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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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머니 기고=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맛있는 것을 먹거나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아지면 두둥실 몸까지 뜨는 소년. 뜨는 몸을 막으려고 무거운 쇳덩이를 가방에 넣고 발목마다 모래주머니를 2개씩 차고 다니며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언제나 끝나지 않는 원주율을 외는 아이 김봉석. 교통사고로 차가 전복돼 아스팔트 위를 굴러도 17대1로 싸우다가 머리가 깨지고 높이뛰기를 하다가 발목이 꺾여도 거짓말처럼 원상복구가 되는 아이 장희수. 누구보다 빠르고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그 힘을 숨기느라 누구에게도 쉽사리 가까이 가지 못하는 수줍고 외로운 아이 이강훈. 세상을 움직이는 초능력을 지닌 한국형 슈퍼히어로물 <무빙>은 바로 이 아이들과 그 가족의 이야기다.

<무빙>의 초능력자들은 비범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의 세상에서 중심이 되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로서 살아간다. 남다르게 초월적인 능력이라는 것이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아주 오래된 옛이야기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한때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아기장수’ 설화에서 주인공 우투리의 부모는 출생부터 비범했던 아이 때문에 밤낮없이 걱정하고 고난을 겪으며 결국 아이를 배반하고 함께 파멸한다. 이 옛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못된 임금과 탐관오리를 만나 어렵게 살아간다. 때를 맞춘 듯 극심한 가뭄은 먹고사는 문제조차 어렵게 만들고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생업에 종사하던 선량한 사람들마저 관아에 불을 지르고 남의 물건을 약탈하는 도둑질을 하도록 내몬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낯선 소문 하나가 떠돈다. 폭정과 재난에서 세상을 구할 아기장수가 태어난다는 소문. 날개를 달고 용마와 함께 태어난 비범한 아이가 이 세상을 둘러엎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눈에 불을 켜고 반란의 역적을 잡으려는 나랏님의 법 때문에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오히려 아득한 절망이 된다. 비범한 아이는 부모에게만 걱정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땅이 나빠 그런 아이가 태어났다며 불을 질러 산사람까지 다 살라 버리는 관군들 탓에 마을 사람들조차 아직 채 자라나지 않은 영웅의 비범성을 경계한다.

드라마 <무빙>에서 은퇴한 초능력자들을 관리하고 그다음 세대 아이들의 잠재적 능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훈련시키는 사업, 이른바 ‘국가재능육성사업(National Talent Development Project·NTDT)’을 담당하는 국가기관(국정원)과 학교(정원고교)는 이 옛이야기 속 나랏님과 탐관오리, 인륜과 천리를 따지지 않고 법을 앞세우는 관군들의 현대적 버전에 다름 아니다.

초능력자들을 지칭하면서 국정원 NTDT 관리자들이 사용하는 ‘품종’, ‘재배’와 같은 용어들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회구성원을 ‘사람’이 아닌 국가 소유의 ‘자원’으로 파악하는 구시대적 사유가 여전히 공고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정부는 초능력자라는 ‘자원’을 독점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관리하고 ‘품종’ 개량을 위해 ‘옮겨심기’를 한다. 잠재력을 지닌 아이들을 관리하면서 발현된 초능력을 갖춘 아이들을 A급으로 분류하고 몰아세우며 착취한다. 이 방식은 강대국의 초능력자 활용 방식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은퇴한 국정원의 초능력자들을 ‘청소’하기 위해 파견된 프랭크(F)의 코드명은 알파벳 순서에 따르며 미국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초능력자들 가운데 여섯 번째 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대상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훈련받아 왔다. 자신이 하는 일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 그저 하달된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국내에서 이러한 훈련은 ‘학교’라는 공교육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NTDT의 총괄 책임자인 조 과장은 아이들을 성장 과정 중의 ‘학생’으로 대하는 담임 최일환의 행동을 “선생 다 됐네”라는 빈정거림으로 경계한다. 두 사람 다 차세대 초능력자 양성소로서의 ‘학교’ 업무를 담당하는 국정원 요원들이지만 이들의 태도는 전혀 다르다.

