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은 말한다. 칼, 방울, 거울이 나타나는 순간 이 세상은 끝난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물러서지 않는 이 재림한 신은 칼의 현신이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영웅의 기세는 분명 남다르다. “어비 온다, 뚝!” “호랑이 온다, 뚝!” 세상 가장 무서운 것으로 우는 아이를 어르던 ‘주문(spell)’들을 기억해보자. 그래서 이 드라마에도 그런 주문이 등장한다. “이나이신기가 온다!”
영웅을 꿈꾸는, 영웅이 꿈꾸는 세상
신은 죽었다. 신의 피를 받고 인간의 세상에 살았던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영웅들도 죽었다. 신이나 영웅이 대접받는 세상이 아니다. 루카치가 말한 것처럼, 신에 의해 선포되고 영웅에 의해 증명된 세계의 원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찬미되던 서사시의 시대는 끝났다. 현대인들은 갈기갈기 찢기고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파편화되고 분열적인 소설의 시대를 산다. 이 시대의 관객과 독자는 인간의 세상을 떠나 저 신들의 세계로 떠난 영웅을 더 이상 칭송하지 않는다. 신들과 함께 떠나지 못한 영웅은 오히려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제 정말 아무도 영웅을 바라지 않을까.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높이 매달린 포도는 틀림없이 설익어 시큼할 거라 투덜대며 돌아서는 여우의 비겁한 변명은 아닐까.
꽃부리 영(英), 수컷 웅(雄), 활짝 피어나기 위해 단단히 맺힌 꽃봉오리처럼 어느 모로 보아도 눈에 띄는 사나이. 영웅이라는 이름을 글자 그대로 풀면 그런 뜻이 된다. 조지프 캠벨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 이 영웅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을 그린 하나의 원형(monomyth)에서 나왔다고 했다. 영웅은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웅으로 성장한다.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곧 분리-입문-회귀의 확대판”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웅은 낡아빠진 세계의 원리를 폐기하고 새로운 세계의 원리를 창조한다. 때로는 균열된 세계의 질서를 봉합하고 보완하며 다시 기능할 수 있도록 재창조하기도 한다. 고대의 영웅은 하나의 세계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가치들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인물이었다.
<아라문의 검>은 한국형 신화 판타지 드라마를 표방한다. 모던의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표방하며 휴먼 이후를 이야기하는 21세기에,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다시금 오래된 영웅의 신화를 소환하고 지금은 아득히 멀어진 영웅의 원형(archetype)을 꿈꾼다. 어째서일까. 하나의 세계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가치를 제시하는 인물을 현대의 우리는 ‘리더(leader)’라고 부른다. 리더십, 더욱이 바람직한 리더십이라는 것은 여전히 모든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아라문의 검>에는 2명의 영웅과 그들의 신화가 등장한다. 아스달의 아라문 해슬라와 아고족의 이나이신기. 사실 이들은 모두 현재(작품 내 기준)의 영웅이 아니라 200여 년 전의 영웅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의 ‘재림’을 기원한다. 이 드라마의 세계관에서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문명을 이룩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문자와 청동기를 받아들인 아스달에는 재림 아라문 해슬라인 타곤이 있고, 연맹체였던 아스달을 왕국으로 바꾸고 그 내분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전쟁을 일으킨 타곤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분열됐던 숲과 폭포의 민족 아고는 지난 8년 동안 재림 이나이신기 은섬을 따르며 민족대통합을 이루어냈다. <아라문의 검>은 바로 이 서로 다른 두 역사문화공동체 사이의 대격돌을 다룬다. 싸움은 중과부적이고 역사는 이긴 자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야기들은 언제나 상식과는 다른 극적인 상황을 더 선호한다. 다수에 대한 소수의 승리라거나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 적어도 그 가능성을. 그리고 그 소수이자 약자가 더 바람직한 가치관을 제시할 때 더 강력하게 매혹된다.
