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돌아가는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자식들에게 연거푸 얼른 들어가라고 손 흔드는 95세의 홍경용(가명) 씨. 지난 2월 70년 넘도록 함께했던 안사람을 먼저 보내고 난 후 처음으로 혼자서 서울 자녀들 집에서 보름도 넘게 지내다가 시골로 향하는 길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자녀, 손주들 함께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비록 시골 방에는 아내의 사진만 덩그렇게 남아 있고 함께 사는 시골 자녀 내외도 일 때문에 홍 씨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만 그래도 오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간다. 또 먼저 떠나 성당 묘역에 묻힌 아내 근처로 가려면 지금이라도 성당에서 교리 공부에 빠질 수 없다. 홍 씨는 아내가 병실에 있을 때 혼자가 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했었다. 내가 살았던 곳이 시골이지만 스스로 일상생활을 해내려면 낯설게 느껴지는 시니어타운으로 가야 하는가. 비싼 보증금과 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고 주변 이야길 들어보면 결국 생활비를 부담할 수 있는 연금생활자들이 주로 입주할 수 있어 마음을 접었다. 노후 생활을 걱정하는 것은 당사자뿐만이 아니다. 특히 부모와 함께 하지 못하고 삶의 터전이 해외에 있는 자녀들의 마음은 더 답답하다.
Case 02
금실 좋은 부부로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며 평온한 노년을 꿈꾸던 박기형(가명) 씨. 건강하던 아내가 70대 중반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학 후 해외에서 결혼과 직장 생활을 하던 두 딸 역시 건강했던 엄마를 마음으로 보내지 못한 채 멀리서 아버지 생활을 염려할 뿐이었다. 건강했던 아버지도 5년이 지나며 몸도 마음도 지쳐 최근에 잘 연락이 되질 않아 근처에 사시는 작은아빠가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병원에 옮겨 겨우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응급 상황을 넘겼지만 점점 쇠약해져 가는 아버지의 거처와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지금 같은 상황이 재현되면 돌아가신 뒤에 부랴부랴 장례만 치르고 또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우리 가정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삶을 살아 가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과연 노후의 멋진 생활과 자존감 그리고 가족 모두의 편안함과 행복은 찾을 수 있을 것인가.
Case 03
IMF 외환위기 때 사업 실패로 건강이 악화돼 먼저 떠난 남편 대신 삼남매를 잘 키운 김영미(가명) 씨. 80대 중반이 돼 자신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침대에서 넘어지고 욕실에서 크게 또 넘어지면서 골절로 어쩌면 이렇게 지내다가 끔찍이도 싫은 요양원에서 자신의 삶이 마무리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가정을 이루고 직장 생활과 아파트 1채씩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는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재테크에도 신경을 쓴 덕분에 4층짜리 상가건물에 살면서 300만 원 임대료를 받아 생활하고 있다. 막내아들 낳아 잘 키워 덕을 보려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니 주변에 살고 있는 딸과 함께 자주 병원을 다니게 된다. 처음엔 아들의 노후 대비를 해줄 수 있겠다는 기쁨으로 작은 땅에 건물을 올렸지만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를 내 자신을 위해 소요되는 많은 비용들을 감당하려면 건물을 처분해 달라고 부동산에 의뢰했다. 죽은 뒤 자녀들은 서로 분쟁 없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우리 사회는 급속한 고령화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된 일본에 관한 뉴스를 볼 때마다 ‘과연 그럴까’ 했던 일들이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르신 사망 후 겪게 되는 상속 잘하기 주제를 넘어 평온한 노후의 삶 준비하기라는 명제를 함께 겪는 상황이 도래했다. ‘건강보험도 110세를 넘어 120세까지 넉넉히 들어 놓아야 하나’라는 고민은 젊은 필자에게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다. 나이가 들수록 철저히 외로움을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정신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조언 못지 않게 안심할 수 있는 노후의 삶을 뒷받침해줄 경제적 안전장치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전체 5100만 명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14%를 넘어선 2017년 이래, 7년 뒤인 2030년이면 25%로 전 인구의 4분의 1이 노인인구가 된다. 한국과 일본의 통계자료를 비교해보면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에 한국이 39.8%, 일본은 38.8%로 오히려 한국은 더 심한 노인국가로 변모될 것으로 예상된다.
2020년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 자료에 의하면 곧 다가올 2025년 전체 가구 수는 2000만 가구를 넘게 되는데 그중 노인 1인 가구 비중이 18.5%로 2000년 7.7%에 비해 급속히 늘고 있어 홀로 되신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우리 사회의 큰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노인가구를 기준으로 본다면 노인 1인 가구 비중은 65%를 상회하게 돼 우리 사회 어르신들의 3분의 2와 그 자녀들 모두가 겪게 되는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안전한 재산 관리로 신탁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탁은 원래는 자신의 토지를 어린 자녀에게 안전하게 이전해줄 수 있는 안전장치로 시작됐다. 중세유럽 십자군전쟁 때 전쟁에 나가는 남자가 전쟁에서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토지를 맡겨 놓은 후 어린 아들이 성년자가 되면 주라는 것이 신탁의 유래다. 당시 토지는 부녀자가 소유할 수 없었기에 부득이 이런 제도가 나온 것이었다. 안전한 재산 이전을 목적으로 시작된 신탁제도는 안전한 투자 장치와 재산 관리 도구로 발전하게 된다. 금융기관 또는 관련 업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기관에 재산을 맡겨 안전한 관리와 자산 운용을 할 수 있다면 노후에 발생하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개정 ‘신탁법’ 시행으로 정식 명문화된 유언대용신탁과 수익자연속신탁의 개념은 이젠 여러 금융기관들의 신탁 상품화와 법무법인 등 전문기관 등의 상담 자문 제공 그리고 언론 홍보를 통해 새로운 상속 수단으로 조금씩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유언의 역할을 하는 신탁은 이젠 더욱 다양한 역할을 통해 한국 사회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노후의 삶의 안전장치 기능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과연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나의 부모님, 앞으로 나와 배우자 그리고 우리 가정 모두의 문제를 해결할 신탁 2.0은 어떤 것이 있을까.
