품격이 올라간다’는 훈화 말씀을 들으며 자란, 고리타분한 ‘아저씨’의 의견이다.
글 김준선 자동차 칼럼니스트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