두 사람의 영웅이 말하는 것
재림 아라문 해슬라, 아니 자신의 이름을 내건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타곤은 ‘왕’이 되기를 희망한다. 왕은 세계의 통치자이자 온전한 자아의 표상이다. 전장을 누비는 전사로서 살아온 타곤의 일생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시련으로, 아니, 사실은 왕인 ‘나’의 이름을 위한 학살로 점철됐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괴로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저주할 만큼 괴로워. 근데 그 괴로움을 티내는 건 비겁한 거야. 기꺼이, 당당히, 가차 없이! 희생시키는 거야.” 왕은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 권력도, 군대도, 지식도, 죄의 비밀도, 도저히 씻을 수 없는 피의 업보도, 그 업보가 수반하는 모든 괴로움까지. 그래서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아는 모든 사람을 죽였고 죽이면서 ‘사과한다’. 타곤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일생을 투쟁해 온 그 앞에 전혀 다른 신인류가 등장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그게 정말 좋은가?”
재림 이나이신기 은섬은 자신이 ‘이나이신기’임을 믿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와한의 은섬이라는 것을 ‘이미’ 안다. 그 존재 가치는 나면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길 리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나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한다. 은섬은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걸 뒤집으면 간절한 바람과 희망이야. 내가 처음 아고하 땅에 갔을 때, 그들은 서로를 해칠 생각밖에 없었어. 배신과 의심뿐이었다고. 근데 왜 날 이나이신기로 삼았는지 알아? 지치고 지쳐서. 자신들도 희망을 갖고 싶으니까 날 이나이신기로 내세웠던 거야.”
은섬은 이방인이다. 와한에서도 아고에서도, 뇌안탈이라는 푸른 피를 지닌 인종과 사람이라는 붉은 피를 가진 인종이 뒤섞여 탄생한 혼혈 이그트. 보라색 피를 가진 그는 어디서든 ‘혼자’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로 태어났어도 혼자서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안다. 와한에서 깃바닥에서 아고에서, 믿었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삶의 연속이었지만, 은섬은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기대는 삶을 받아들인다. “은혜를 입지도, 누굴 돕지도 않고, 해침을 당하지도, 누굴 해치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가지? 사람이 사람 속에 살면 그게 다 갈마 아니야? 산다는 건 그냥 갈마, 그 자체인 것 같은데. 그래서 괴롭기도 하지만, 그래서 행복하고, 위안받고, 벅차오르기도 하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지만, 은섬의 주변에 그에게 도움 받고 그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건 그 때문이다.
“넌 아라문이 되기 위해 뭔가를 하지만, 난 뭔가를 하기 위해 아라문이 되려는 거야.” 작가의 말처럼 타곤은 ‘되고자’ 하는 영웅이고 은섬은 ‘하고자’ 하는 영웅이다. 타곤은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 자신이 되기 위해 일생 무수히 많은 피의 업보를 지었다. 은섬은 “약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재림 이나이신기가 됐고 재림 아라문 해슬라가 되려 한다. 마주한 담판 자리에서 타곤은 “와한의 은섬이자 아고족의 재림 이나이신기인 네가 어째서 아라문 해슬라가 되려 하느냐”고 묻는다. “약한 게 죄가 되지 않은 세상, 힘없는 게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라며 이상을 말하는 은섬을 타곤은 비웃는다. “그런 세상은 만년이 지나도 오지 않아.”
- 약한 게 죄가 되지 않는 나라
타곤만 은섬의 이상을 비웃는 것이 아니다. 그의 동료들조차 그 이상에 의구심을 품는다. “나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옛날이야기에서도 약탈 없는 군대란 들어본 적이 없어. 근데 은섬이가 그걸 하려는 거잖아?”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고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핍박하는 건 세상의 이치, 아니, 자연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타곤은 “그게 질서고, 균형이야”라고 한다. 노예든 하호(가난한 사람)든 바치(장인)든 구별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대제관의 행동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고 막으려 하면서 말한다. “난 상관없어. 노예한테 잘 해주든 말든. 하지만 작은 특권이나마 누렸던 사람에겐, 특권이란 폭력이야. 가혹하기 그지없지. 같은 백성이면 그들 맘도 좀 헤아리라고.” 공자도 말씀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답도록(君君臣臣, 父父子子) 하는 것이 정치라고. 타곤과 공자가 설파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계급사회의 덕목이다.