정원고교의 교장이기도 한 조 과장은 아이들이 ‘사업’에 쓸 수 있는 ‘자원’인지를 파악하는 데만 관심을 둔다. “그 애가 정말 괴물 같았어?”, “네, 분명히 상처가 있었어요. 찢어지고 베이고 깨졌는데 순식간에 다 나았어요. 걘 사람이 아니에요. 걘 괴물이에요.”, “그러니까 확실히 괴물이라는 거지. 응?” 자기 반 학생들이 보통의 아이들처럼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한 사람의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최일환과 대조적으로 조 과장에게는 아이가 ‘괴물’이라고 지칭될 만큼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 그 ‘성과’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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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능력이 장애가 될 때
부모에게서 유전된 아이의 잠재력을 감춘 채 국가의 감시를 피해 낯선 곳에 정착한 엄마는 여간해서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어디로 ‘부양’할지 모르는 아이가 걱정된 나머지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다 큰 아들을 업고 다니며 부양한다. “업고 다니기엔 아가 너무 큰 거 아니가? 아가 어데 장애가 있는가?” 그러나 ‘장애’라는 그 한 마디가 매 순간의 삶이 팍팍한 젊은 엄마의 거스러미가 일어난 마음을 건드린다.

“애가 모를 것 같아요?”, “뭐를?”, “그렇게 보는 거요. 그런 말 하시는 거요.”, “내가 우째 봤는데? 그라고 뭔말?”, “우리 애 장애 없어요. 그리고 애가 정말 장애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몇 년 동안이나 든 적 없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분을 삭인다. 그러나 덩치만 컸지 냉장고와 냉동고도 헛갈리는 남다른 아들을 가진 정육점 사장님은 덤덤하게 그 마음을 받아준다.

“내가 아를 빤히 쳐다봐가 오해했는가 본데, 아, 내가 보기엔 그, 아가 업혀 있는 게 좀 많이 답답해 보이가 안 그랬나. 그, 아를 너무 꽁꽁 싸매 놓은 거 아이가? 여, 여. 몰랐나? 아 키우느라 거울도 못 봤나? 아만 그카나? 엄마도 힘들다. 서로 좀 띠 놔야 편할 긴데. 그라고 그게 다 엄마 욕심이다. 아가 좀 크면은 엄마가 띠 놔줘야 된다. 아는 그래야 큰다.”

엄마는 그래서 업고 다니던 아이를 비로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래도 불면 날아갈까 많이 먹이고 자주 먹이며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가방에 쇳덩어리를 넣어 가면서 무겁게 세상에 발붙이게 만든다.
엄마의 착한 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순하다. 혼자만의 생각에 더디고 말이 늦은 편이기는 해도 매일 타는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변함없는 인사를 건넬 줄 알고 무거운 몸과 짐 때문에 매일같이 지각을 하면서도 꾀를 부리지 않고 청소 당번을 도맡는다. 다른 사람 앞에 잘 나서지 않고 학교의 누군가와 어울리지도 않지만 모두를 조심스레 관찰하고 배려한다.

가장 친한 친구 말대로 “잘 먹고 자주 먹고 착하고 배려심 넘치고” 있는 그대로 순순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하지만 소년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사실 소년을 무겁게 만드는 것은 남다른 몸무게도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도 가방에 든 쇳덩어리도 아니다. 구름 위까지 날아오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졌지만 그 재능을 쓸 수도 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이 버겁고 힘들다.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무슨…그게 무슨 영웅이야?…히어로? 아니야. 다른 사람 마음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말이 다 옳다. 어린 아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은 비바람에 날아가 버릴 뻔 했던 그날 밤, 엄마의 안간힘으로 겨우 땅에 발붙일 수 있었던 그 밤 이후 부양하는 자신의 초능력을 포기했다. “부양, 돌보다. 부양, 떠오르다. 엄마의 부양으로 나는 부양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초능력은 이상한 것이다.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년은 정상적인 아이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무거워졌다.

“이상하지 않아, 특별할 뿐이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맛있는 것을 먹거나 칭찬을 듣는 것보다 더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래서 소년의 마음은 아무리 원주율을 외워도 들뜨고 몸은 자꾸만 떠오른다. “너 뭐야? 너 몸이 떠?” 들켜 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상한 나의 비밀을. 콘트롤이 안 되고 무거운 것이 있어야 가라앉을 수 있는 내 몸을, 그 아이가 몸을 던져 붙잡는다.

