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로 ‘소망목록’을 의미하는 ‘버킷리스트’. 최근 수년째 이 소망목록과 관련해 다양한 비즈니스들이 늘어나고 있다. ‘번아웃’과 ‘자기계발’ 사이 그리고 진짜 나를 찾는 행복한 여정에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버킷리스트의 참 매력은 무엇일까.
[special]소망에서 비즈니스로...버킷리스트에 투자하라
#1 올해 8월 정년퇴직을 앞둔 60세 A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30년 넘게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는 “노후 대비를 위한 자산관리는 잘 마련해 놨지만, 일 외에는 딱히 뭘 해본 게 없어 퇴사 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변에서는 여행이나 다니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것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지 의문”이라고 토로했다.

#2 사회 생활 5년 차에 접어든 32세 B씨는 퇴근 후 사내 헬스장으로 향한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일이 끝나면 회사 동료나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던 그였지만, 지난해 ‘공황장애’ 판정을 받으면서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 B씨는 “살기 위해 시작했던 운동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면서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됐다”며 “그 과정에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난다. 지난해 버킷리스트는 ‘10kg 감량’이었는데 올해는 꼭 ‘마라톤 완주’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행복의 조건으로 ‘버킷리스트’가 재조명되고 있다. 버킷리스트의 어원은 ‘양동이를 차다(kick the bucket)’란 영어 관용어에서 왔다. 목을 매고 죽을 때 양동이 위에 올라가서 목을 밧줄에 걸고 양동이를 발로 차서 죽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죽기 위해 마지막으로 하는 행위라는 험한 뜻이었으나 지금은 죽기 전에 꼭 한번쯤은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정리한 목록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2007년 개봉한 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버킷리스트> 이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 내 ‘워라밸’, ‘힐링’, ‘행복’이란 키워드는 주류가 되지 못했다. 그저 무한 경쟁과 경제 성장으로 ‘번아웃’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버킷리스트는 흡사 마법과도 같은 단어였다.

각종 미디어에서도 ‘버킷리스트’를 거침없이 활용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각자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 버킷리스트 대개가 일생의 거대 프로젝트로 종종 비춰지면서 ‘소망목록’이라는 본뜻과는 달리, 버킷리스트 역시 죽기 전에 반드시 이뤄야 하는 일종의 과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 등장한 것이 소확행이다. 양극단 사회 속 구조적으로 자기실현의 욕구를 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은 작은 것부터라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의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크고 거창한 행복을 바라는 대신 일상 속 작은 행복을 자주 느끼면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자는 일종의 대중심리가 확산됐다. 여기에 ‘나다움’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MZ(밀레니얼+Z) 세대가 우리 사회 주류로 등장하면서 ‘버킷리스트’ 관련 마케팅과 비즈니스도 새롭게 재발견되고 있다.

공정과 보상을 중시하는 MZ세대는 일을 단순히 생계 유지 수단으로 여기던 과거와 달리, 일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는 경향이 짙어졌다. 자아실현뿐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 사회적 가치 실현 등 개인의 성향과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일을 선택하는 우선순위가 달라진 모습이다. 자신이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위협받는다면 퇴사도 서슴지 않는다. 따라서 기업에서도 인재 확보를 위해 직원들의 ‘자아실현’을 돕고자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펀딩 플랫폼 와디즈는 임직원 대부분이 MZ세대인 점을 고려해 업무 자율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적절한 휴식 공간을 마련해 직원들이 업무 능률과 사기를 끌어 올리는 것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버킷리스트’라는 이름의 내부 설문을 진행하고 설문 결과를 토대로 사내 카페, 안마의자가 구비된 라운지, 스낵바, 3년마다 주어지는 2주간의 리프레시 휴가, 서울·경기 지역 출근버스 등을 실행했다.

KT의 클라우드 사업 자회사인 KT클라우드도 고유의 기업 문화 프로그램 ‘보일링 포인트’를 도입해 세대별 교류와 세대 간 융합, 전 직원의 소통과 공감에 힘을 쏟고 있다. 보일링 포인트는 끓는 점(섭씨 100도)을 의미한다. 참가자 스스로 활동 주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며, 회사는 반차, 활동 지원비, 버킷리스트 등을 지원하고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이처럼 버킷리스트를 활용해 사원들의 업무 능률은 물론, 자기계발을 돕는 사례도 늘고 있다. ‘소통’이 중요한 시대에 버킷리스트는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한 기업관계자는 “직원들의 ‘버킷리스트’를 공유하면서 서로의 취향이나 회사 생활에서 얻고자 하는 니즈들을 더 직접적으로 확인하게 됐다”면서 “특히, 젊은 MZ세대 직원들과 어렵게 느껴졌던 소통도 한결 수월해졌다. 앞으로도 일 외에 직원들의 성장과 안정을 위해 이런 프로그램들을 자주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special]소망에서 비즈니스로...버킷리스트에 투자하라
은퇴 후 나를 찾는 중장년 늘어
버킷리스트의 재발견은 중년에게도 적용된다. 중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체성에 혼란을 겪어보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이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며, 과연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지 이런저런 고민들에 사로잡혀 잠 못 이룬 이들도 있을 터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로 설명한다.

캐나다의 정신분석학자 엘리엇 자크가 1965년 주창한 개념으로, 여기서 중년은 사람이 삶의 유한성에 직면하면서 젊은 시절에 가질 수 있었던 꿈과 목표가 점차 사그라지는 시기라고 정의한다. 또한 사회적 역할 변화와 체력 쇠퇴, 죽음에 대한 자각, 미래에 대한 불안 등으로 인해 사춘기처럼 자아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 특히, 100세 시대가 현실로 다가온 지금 행복한 노후를 위한 대비도 시대적 과제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액티브 시니어’가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60세 이상 국민은 노후를 취미 활동(58.7%)이나 소득 창출 활동(17.2%)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 국민 여가 활동 조사’에서도 지속적인 여가 활동 비율이 60대가 52.1%로 가장 높다. 생산적 활동뿐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여가 활동을 즐기려는 의지가 강한 세대다. 이들은 그동안 축적한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주체적인 삶을 지향한다.

이처럼 자신만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세대를 ‘액티브 시니어’ 또는 ‘오팔(Old People with Active Life·OPAL) 세대’라고 부른다. 이들을 타깃으로 한 비즈니스 모델에도 돈이 몰린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2015년 트렌드 및 소비자 분석 자료’에 따르면, 액티브 시니어들의 월평균 카드 사용액은 177만 원으로 30·40대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액티브 시니어들 역시 ‘진짜 나다움’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버킷리스트 실천에 나서고 있다고. 여행 비즈니스가 가장 대표적이다.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억눌려 있던 여행 수요가 급증하면서 여행의 선택과 일정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워케이션, 한 달 살기, 혼자 여행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한 여행으로 변화하는 추세로 앞으로는 더욱 여행 형태가 다양화·개인화 될 전망이다. 특히 라이프스타일과 관심사를 반영한 테마 여행, 전문가와 동행하는 체험 여행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나날이 중장년은 패키지여행, MZ세대는 자유여행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며 “40~60대 여행객들도 여행 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적이며, 20~30대 여행객들도 원하는 인플루언서와 함께 가치를 실현하는 여행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실제로 하나투어가 길바울과 함께하는 키르기스스탄 트래킹 상품, 안시내 작가와 함께하는 베트남 사파 트래킹 상품 등이 당일 완판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앞으로도 다양한 세대들의 버킷리스트를 실현할 수 있는 차별화된 테마 여행 상품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