안전한 주거 문제 해결
최근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소재한 시니어타운의 분양이 시작됐다. 7억 원부터 22억 원까지 적지 않은 보증금 규모이지만 관계자에 따르면 10여 년 전 시니어타운 분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관심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2020년 보건복지부 현황에 따르면 시니어타운은 36개소로 약 7900여 명이 입소해 노인인구 중 극히 일부만이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최근 호텔 운영 기업, 제약 기업 나아가 보험 업계도 시니어타운과 요양시설에 대한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시니어타운에 입소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의료 서비스 등 컨시어지 서비스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어 경제적 여건만 허락된다면 안락한 노후에 도움이 되고 자녀들도 부양에 대한 부담도 덜 수 있다. 하지만 공급의 한계와 경제적 부담 그리고 물리적인 지역적 한계 상황은 모든 시니어를 만족시킬 수 없다.
신탁은 시니어타운에 있는 경우에도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년층 모두를 위해 안전한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가진 현금이나 부동산을 신탁으로 금융기관 등에 맡겨 관리·운용하면서 자신의 병원비, 간병비 등에 제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처리할 수 있다. 내가 정신적으로 건강한 시점에 미리 재산을 신탁해 내가 원하는 대로 운용하고 필요한 곳에 적정한 금액을 지출할 수 있도록 정해 놓는다.
시니어타운에 거주하는 경우에도 보증금이 사후에 누구에게 제대로 갈 수 있는지를 정해 놓을 수 있다. 최근에는 시니어타운의 보증금이 주택연금과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신탁 방식의 구조 설계를 통해 시니어타운의 안전한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상속세 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치매로 인한 재산 관리의 어려움 해결
노년의 어르신의 경우 암이라는 질병보다 두려운 것이 치매라고 말씀하신다. 중앙치매센터의 현황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65세 이상 어르신 중 약 800만 명 이상이 치매 진단을 받고 있다.
치매로 인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평소 건강관리와 함께 건강한 재산 관리의 지혜가 간절하다. 바로 신탁은 치매로 인한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재산 관리의 문제를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제대로 재산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실행 방안을 신탁 계약에 구성하는 것이다. 병원비의 지급 관리, 내 상황에 맞는 적절한 운용, 필요할 경우에는 부동산의 매각을 통한 현금화 조치 등 다양한 계획과 실행 방안을 수립해 놓을 수 있다. 그러한 업무를 나를 대신해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녀나 지인을 지정할 수도 있고 수탁자로 하여금 자금 인출 확인 의무를 부여하거나 신탁 전반에 대한 관리자를 두어 내 삶을 안전하게 지켜 갈 수 있다.
노후 의료 케어와 결합 지원
치매와 같은 두려움은 결국 건강의 문제로 귀결된다. 한국만큼 좋은 의료시설과 시스템이 갖추어진 나라도 드물다. 미국의 경우 한번 수술이라도 할 경우 수천만 원부터 수억 원에 이르는 의료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보편적인 의료 시스템과 신탁제도가 제대로 결합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과의 2가지 측면에서 신탁 기능의 진화를 고려할 수 있다.
기부와의 결합이다. 생전기부를 통해 내가 원하는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꾸준히 받을 수 있는 기존의 기부 체계를 넘어 사후기부 또는 일부 생전기부와 사후기부 결합 등 다양한 방식의 기부와 재산별 재산 관리와 기부를 결합한 신탁 설계를 통해 사회적 가치 실현과 안정적인 치료 케어를 받는 방안이다. 생전에 큰돈을 기부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사후 정산 방식의 기부가 활성화된다면 세제 혜택 기반과 함께 좀 더 많은 시니어층과 자녀들의 기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것이다.
장례와 장지 문제 해결
우리 사회에 상조 서비스는 생활화됐다. 우리 삶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상조 서비스를 신탁을 통해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안전한 상조 회사와 신탁의 결합 서비스를 통해 기존 상조 서비스의 질적 제고를 기대할 수 있다. 기존 서비스 대비 비용 절감과 상조 회사의 디폴트 리스크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신탁을 통해 좀 더 안전한 노후 대비를 계획할 수 있으며 상조를 넘어 장지의 선택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 이처럼 신탁은 나를 비롯한 우리 가정의 든든한 자산관리 플랫폼으로서 의료, 후견, 상속 계획과 승계, 기부 그리고 상조와 장지에 이르는 모든 삶의 과정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 지난 2011년 법 개정으로 유언의 뜻을 담아 유언자의 그 뜻을 원하는 대로 실현하게 해주는 그릇으로 인식됐던 신탁은 이제 초고령사회를 앞두고 우리 사회의 안전하고 행복한 노후의 삶을 실현시켜줄 출동 준비가 돼 있다.
글 배정식 법무법인 가온 패밀리오피스센터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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