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에 설립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최우선 목표는 ‘물가 안정’이다. 지난해 3월부터 Fed가 기준금리를 숨 가쁘게 올려 왔던 것도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경제 성장 등 다른 거시경제 목표를 크게 훼손하지 않고 물가 안정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유로화 탄생의 근거가 됐던 로버트 먼델의 최적통화이론에 따라 지난 110년 동안 달러화의 영향권을 감안해 Fed의 역할을 평가하면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전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국제통화기금(IMF) 탄생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미국의 중앙은행’, 그 이후에는 ‘세계중앙은행’의 역할을 했던 시기다.
1기 때 Fed는 물가 안정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스무트-홀리법으로 상징되는 각국의 극단적 보호주의로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Fed는 금리 인하 등을 통해 경기 부양에 나섰다. 하지만 1차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여건에서 Fed의 금융 완화 조치는 곧바로 인플레이션을 촉발시켰다.
당황한 매리너 에클스 Fed 의장은 성급하게 금리를 대폭 올렸지만 오히려 미국 경제를 ‘대공황’이란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Fed 역사상 최대 치욕으로 평가되고 있는 ‘에클스 실수(Eccles’s failure)’다. 그때까지 주류 경제학이었던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Fed가 개입하지 않고 시장에 맡겨 놓았더라면 대공황이 10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좀비(죽은 시체)’라는 혹평을 들을 정도로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Fed를 구해낸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주도했던 ‘뉴딜 정책’이다. 만성적인 초과 공급 여건에서 정부 주도로 총수요를 진작시켜 대공황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총수요 관리 대책의 근거가 된 케인즈 이론이 탄생됐다.
2기에 접어들어서는 외형상으로 Fed의 전성시대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이 기간에는 달러 가치가 급값에 연동된 브레턴우즈 체제가 잘 작동됐기 때문이다. 1960년대 케네디·존슨 정부의 경기 호황기에도 물가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Fed가 잘했다기보다는 국제 통화 체제의 요인이 더 크다.
‘물가 안정’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해 Fed의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던 때는 1970년대 이후부터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금 태환 정지 선언 이후 과도기인 스미스 소니언 체체를 거쳐 1976년 킹스턴 회의를 계기로 국제 통화 체제가 자유변동환율제로 넘어가면서 브레턴우즈 체제가 최대 시련을 맞았기 때문이다.
인플레 원천도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총수요’ 측에서 ‘총공급’ 측으로 바뀌었다. 다른 거시경제 변수와 관계도 물가와 경제 성장 간 ‘정(正)’에서 ‘부(負)’의 관계로 바뀌었다. 2기 들어 Fed가 통화정책의 근간으로 삼아 왔던 케인즈언 총수요 관리 대책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다.
2차 오일쇼크 발생 시점에 취임한 폴 볼커 의장은 장고 끝에 Fed의 설립 목적에 충실해 금리를 17%까지 올리자 물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가 안정 기조가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1980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금리를 9%대로 내리자 물가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에클스 실수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볼커 실수(Volker’s failure)’다.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볼커 실수는 레이건 정부의 공급 중시 경제학으로 해결했다. 래퍼 곡선을 바탕으로 하는 이 이론은 세율 감소 등을 통해 경제주체들의 의욕을 고취시켜 경기 침체를 방지하고 물가도 잡을 수 있었다. 그 후 Fed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인터넷 등의 발달로 고성장·저물가의 신경제 신화 덕분에 제2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갈림길에 선 통화정책, 물가냐 경제냐
코로나19 사태 이후 공급망 차질 등을 빚으면서 Fed는 또 다른 통화정책 여건을 맞고 있다. 무려 40년 만에 맞은 물가 문제에 초기에는 ‘일시적’이라 오판하고 오히려 ‘평균 물가 목표’라는 애매모호한 제도까지 동원해 그대로 방치했다. 이 과정에서 물가는 목표선인 2%를 4배 이상 웃돌았다.
뒤늦게 심각성을 인식한 Fed는 지난해 3월 이후 금리를 급격히 올려 일단 물가는 잡히는 추세다. 1980년대 초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과연 금리 인상을 중단하고 내려야 할 것인지 아니면 볼커 실수를 교훈 삼아 물가가 완전히 잡히기까지 금리를 계속 올려야 하는 것인지, 이 상황에서 고용지표가 헤드 페이크(head fake) 논쟁에 휩싸이고 있다.
헤드 페이크는 농구 게임에서 상대방 선수가 앞에 있을 때 일단 머리를 흔들어 기만한 다음 슛을 쏘는 장면에서 유래된 용어다. ‘착시’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지만 상대방의 판단을 흐트러트린다는 의미로 통계학에서 1종 오류, 2종 오류에 해당한다. 경제적으로는 가장 최근에 발표된 지표(헤드)가 추세에서 벗어나 갑자기 방향을 트는 현상을 말한다.