“난 안 다쳐. 괜찮아.” 날아오르려는 몸을 붙잡아 가라앉히고 비를 맞으며 비틀비틀 먼 길을 돌아 집까지 데려다준다. 내가 늘 집에서 먹는 특별한 왕왕돈까스를 함께 먹어주고 엄마가 깎아다준 산더미 같은 사과도 마다 않고 잘 먹는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그의 비밀을 캐기 위해 뒤를 밟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너랑 친해지면서 네가 뭔가 다르다는 거 눈치 챘었거든. 확인하고 싶었어. 정말일까? 정말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도 이상한 나를, 내 능력을 부럽다고 말한다. 소년은 부러워할 능력이 아니라고, 자신의 남은 비밀을 다 털어놓는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말한다. “힘들었겠다. 몸이 자꾸 떠서.” 소년은 덤덤하게 ‘이상한 나’의 비밀을 받아들여주는 친구가 고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한다. “너 이상하지 않아. 조금 다르고 특별할 뿐이야.” 남다르기 때문에 감춰야 하던 능력과 이상하기 때문에 싫어지던 내 자신이 이렇게 인정받는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너 같은 사람도 있고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비밀 지켜줄게.”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은 비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비밀을 일방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 사람도 상대에게 자신의 비밀을 공유해야 온전한 계약이 성립된다.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서로가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거지. 그럼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게 되니까. 누구나 비밀 하나쯤은 갖고 있으니까. 네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내 비밀도 얘기해줄게. 너도 내 비밀 지켜줘.” 소녀는 소년에게 전에 있던 학교에서 잘린 거라고, 그 학교의 일진들과 17대1로 싸웠는데 싸웠던 상대들은 모두 다쳤는데 자신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고, 그래서 쌍방 폭행조차 성립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너는 하늘을 날지? 나는 절대 다치지 않아.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소녀는 교통사고가 나서 엄마를 잃었을 때도 자신은 그 능력 때문에 다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켜보던 엄마의 얼굴이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때 엄마가 나만 살아난 것에 슬퍼하지는 않았는지 걱정된다고 털어놓는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에게 받았던 위로를 되돌려준다. “웃으셨을 거야, 너의 어머니. 네가 안 다친다는 걸 알게 되셨을 테니까.” 다르고 특별하니까 좋은 거지.

기대면서 사니까 사람(人)이지
“나는 내가 걱정돼요. 아무도 나를 걱정해주지 않아요. 나만 나를 걱정해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나는 모두에게 피해만 주고 있어요. 모두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지나치게 많은 전기가 흐르는 몸을 가진 전계도는 자꾸만 전기 사고를 일으키는 재능 때문에 무대에서 주목받는 배우의 꿈을 포기한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문 안에서 쓰러진 어머니가 유일한 피붙이인 아들이 없는 곳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을 미리 보는 것뿐이다. 그래서 수십 년을 얼굴조차 마주한 적이 없던 아버지를 찾아가 혼잣말을 하다가 돌아선다. 없는 듯 아들의 말을 듣고 있던 아버지는 그 긴 넋두리에 한 마디로 답한다. “모두에게는 아니다.”

은퇴한 초능력자들을 ‘청소’하기 위해 파견된 프랭크는 첫 번째 임무에서부터 들었던 ‘어중간’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는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의 존재를 감추는 그들이 이해가지 않는다. 아니, 아이가 가진 초능력을 이상하게 여기고 감추며 경원하다가 결국은 버리고 만 자신의 부모를 원망한다. 그의 원망은 너무 오래 묵어서 이제 거의 평생을 바쳐 풀어야만 하는 수수께끼가 됐다. 그 수수께끼의 틈으로 ‘어중간’이라는 말이 파고든다. 돈까스와 왕돈까스 사이, 그러니까 미디엄과 라지 사이즈 사이의 그 어딘가.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을 낳는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렇다. 세상에 같은 얼굴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사람은 제각각 남다른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르고 특별한 점이 꼭 비범하게 빼어난 능력이 아니라도 괜찮다. 설사 내가 가진 것이 정말 이상한 장애라서 세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누군가 한 사람쯤은 이해하고 공유하고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사소한 비밀들, 예를 들면, 부모님이 자영업을 하신다는 공통점이나 같이 먹을 친구가 없는 ‘아싸(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자기도 모르게 붕 뜨는 몸을 지녔든, 찢기고 베이고 깨져도 절대로 다치지 않는 몸을 지녔든, 통제 불능이 될 정도로 빠르거나 세기 때문에 쉽사리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는 몸을 지녔든, 사랑하는 사람이 자연스레 나이가 드는 동안도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몸을 지녔든, 누구에겐가는 소중한 부모이고 자식이고 제자이고 스승이고 친구이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아니, 그저 아침마다 타게 되는 버스 운전사와 승객 사이라도 며칠 동안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쓰이고 걱정이 될 수 있다. 원래 저마다 혼자인 외로운 이들이 서로 기대고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초능력이 있든 없든,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무빙> 속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형 히어로의 ‘사람’ 이야기
글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