고대사회에서는 대부분 ‘하늘의 아들(天子)’을 정통성 지닌 통치자로 받아들였다. 하늘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모든 특권을 부여받고 세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만물을 번영케 할 의무를 지닌다. 그래서 나라가 황폐해지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은 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와 의무를 진 통치자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된다. ‘하늘의 아들’인 왕은 하늘을 대신해 세상 만물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이러한 사유는 대사제가 곧 왕이 되는 신정일치의 시대가 끝이 난 뒤에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정신문화는 고유한 관성 때문에 물질문명에 비해 변화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물질적인 기반과 정신적인 사유가 시차를 보이는 문화지체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왕이라는 특권자뿐 아니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천부인권’을 지니게 된 현대에도 고대의 계급사회가 제시한 세계 원리는 여전히 존속한다. “신은 오직 약한 자를 벌하시니.” 그래서 약한 자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신, 나름의 믿음이 생겨난다. 노예도, 좌솔(벼슬아치)도, 상인도 모두 아사신이라는 공통의 조상을 가진 같은 사람의 후예라는 믿음이. 이 하늘 아래 모두는 하늘로부터 직접 그 권한을 물려받은 모두 같은 아들, 딸들이다. 차등도 필요하고 평등도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백 가지도 넘는 별(百星)
<아라문의 검>은 시즌제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의 두 번째 시즌이다. 첫 번째 시즌은 아스달 연맹이 해체되고 타곤이 왕위에 올라 왕국을 선포하며 연맹인들을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하는 장면으로 갈무리된다. ‘백성’, 갓을 쓰지 않은 민머리를 가진 사람, 즉 관직이 없는 사람을 부르던 이 이름을 드라마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백 가지도 넘는 별(百星)”로 재명명한다. 아사신의 직계로서 노예 출신으로 대제관의 자리에 오른 탄야는 왕을 위해 이 이름을 정하고 마음속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기원한다. “나 와한의 탄야, 아스달의 모두에게 주문을 건다. 당신들은 비록 높낮음이 있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시작하지만, 그대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나 또한 그대들과 이리 얽혔으니, 내가 그대들을 지키는 한 내게 힘이 돼주길. 나의 백성들이여!”
한 사람의 통치자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하나의 원리에 의한 차등적인 분배가 질서와 균형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백 사람, 천 사람, 만 사람 세상의 모두가 ‘하늘의 아들’인 현대에는 수많은 질서가 갈등하고 충돌한다. 현대인들은 아무도 ‘전부’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 없는 세계에 존재하지만, 하늘이 준 ‘전부’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의무에 묶여서 살아간다. 소수의 특권자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세상을 원망하며 ‘헬조선’이라고 부르지만,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호혜로운 세상이라는 것은 신화나 전설 속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현대인의 이러한 깨달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라문의 검>에서 주인공 은섬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혼혈인 이그트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배척당하고 멸시받는다. 심지어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하고 자신이 구하려고 애쓰던 사람들에게조차 끊임없이 배신당한다. 은섬은 스스로를 ‘와한의 별’이라 여기고 그들을 아스달에서 해방시키려 하지만 이미 왕국의 백성이 된 그들은 구원의 손길을 뿌리친다. 거듭되는 배신은 종종 자신이 믿어 왔던 신념을 버리고 모시던 신을 저주하는 이유가 된다. ‘검은 머리 짐승은 남의 공을 모른다’는 오래된 속설이 힘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제관이 신의 이름으로 “가장 멸시하던 자를, 가장 낮게 있던 자를 따르고 받들라. 가장 배척하던 자를, 가장 낯선 자를 우러르라! 그리하면 너희들이 생각지 않은 때에 아사신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게 되리라”는 진리를 설파해도, 신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처럼 너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그것이 좀 더 괜찮은 ‘나’가 되는 방법이라고 설득해도, 심지어 그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삶으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묻지마 살인’으로 친구를, 형제를, 자식을 잃은 사람에게 그 범죄자를 용서하라는 말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용서의 무력함을 느낀다. 우리가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힘이 있다면 나도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가원리야말로 공정한 법의 기초라는 믿음에 마음이 쏠린다. 소수의 아고군을 수세에 몰았다고 자만하는 아스달 대군의 군장은 위협에 휘파람살을 날리며 당당히 외치는 은섬의 말은 그래서 통쾌하다. “그래, 맞아. 신은 그 어떤 신이든 약한 자를 벌하지. 약한 자들이여, 이제 그 벌, 받아라!”
