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불확실의 연속이며,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늘 달라지기 마련이다. 고령화 시대 신탁이 주목받는 이유도 이러한 ‘불확실성’과 맞닿아 있다. 불확실한 노후를 대비해 맞춤형 만능 자산관리사로 부상 중인 신탁의 질주는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big story]노인 1000만 시대, 신탁 자산관리 속도 낼까
바야흐로 ‘뷰카(VUCA)’ 시대다. 뷰카란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함(Ambiguity)의 영문 머리글자를 합친 용어로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즉각적이고 유동적인 대응 태세와 경각심이 요구되는 상황을 나타내는 군사 용어다. 2010년 이후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디지털화(digitalization)가 가속화됨에 따라 현재는 불안정한 금융 시장과 고용 시장의 상황을 표현하는 용어로 더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다이내믹’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세상은 급변하고 있지만, 미래 생존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지는 양상이다.

올해 우리나라 경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모양새다. 최근 국내외 주요 경제기관이 하반기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잇달아 낮추고 있다. 지난 5월 19일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두 달 만에 성장률 전망을 기존 1.6%에서 1.5%로 하향했고, 같은 달 3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성장률 전망을 기존 1.4%에서 1.1%로 수정했다. 지난 4월엔 국제통화기금(IMF)이 성장률 전망을 기존 1.7%에서 1.5%로 내렸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아시아개발은행(ADB)도 각각 1.6%, 1.5%로 조정했다.

꺾이지 않는 고물가와 늘어나는 실업률, 글로벌 긴축과 유동성 위기, 지정학적 리스크 등 금융 시장을 둘러싼 시장 환경이 녹록지 않으면서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자산 시장 전반으로 투자심리도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내 미래 불안감을 부추기는 거대 암초는 ‘고령화’다. 고령화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미래가 아닌 현재가 됐다. 최근 행정안전부의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943만2919명으로 집계됐다. 총인구수 5140만8155명 대비 노인인구 비율은 18.3%에 달한다. 정부는 내년에 노인인구 10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베이비붐(1955~1963년생) 세대가 속속 노인인구에 편입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고령화 비율 증가 속도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저 남의 일 같던 치매 사례도 그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가 발간한 ‘대한민국 치매 현황 2021’에 따르면 2020년 말 전체 치매상병자 수는 91만1529명이다. 이 중 65세 이상 치매상병자 수가 82만9227명으로, 91%를 차지한다. 전체 65세 이상 노인인구(813만 명)의 10.2%가 치매를 앓고 있는 셈이다.
그중 경도인지장애는 약 30만 명에 이른다. 경도인지장애는 기억력이나 기타 인지 기능의 저하가 뚜렷하지만, 일상생활 능력이 떨어지지 않아 아직 치매가 아닌 상태다. 경도인지장애가 3년 내 치매로 진행할 위험성은 60%로 높다. 여기에 인구절벽과 여전히 경제위기론이 사그러들지 않는 상황에서 자산관리는 미뤄도 될 노후의 과제가 아닌 지금 당장 준비해야 할 의무가 돼 버렸다.

얼마 전 40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퇴임한 70대 A씨는 요즘 걱정이 많다. 평생 이렇다 할 재테크 대신 오롯이 노동수익으로 30억가량(아파트 1채 소유 포함)을 저축한 그는 나날이 세금 및 각종 부담금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은퇴 후 삶이 마냥 편치만은 않다고 했다. A씨는 “10년 전만 해도 은퇴 후 20억만 있으면 아내와 죽을 때까지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솔직히 요즘은 치솟는 물가만 봐도 두렵다”며 “경기도 좋지 못하다 보니 이렇다 할 투자처를 찾기도 어렵다. 앞으로 어떻게 자산관리를 해 나가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비단, 이런 고민은 A씨만의 일은 아니다. 직장인들 대다수는 소득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퇴직을 하기 마련이다. 단, 문제는 퇴직 후 소득은 ‘0’이 되지만 지출은 이전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그 이상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퇴직 나이와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 사이의 공백이 길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미래 불안요소들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한경 머니는 ‘신탁’에 주목했다. 계약 조건에 따라 다양한 옵션으로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본인의 재산을 관리해주고, 가족에 대한 케어까지 가능한 신탁의 확장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신탁, 자산관리 구원투수로 등판
‘믿고 맡긴다’는 뜻의 신탁(信託)은 예금, 펀드 등 금융 자산은 물론 부동산과 같은 비금융 자산에 대한 안정적 관리와 함께 고객의 재산을 생전부터 보관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정할 수도 있어 자신의 노후를 위한 방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신탁 계약 자체가 재산의 유언과 같은 효력이 있어 수탁자에 의한 상속 집행을 통한 가족 간 다툼의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 상속인이 어리거나 자산관리 능력이 부족한 경우까지 보살필 수 있는 관리 방법도 준비할 수 있다.

신탁 플랫폼을 기반으로 부동산 자산의 경우에도 다양한 솔루션이 가능하다. 매각 후 상속할 경우와 상속으로 갈 경우 세금의 차이를 비교함은 물론이고, 그 부동산을 보유할 경우 관리 방안과 자산 가치를 증식하기 위한 사전증여와 신축 콘셉트 등에 대해서도 동반자로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미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신탁 상품이 출시돼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지고 있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늘어난 수명만큼 자산관리에 대한 고민도 가지각색”이라며 “최근 수년째 고액자산가들 중심으로 상속·증여 플랜의 일환으로 유언대용신탁, 수익자연속신탁을 활용하고자 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다양한 재산을 종합적·적극적으로 관리하는 유연한 신탁 본연의 기능이 부각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big story]노인 1000만 시대, 신탁 자산관리 속도 낼까
이런 흐름에 따라 국내 신탁 시장의 외연도 넓어지고 있다. 지난 4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2년 신탁업 영업 현황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60개 신탁사 수탁고는 총 1223조9000억 원을 기록했다. 2021년 말 대비 4.9%(57조2000억 원) 증가한 수준이다. 구체적으로 은행 수탁고(541조8000억 원)와 보험사 수탁고(19조7000억 원)가 각각 전년 말 대비 9.4%, 8.3% 증가했다. 신탁보수 역시 전년 대비 3.2%(714억 원) 증가한 2조2996억 원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고령화 시대와 맞물려 신탁은 투자 기능뿐만 아니라 재산 관리의 고유 기능을 활용해 생존신탁(가족을 수익자로 지정해 생존 시 파산, 질병 등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의 생활비 등을 보호)이나 유언신탁(사망 시를 대비해 상속재산 처분 계획을 미리 설정), 사회안전망 역할을 담당할 후견신탁이나 복지신탁 등 다양한 변주를 시도 중이다.

배정식 법무법인 가온 패밀리오피스센터 본부장은 “국내 신탁 시장이 외연의 확장말고도 내실 면에서도 진화 중”이라며 “이른바 ‘K-신탁’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고유의 경쟁력을 쌓아 가고 있다. 한국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응용력과 추진력, 창의력이 강한데, 그런 강점들이 신탁이 지닌 유연성과 더해져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배 본부장은 그러면서 “다만, 이러한 신탁의 유연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신탁을 오롯이 활용하기엔 규제도 심하고, 업권 간 갈등이 크다”며 “무분별한 경쟁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신탁 시장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곧 소비자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와 상품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