헤드 페이크 논쟁의 시발점은 7월 3.5%에서 3.8%로 크게 높아진 8월 실업률이다. 시장도 민감하게 움직였다. 8월 실업률이 발표되자마자 “추가 금리 인상은 물 건너갔다”고 읽혀지면서 연착륙 랠리 기대가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헤드 페이크 우려가 제기되면서 주가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Fed는 고용지표의 헤드 페이크 실체가 명확해질 때까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성급하게 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면 에클스 실수와 볼커 실수를 동시에 저지를 수 있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이미 2년 전 실수가 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 결과는 ‘Fed의 무용론’과 ‘파월의 교체’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40년 만에 다시 곤경에 빠진 Fed와 파월 의장을 이번에는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대내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붕괴, 대외적으로 중국의 추격 등으로 어려운 국면에서 출범했던 바이든 정부가 내놓았던 정책 처방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골자로 한 신공급 중시 경제학(New Supply Side Economics·NSSE).
NSSE의 이론적 근거는 바이든 정부의 실질적인 경제 컨트롤타워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1999년 4월 예일대 동문회에서 처음으로 언급하며 알려지기 시작한 ‘예일 거시경제 패러다임’이다. 이 정책 처방은 오마바 정부 시절에도 경제정책의 근간이 되면서 최대 난제였던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적용됐다.
미국 경제의 최종 목표인 지속 가능한 성장과 물가 안정 그리고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물적자본, 인적자본,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등을 강조했다. 정부는 친기업 정책을 추진해 이윤이 높아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권고했다. 세제도 법인세 대폭 인하와 R&D투자세액공제제도를 도입하고 소비세율을 높여 저축과 투자가 함께 늘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봤다.
NSSE가 1980년대 초 공급 중시 경제학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는 기업의 활동을 보다 더 자유롭게 해 공급망 확보 등에 초점을 맞춘 데 있다. 법인세 최소세율 15% 등을 통해 해외에 나가 있는 미국 기업을 환류시키는 ‘리쇼오링(reshoring)’과 함께 당장 들어올 수 없는 미국 기업은 ‘니어쇼오링(near-shoring)’과 ‘프렌드쇼오링(friendshoring)’ 정책을 병행해 동맹국으로 이전시켰다. 동일한 차원에서 외국 기업과 자금도 리플럭스, 니어플럭스, 프렌드플럭스를 추진하고 있다.
NSSE의 효과를 총공급 곡선(AgS: 노동 시장과 생산함수에 의해 도출)과 총수요 곡선(AgD: 투자와 저축을 의미하는 ‘IS 곡선’, 유동성 선호와 화폐 공급을 의미하는 ‘LM 곡선’에 의해 도출) 이론을 통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NSSE 추진으로 해외에 나가 있는 미국과 외국 기업이 들어와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게 되면 총공급 곡선이 우측(AgS1→AgS2)으로 이동돼 성장률이 높아지고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는 ‘골디락스’ 국면이 도래한다.
실제로 NSSE의 성과는 눈부시다. 지난해 3분기 이후 미국 경제는 2%대의 안정적인 성장세를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3분기 성장률이 무려 6%까지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 6월 9.1%까지 치솟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년 만에 3%대 초반으로 안정돼 클린턴 정부 시절 신경제 신화가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바이든 정부 출범 초 턱밑까지 쫓아 왔던 중국과의 격차도 다시 30년 이상 벌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저성장에 물가 상승…한국의 통화정책은
한국 경제는 저성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7월 2.3%에서 3.4%로 크게 오르자 헤드 페이크 논쟁이 일고 있다. 한국은행은 9월 이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제자리를 잡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일단은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높아진 것을 헤드 페이크로 보고 있다. 이 시각대로 된다면 지난 2월 이후 금리 동결 추세는 앞으로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급등한 것이 헤드 페이크보다 인플레가 재발되면서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 닥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8월 소비자물가를 상승시킨 가장 큰 요인인 국제 유가 상승세가 꺾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말 이후 국제 유가는 이미 30% 넘게 올랐다.
국제 유가 향방의 키(key)를 쥐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는 고유가 정책을 선호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비전(Vision) 2030’ 계획에 들어갈 재원 마련을 위해, 러시아는 전쟁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유가가 높게 유지될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계절적으로도 세계 원유 수요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북반구 지역이 동절기에 들어가는 것도 변수다.
8월 소비자물가를 상승시킨 또 다른 요인인 농산물 가격은 앞으로는 유가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다. 올해도 폭염, 가뭄, 홍수 등에 따른 이상기후로 세계 주요 농산물 산지의 작황 상황이 역대 최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어느 해보다 유난했던 슈퍼 엘리뇨 현상은 올해보다 내년이 더 심하게 나타날 것으로 예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플레가 재발되면 한국은행은 지난 2월 이후 동결해 온 금리를 다시 올려야 하는 상황에 몰릴 수 있다. 금리 동결을 지속해 나가면 물가를 키우는 볼커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성장 국면이 지속되는 여건에서 물가만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를 더 침체시키는 에클스 실수를 저지를 확률도 높다.
한국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 닥친다면 현재 놓여 있는 정책 여건으로 볼 때 풀어 가기가 쉽지 않다. 통화정책은 물가 부담으로 금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은 못 된다. 재정정책은 ‘거대 야당’이라는 입법적 한계로 재정지출을 늘리기가 어렵고 늘린다 하더라도 국가채무 과다에 따른 구축 효과로 경기 부양 효과는 적은 대신 물가만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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