“약한 게 핑계가 될 수는 없어.” 동무들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몬 뭉태가 약해서 비겁할 수밖에 없었으니 살려주자고 애원하는 달새에게 분노하는 은섬이 말한다. “난 약한 게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든다고 했지, 무슨 죄든 용서하는 세상을 만든다고 하진 않았어. 그건 다른 거야.” 약하다는 이유로 빼앗기고 짓밟히고 침묵하는 일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약하다는 이유로 빼앗기고 짓밟히고 침묵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약한 것에 기대어, 약한 것을 핑계 삼아 ‘나’로서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에게 얹혀살려는 프리라이더를 용인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유와 평등은 좋은 말이지만,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의 최대 자유라는 말은 1km²에 514.6명이 사는 대한민국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왕과 같은 의무를 오롯이 지면서 왕과 같은 절대적인 권한을 누릴 수 없는 것, 어쩌면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매일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큰 딜레마일 것이다. 이나이신기는 전투의 승리감에 취해 함락된 성의 어린아이를 때리고 물건을 빼앗은 아고족 전사 앞에서 피해자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빼앗긴 것은 갚을 것이고, 다친 곳은 치료해드릴 겁니다.” 그러나 가장 약하고 어린 자에게 무릎을 꿇는 이나이신기는 모두에게 관용적인 리더는 아니다. 이나이신기를 무릎 꿇게 만든 아고족 전사는 목숨으로 그 빚을 갚는다. 드라마는 이 장면을 매우 숭고하게 연출하고 이나이신기의 신성은 현대를 사는 우리조차 바라는 리더십으로 전화한다. 이 드라마는 확실히 소설이 아니라 서사시, 신화적 서사시다.
<아라문의 검>은 신화적 서사시다
역사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에 불과한 반면, 신화는 반복적이고 필연적으로 되풀이되는 보편적 원리를 재현하는 일종의 진리 명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진지하다”고 말했다. 여기서 ‘시’는 신과 영웅들을 노래하는 서사시, 즉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 같은 작품을 가리킨다. 이 서사시는 운문으로 적혔기에 ‘시’라고 불리지만, 주로 신와 영웅들을 기리는 서사, 그러니까 신화다. <아라문의 검>으로 갈무리된 시즌제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는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을 대체하는 문명의 전환을 이야기한다. 이 신화는 부족연맹제가 씨족들의 원시공동체를 대체하고, 문자가 언어를 대체하고, 농업과 축산이 채집과 사냥을 대체하고, 왕이 연맹장을 대체하고, 철기가 청동기를 대체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중세의 봉건제는 가톨릭교회의 신화를, 산업혁명은 과학에 대한 신화를 필요로 했다. 절대왕정의 왕들에게는 왕권신수설이라는 신화가 필요했고, 부르주아들에게는 사회계약설과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가 필요했다. 이처럼 하나의 문명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서 신과 그의 이야기인 신화를 필요로 한다. 신화는 믿음을 창조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믿음의 이야기로서 신화를 필요로 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바람직한 세상의 원리를 구현하고 방향을 제시할 영웅을 원한다.
글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 사진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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