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TALK
앤드루 도이그 <죽음의 역사>

귀해진 죽음, 더 귀한 삶
[한경 머니 기고=서메리 작가] 내게 처음으로 그런 경험을 안겨준 것은 동갑내기 단짝 친구였다. 밝고 귀엽고 착한 아이였는데, 갑작스러운 암 선고를 받더니 통통하던 볼이 홀쭉해져서는 눈 깜빡할 사이에 떠나 버렸다. 성장기에 생겨난 암세포는 환자의 키만큼이나 빨리 자란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두 번째로 겪은 죽음은 대학교 신입생 때 찾아온 친구네 할머니의 장례였다. 발이 워낙 넓던 친구였던 데다 마침 빈소가 학교에서 멀지도 않은 시내 대학병원이어서, 과 동기들이 우르르 몰려가 조문을 했다. 고인의 가족들은 그래도 편안히 가셨다며 담담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히려 함께 찾아간 아이들 몇 명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친구의 상실을 동정해서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앞으로 겪게 될 자신의 상실에 이입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울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게 두 번째 경험이었다.

이후로도 몇 번인가 죽음을 겪었다. 지인이 떠난 적도 있고, 친척 어른이 돌아가신 적도 있다. 규모가 큰 회사에 들어간 후로는 몇 주, 몇 달 주기로 누군가의 부고(訃告) 이메일을 받았다. 대부분은 얼굴도 모르는 다른 팀 직원의 가족상이었지만, 가끔은 나와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의 이름도 보였다. 그런 날이면 회사 일을 마치고 탕비실에 비치된 부의금 봉투를 챙겨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조문을 하러 갔다.

그렇게 갔던 모든 장례식을 나는 기억한다. 정확히 숫자를 댈 수 있다거나, 모든 장면이 생생히 떠오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전부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내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게 그토록 강렬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아마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사형수다”라는 알베르 카뮈의 선언처럼 우리에게 죽음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하고 비현실적인 운명이니까.

하지만 여기에 더해, 최근 나는 한 가지 생각을 더 하게 됐다. 나를 스쳐간 모든 죽음을 기억하는 건, 그 사건들의 중요성뿐만이 아니라 희귀성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쉽게 잊어버릴 만큼 상실을 많이 겪지 못했다. 나이가 젊은 것도 큰 몫을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 죽음이라는 게 흔하지 않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질병이나 사고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자연의 섭리인 노화조차 쉽게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지인들이 생생히 각인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병에 걸려도, 자동차에 받혀도, 나이가 노년을 훌쩍 넘겨도 쭉 살아가니까.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리는 사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역사>는 제목처럼 죽음을 다룬 책이다. 통계 자료를 기반으로, 중세부터 현대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죽음의 원인과 형태, 결과를 분석하고 있다. 현대의 인간이 과거에 비해 긴 수명을 누린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수백 페이지짜리 책으로 그 변화의 모습을 확인하는 건 또 다른 감각이다.

불과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참 많이, 쉽게 죽었다. 역병이 돌면 마을이 전멸하고, 전쟁이 터지면 젊은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자연재해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기근이 닥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책 속에 묘사된, 땅에 떨어진 오물을 주워 먹기 위해 거리를 누비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괴로워서 제대로 읽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큰 사건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툭하면 죽어 나갔다. 위생적인 시설도 없는 환경에서 평생 1~2년 간격으로 출산을 하던 여성들은 매순간 산욕열의 위협을 받았다. 남성들은 징집을 당했고, 상상하기도 힘든 인원이 고문과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마당에 어렵게 낳아 키운 아이의 절반 가까이는 만 6세 이전에 사망했다. 심지어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1세의 자녀들도 16명 중 고작 2명만 생존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고, 그래서 생존이 곧 전투이던 시절은 19세기까지도 이어졌다. 1860년대만 해도 세계 최장신 국가인 네덜란드의 평균 신장은 164cm였다(현재는 182cm에 육박한다). 그 시절 세계 인구의 기대수명은 고작 40세가 될까 말까 했다. 이 단적인 사실들이 말해주듯, 오늘날 우리가 아는 건강과 수명에 대한 상식은 생각보다 훨씬 최근에 정립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영양학적으로 획기적인 연구와 발전이 이뤄지고, 수많은 질병이 정복되면서 우리는 갑자기 가까운 선조들보다 2배 이상 오래 살 수 있게 됐다. 지난 몇 년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끔찍한 시련이었지만, 흑사병이나 티푸스, 스페인 독감에 비하면 피해 규모가 훨씬 적었다. 2000년까지만 해도 주요 사망 원인이었던 뇌졸중과 심장 질환 역시 그 위협도가 가파르게 떨어지는 추세다. 그만큼 수명과 관련된 과학 분야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죽음이 귀해지는 사이, 삶은 어쩐지 흔해빠진 대상이 돼 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매일 이어지는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오래 살 수 있게 된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죽음을 유발하는 선택을 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현대인을 위협하는 주된 사망 원인은 비만과 약물, 폭력, 속도(교통사고)다. 16~40세 사망 원인 1위는 수년 연속 자살이었다.

<죽음의 역사>는 죽음에 대한 책이다. 400페이지 남짓한 글 안에 ‘죽음’, ‘사망’ 따위의 단어만 1000번은 족히 등장한다. 이토록 집요하게 죽음에 대해 파헤치는 책을 읽으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이 죽는 온갖 이유를 보여주며,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역설적인 메시지였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귀한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삶은 더 귀하다고. 그러니 우리, 힘들어도 힘을 내서 살아보자고.

글·그림 서메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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